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6)화 (226/306)


#226. 인형의 저택 (3)
2023.03.14.


은하의 오피스텔 건물 엘리베이터.

이준이 벽면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재킷을 툭툭 털어 내고 표면의 주름을 펴 낸 뒤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옅은 빛을 띤 금발이 수려한 이마 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가운데, 그 아래에 위치한 그의 은회색 눈동자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헤드 헌터 회담, 그곳에 은하가 참여했다는 건 이준도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고 싶었지만 헤드 헌터가 아닌 이준은 그곳에 참석할 권한이 없었다.

회담은 어떻게 됐을까. 별문제는 없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의 귀국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뉴스를 통해 흑염의 프린세스가 일정보다 빨리 귀국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런데 은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돌아오면 전화 한 통 달라고 했는데 잊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연락이 없다는 이유로 신경이 쓰여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질척거리고 변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그 애에게 별일이 없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멀쩡한 일상생활조차 하지 못하는데 어쩌겠는가.

‘나도 참.’

이준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은하를 잃은 30년의 세월 동안 도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에서는 거의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어쨌든, 답이 없는 휴대전화에 온갖 신경을 쏟은 채 며칠을 보내기보다는 직접 찾아와 은하를 확인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었다.

“…….”

이준은 앞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것을 확인하자 저도 모르게 잇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연락하는 걸 까먹은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어째서일까.

자꾸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17층입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준은 은하의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은하가 아닌, 그녀의 매니저인 제휘였다.

“헉!”

제휘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놀란 얼굴이었다. 청소를 하고 있던 모양인지, 입고 있는 앞치마 주머니에 마른 헝겊이 꽂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은하 집에 있습니까?”

이준은 입가에 사무적인 미소를 건 채 예의 바른 어조로 물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제휘는 눈을 재빠르게 여러 번 깜빡였다.

“아, 차 헌터님이라면 오늘 아침 일찍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동두천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동두천에는 왜…….”

이준의 얼굴이 살포시 굳었다. 힐끔힐끔 이준을 살피던 제휘는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음,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 매니저가 진짜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떠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은하와 이준의 사이에 대해서는 이미 대충 알고 있겠지만, 어쨌든 제휘는 전적으로 은하의 관계자다. 아무리 오랜 동료인 이준이라고 해도 목적이 불분명한 이상 은하의 정보를 쉽게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즉 그가 은하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한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 것이다.

‘동두천.’

……동두천이라.

그 순간 한 가지 단서가 이준의 머릿속을 번뜩 스쳤다.

‘최근 괴담 속 존재가 동두천 근처에서 유독 많이 목격되고 있다고 합니다. 협회 직원을 통해 전달받은 이야기니 정확할 겁니다. 관련한 자료의 복사본은 지금 준비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캐서린이 그런 보고를 했지.

아직 명확한 자료를 전달받기 전이었던 데다, 괴담 속 존재를 보았다는 목격담은 원래부터가 많았던 터라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동두천을 제외하고도, 하루가 멀다 하고 목격담이 이어지는 지역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은하가 동두천으로 향한 것이라면.

‘무언가 있는 거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느새 이준의 입가에는 예의를 위한 최소한의 미소 한 자락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드레스를 입고 갔습니까?”

“네?”

“흑염의 프린세스 복장으로 집을 나섰냐는 말입니다.”

“아, 넵. 양산은 챙겨 가셨고 드레스도 따로 종이 가방에 넣어 드렸는…….”

말끝을 흐린 제휘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눈앞에 선 이준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버린 까닭이었다.

* * *

“루시, 여기는 네가 없는 동안 내가 꾸며 봤어. 어때, 마음에 드니?”

은하는 눈앞의 상대, 자신의 것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녀를 응시했다.

조디악과 닮은 기운을 풍기는 수수께끼의 소녀는 아까부터 은하를 ‘루시’라 부르며 저택 여기저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난 루시가 아니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뱉었던 말이지만 은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소녀는 전혀 듣지 않았다.

“아니, 넌 루시야.”

단호하게 입을 연 소녀는 은하의 양산과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루시라는 증거야.”

소녀에게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엿볼 수 없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손의 양산을 응시했다. 이것들은 언노운 게이트에서 얻은 물건인데…….

묘한 눈길로 제 물건들을 응시하는 은하에게, 소녀는 한 걸음 다가왔다.

“이해해.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만큼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고…… 힘든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은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잘 들어. 난 루나, 넌 루시야. 여기에 네 물건들을 모아 뒀어. 새로운 네 방이라고 생각해.”

소녀, 루나는 방으로 들어가 보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그렇다고 루나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방에 들어갈 은하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나에게서 감지되는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지만 얼핏 보았을 때 조디악의 표식인 별자리 문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디악이냐고 물어본다 한들, 제대로 답해 줄까?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쳐 버릴까.’

─그도 아니면 조금 더 상황 파악을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은하는 가장 신경 쓰이는 점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여긴 네뷸러인가?”

이 저택은 은하가 겪어 왔던 네뷸러와는 어딘가 달랐다.

말하는 인형이 있기는 했지만 몬스터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퀘스트가 뜬 것도 아니었으니까.

“안심해, 루시. 이 저택은 언젠가 네가 돌아올 날을 위해 내가 따로 만들어 낸 곳이야.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이라니─.

은하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루나는 얼른 등을 떠밀었다.

“자, 이런 이야기는 됐으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 봐. 깜짝 놀랄걸.”

반강제적으로 방 안에 들어선 순간, 문득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은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침대, 정확하게는 그 위에 놓인 물고기 모양의 쿠션을 향해서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뒤적뒤적 털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축하합니다!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을 획득하였습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것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도 스트레스도 확 풀릴 것이라며, 기운이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아이템 사용을 자신 있게 권합니다.]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순환의 줄기’에 갇혔을 당시, 탈출구를 찾지 못해 가만히 앉아만 있던 은하에게 고양이가 선물해 주었던 고등어 쿠션.

지금 눈앞에 놓인 쿠션은 그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어째서?’

은하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어느새 방으로 뒤따라 들어온 루나가 은하 곁에 섰다.

“루시, 조금 기억나? 그 쿠션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잖아.”

은하는 루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침대 위 쿠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후 루나는 은하를 데리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루시’가 좋아하던 정원을 새로 단장했다면서 말이다.

루나의 뒤를 따르던 은하는 문득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네뷸러는 달이 세 개인 곳이다. 그러나 이곳 하늘은 달은커녕 별도 뜨지 않았다.

그저 캄캄한 어둠이 끝도 없이 펼쳐진 곳. 마치 낮이 오지 않는 것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 루나의 말대로 이곳은 본인이 따로 만들어 낸 공간인 걸까.

루나는 은하를 정원 근처의 작은 티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루시, 네가 좋아하던 끝말잇기 할까?”

“…….”

“음, 그럼 소꿉놀이는 어때? 오랜만이다, 그렇지?”

사아아─

꽃잎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시야를 어지럽혔던 꽃잎이 사라지자, 어느덧 작고 앙증맞은 인형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테이블 주변에 모여든 인형들을 보며 은하가 살짝 눈매를 좁혔다.

이건…… 이 아이, 루나의 능력인가? 인형과 관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은하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나는 열심히 소꿉놀이 준비를 하고 있다.

풀을 뜯어 샐러드를 만들고, 분수에서 물을 떠 와 꽃잎을 동동 띄워서 홍차를 대신했다. 정원의 흙을 조물조물 만져서 빵 모양으로 작게 빚으면 완성이었다.

사실 티 테이블 위에는 쿠키나 스콘 따위의 간식이 이미 가득했기 때문에, 굳이 이렇게 고생해서 가짜 음식을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이 과정이야말로 소꿉놀이의 진정한 묘미였다. 은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소꿉놀이 삼매경인 루나를 보며 은하는 소리 없이 양산을 꾹 쥐었다.

조디악을 만나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아스트 때도, 예가임 때도 큰 정보를 얻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루나의 경우, 아스트나 예가임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다.

‘역시 없앨까.’

이곳 정원에 오기 전부터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생각이 다시 한번 물밀 듯 밀어닥쳤다.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지금이라면 기습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내가 만드는 걸 보고 똑같이 만들어 보겠다고 열심히 따라 하던 건 기억나? 다 만들어 놓고 보면 네가 만든 것만 삐뚤빼뚤해서 매번 속상해했었잖아.”

루나는 어딘가 들뜬 얼굴로 옛날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양산을 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힘이 풀렸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에게 오랜만에 끝말잇기 놀이를 제안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응? 응? 끝말잇기 놀이, 할 거냐 말 거냐 재촉해 옵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노래합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어째서인지는 은하도 잘 몰랐다.

그냥, 눈앞에서 혼자 신이 난 듯 재잘거리는 루나를 보고 있으니 자꾸 고양이가 떠올랐다.

“…….”

은하는 양산을 쥐고 있는 손에 결국 힘을 뺐다. 조금만 더 이 아이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탐색해 보자.

다만 이후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은하 입장에서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자, 루시, 네가 좋아하던 차야. 소꿉놀이 전에는 항상 이걸 마셨잖아.”

루나는 은하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이걸 마시라고?’

은하의 시선이 찻잔으로 또르륵 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는, 그저 평범한 홍차 같았다. 향도 특이할 것 없었다.

조디악인지 아닌지 아직까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은하는 본능적으로 루나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느끼고 있었다.

즉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내미는 차를 넙죽 받아먹을 수는 없다.

탁. 은하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사양하겠어.”

“어째서?”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은하는 손으로 찻잔을 멀리 밀어내며 답했다. 그 순간, 다정하기만 했던 루나의 얼굴에 미세한 실금이 번졌다.

“…….”

“…….”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정원을 휘감고 있는 공기가 일순 차갑게 식는 듯한 감각.

굳어 있던 루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한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급격한 변화.

“너…….”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려 두었던 루나의 손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 순간 은하는 테이블에 기대게끔 세워 두었던 양산을 조용히 손에 쥐었다.

따각─

어디선가 나무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작은 인형들이 하나둘씩 턱을 부딪히기 시작한다.

따각따각따각따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앵─!

테이블 위 찻잔이 깨졌다. 잔에 담겨 있던 홍차가 새하얀 테이블보를 붉게 적셔 간다. 푹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루나가 서서히 턱을 들었다.

“너, 루시가 아니구나.”

‘눈빛이 바뀌었어.’

……아니, 눈빛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루나의 눈이 기묘한 황금빛으로 완연히 물들어 있었다.

은하는 손에 쥐고 있던 양산을 허공에 가볍게 털어 내며 바로 잡았다.

“이미 몇 번이고 했던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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