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5)화 (225/306)


#225. 인형의 저택 (2)
2023.03.13.


문 너머는 그저 평범한 방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건 뭐지?’

눈앞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나무 특유의 적당히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장식장? 책꽂이? 가구 같은 느낌이기는 한데 너무 캄캄해서 방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패시브 ▶ ‘밤을 읽는 자’ 활성화.]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고양이가 없어서인지 패시브가 원활히 활성화되지 않는다.

은하는 짧게 혀를 찼다. 기계든 스킬이든 꼭 필요할 때 말썽이다. ‘밤을 읽는 자’만 있으면 이렇듯 어두운 곳에서도 앞을 훤히 볼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화륵!

은하의 왼쪽 어깨 위로 호롱불처럼 작은 흑염이 피어올랐다. 일반적인 붉은 불꽃만큼 환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이 은은한 보랏빛으로 아슴푸레 밝아졌다.

은하는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있던 물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장식장이었다. 정면 부분의 여닫이 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은하는 장식장에 한 걸음 다가가 내부를 확인했다.

“……인형?”

은하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커다란 장식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건 작은 크기의 인형들이었다. 복도의 초상화 속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식장 속 인형들 역시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른 곳을 둘러보니 방 안에는 이 장식장 말고 특별한 가구가 놓여 있지 않았다. 오직 인형을 보관하기 위한 방인 것처럼 말이다.

‘이건 그냥 장식인가? 아니면 몬스터?’

잠시 망설이던 은하는 장식장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자신들을 가두고 있던 유리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인형들은 반응이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여기 있는 인형들은 생김새는 물론 머리카락이나 속눈썹 등 자잘한 디테일까지도 꽤 사실적이었다. 진짜 인간을 인형으로 바꾸어 축소해 두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다.

은하는 조금 더 과감하게 인형들을 살펴보기로 하고, 한 인형을 손에 쥐고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자세히 확인하니 팔꿈치나 무릎 등의 관절이 파츠(Parts)로 나뉘어져 있었고, 몸이 딱딱했다.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확실할 수는 없겠지만, 이 인형들이 사람일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내려갔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사실적인 얼굴과 몸통과는 달리 인형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것들만큼 완성도가 좋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드레스가 어딘가 찢어져 있거나 너덜너덜했다. 그렇지 않다면 바느질이 엉성하거나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이 인형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처럼 비싼 인형을 사서 장식해 두었으면서 왜 이런 옷을 입혀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은하는 손에 든 인형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고개가 고정되지 않은 인형은 힘없이 턱을 떨어트린 채 초점 없이 한군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이랄 것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은하는 그 인형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때,

까딱─

인형의 머리가 미세하게 움직인 것 같다. 기분 탓일까? 아니, 기분 탓이 아니다.

까딱, 까딱…….

은하가 쥐고 있던 인형을 시작으로 장식장 속 인형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하가 장식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자,

“노올자…….”

인형의 턱관절이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하가 당황하기도 전에 목소리는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점차 겹쳐진다.

“놀자, 노올자…….”

장식장에서 하나둘씩 폴짝 뛰어내린 인형들이 엄마의 포옹을 바라는 아기처럼 두 팔을 뻗은 채 은하에게로 아장아장 걸어온다.

워낙 크기도 작은 데다 속도도 빠르지 않고, 귀여운 소녀의 외형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섭다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을 수는 없다. 이것들이 만약 평범한 인형이었다면 이렇게 말을 하며 걸어 다닐 리가 없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몬스터로 보기에도 조금 애매했다. 몬스터 특유의 체취나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으니까.

휘익!

은하는 우선 인형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방 자체가 그다지 넓지 않았기 때문에 곧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놀자, 노올자…….”

어느새 다른 장식장에 있던 인형들마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은하에게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따각따각따각.

인형들이 내는 턱관절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은하는 벽을 등지고 생각했다.

‘어떡하지?’

이 인형들이 몬스터라고 확정하기에는 아직 단서가 너무 없다.

꽤 높은 지능과 복잡한 능력을 가진 몬스터의 경우,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인간을 다른 존재로 변모시켜 조종 혹은 무력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부산 자갈치 시장 언노운 게이트에 들어갔던 당시, 세이렌 형상을 하고 있던 녀석이 노래를 불러 헌터들을 분홍색 산호로 만들어 버린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 외에도 은하는 까마득한 옛날, 눈앞에서 동료가 도마뱀으로 변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이 인형들이 만일 ‘원래는 사람이었던 존재’라면, 완벽하게 ‘변화’해 버린 인간을 원래대로 돌리는 것은 경험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아무런 단서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이 인형들을 닥치는 대로 말살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 혹여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니까.

은하가 망설이는 사이 방에 장식되어 있던 거의 모든 인형이 은하 발밑에 바글바글 모여들었다.

“노, 올자…….”

“나랑, 놀, 자…….”

한 인형이 은하의 드레스 자락을 손에 꼬옥 쥐었다. 은하가 화들짝 놀라 인형의 손을 강하게 쳐 내자, 인형의 손목 관절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형은 배시시 웃으며 또다시 은하를 향해 안아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은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현재 그녀는 벽을 등진 채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였다. 만일 여기서 벗어나려면 저 인형 무리를 해치우고 정면 돌파하거나 벽을 부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이 인형들이 그걸 알고 있다면 은하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진즉에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인형들은 놀자, 놀자 하며 은하에게 통통한 손을 뻗을 뿐, 아무런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은하의 무릎보다도 더 작은 키를 가진 인형들은 은하의 발치에 우글우글 모여, 마치 안아 달라는 듯 깡충깡충 뛰었다.

“나부터, 나부, 터!”

“안, 아 줘, 나아, 안, 아…….”

“놀고, 시, 퍼, 노올, 자.”

인형들이 까르륵,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마치…… 적에게 꼼짝없이 둘러싸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유치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제게 달려드는 인형을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던 중,

“……?!”

은하가 번쩍 고개를 들어 방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팔의 솜털이 찌르르 서는 듯한, 특유의 날 선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지금 은하를 둘러싼 인형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검은 균열 밖에서 만났던 괴담 속 존재와 닮은 기운.

‘이 방 밖이야.’

무엇일까? 설마 이 저택 안에도 괴담 속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 무엇이 됐든 방금 전 피부를 스친 이 감각이 무엇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휘익!

은하는 날렵하게 땅을 찍고 날아올랐다. 인형들은 무지개다리처럼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머리 위를 나는 은하를 “와아……!” 하며 쳐다보았다.

방문 앞에 가뿐히 착지한 은하는 얼른 문고리를 잡았다.

“어디, 가……?”

“가, 지 마아…… 놀, 자, 나아랑, 노, 자…….”

인형들이 느릿느릿 은하를 쫓아왔다. 그러나 워낙 다리가 짧은 데다 속도까지 느려 금방 따라오지는 못했다.

그들이 코앞까지 다가오기도 전에 은하는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키가 작은 인형들은 문고리를 돌리지 못할 테니까.

콩, 콩, 콩…….

예상대로 인형들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릴 뿐 직접 그것을 열고 나오지는 못했다.

방에 가둔 인형들을 뒤로한 은하는 곧장 걸음을 옮겨 저택 내부, 정확하게는 피부에 남은 감각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발견한 또 하나의 방.

‘여기다.’

은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방금 전 그 인형의 방처럼 이곳도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아까 그리했듯이 흑염으로 주변을 밝힌 은하는, 머지않아 또 하나의 인형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은하를 쫓아오던 작은 인형들과는 달리 눈앞의 인형은 마네킹처럼 크기가 컸는데, 얼핏 보아도 은하와 눈높이가 비슷한 정도였다.

크기 때문인지 어깨 위의 흑염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손바닥을 펼쳐 또 하나의 흑염구를 생성해 내고, 그것을 횃불 삼아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건…….’

인형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은하의 동공이확장되었다.

그곳에는 흑염의 프린세스와 꼭 닮은, 아니 완전히 똑같은 인형이 세워져 있었다.

그 인형은 마치 선 채로 잠이 들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조금 전 다른 방에서 보았던 작은 인형들도 물론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이건 격이 달랐다.

모발은 진짜 인간의 것처럼 검고 윤기가 돌았으며 촘촘한 속눈썹이나 얼굴에 난 솜털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게다가 인형으로부터 희미하게 퍼지는 특유의 냄새. 괴담 속 존재와 조우했을 때 느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인형이 아닌 건가?’

은하가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그것은 움직임이 없었다.

은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보았다.

‘전혀 반응이 없어.’

진짜 인형인가?

오랫동안 그것을 살피던 은하는 그것의 팔목 부근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다.

‘……문자?’

그곳에는 알 수 없는 문자나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가만 보니 목이나 쇄골 등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 곳곳에는 초크 자국으로 추정되는 붉은 흔적이 보였고, 드레스의 어깨와 허리 부근은 핀과 집게 따위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미완성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눈앞의 이 인형이 괴담 속 존재라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은하의 움직임이 멎었다.

돌처럼 굳어 버린 은하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아무렇게나 퍼져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약 2년 전 동두천에서 별자리 모양의 타투를 가진 사람을 보았다는 그루의 친구.

최근 들어 그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검은 균열과, 그에 상응하듯 동두천 근처에서만 유독 자주 목격되는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이 인형.

어쩌면 지금까지 나타났던 괴담 속 존재는─.

“왔구나.”

“……?!”

돌연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은하는 홱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부터 멀어졌다.

“기다리고 있었어, 루시.”

……루시?

상대를 경계하듯 은하의 어깨 위로 반사적으로 화르륵 피어오르는 흑염. 그러나 그것은 곧, 목소리의 주인공을 시야에 담자마자 주인의 심리를 반영해 성냥불처럼 다시 작아져 버렸다.

“너는─.”

은하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겹겹이 겹쳐진 반투명한 치마단, 허리춤의 검은 리본, 가슴 부근의 흑장미 코사지, 세밀하고 촘촘한 레이스. 비록 엉성하게 마무리되어 있긴 했지만 분명 은하의 ‘칠흑 비단 드레스’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선 그녀도 ‘괴담 속 존재’ 중 하나일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은하가 아는 ‘그것들’보다 이목구비가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중학생,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어린 정도.

무엇보다 그녀에게서는 은하의 등 뒤에 서 있는 인형과도, 그동안 조우했던 괴담 속 존재와도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굳이 표현하자면 네뷸러에서 보았던 아스트와 예가임과 비슷한, 숨통을 억누르는 듯한 강한 기운이었다.

은하는 소리 없이 양산을 꾹 눌러 쥐었다.

‘조디악?’

은하의 이마에 희미한 식은땀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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