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1)화
(22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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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전설의 영웅 루루
2023.03.09.
약 2년 전.
“그루야, 나 무기 좀 만들어 주라.”
누군가 그루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밝은 금발에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화려한 미인이었던 반면, 당시의 그루는 흑갈색 머리카락에 뿔테 안경을 쓴, 지금에 비해서는 상당히 차분하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무겁다, 임세온. 내려와라.”
그루는 작업대 위로 탕탕 망치를 내려치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세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루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으응, 왜에. 오랜만에 봤는데 친구가 반갑지도 않아?”
“네가 지금 오랜만에 봐서 이러냐. 무기 만들어 달라고 지금 이 지랄을 떠는 거잖아.”
“뭐? 지랄?”
세온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말투는 여전하네, 표그루. 난 네 그런 점이 좋더라.”
“시끄럽고 빨리 내려오기나 해. 방해되니까.”
그루는 세온을 향해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세온은 결국 “치.” 하고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작업실 구석에 배치된 소파에 턱을 괴고 앉았다.
임세온. 그녀는 그루와 초등학교 시절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소꿉친구로, 최근 ‘창천’ 길드에 들어간 B급 헌터이기도 했다.
일반 각성자들과 달리 서른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각성한 세온은 전형적인 육체강화계열 헌터였는데, 특히 다리를 강화해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특기였다.
단말기를 쓰지 못하는 유사시에는 게이트 내부에서 헌터와 헌터 간의 연락망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어서, 최근 길드 내에서도 꽤 위상이 높다고.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으스대던 세온이었는데.
“그러면 뭐 해. 결국 영웅이 되는 건 선두에서 싸우는 헌터들인데. 빠르기만 해서는 영웅이 될 수 없잖아.”
그루의 작업이 끝난 뒤, 세온은 소파에서 뒹굴며 담뱃불을 붙였다. 후욱,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치솟자 그루가 인상을 썼다.
“야, 임세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뭐 어때, 방도 아니고 작업실인데. 어차피 기름 냄새랑 아궁이 연기가 가득하잖아.”
세온은 늘 그렇듯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루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 마이 히어로~ 세상을 구하고 적과 맞서 싸우는 엔젤! 어둠에 맞서 싸우는 사랑과 용기의 전사!”
“뭐냐, 그건.”
“헐, 뭐냐니. ‘전설의 영웅 루루’ 오프닝 곡이잖아.”
“모르겠는데.”
“장난하지 마. 너 아홉 살 때 마지막 편 보고 펑펑 울었던 거 내가 똑똑히 봤는데 무슨. 야, 표그루, 너 진짜 기억 안 나? 그때부터 우리 장래 희망은 전설의 영웅이었잖아.”
세온은 ‘전설의 영웅 루루’ 오프닝 곡을 흥얼거리며 과자 봉지를 뜯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맞은편 소파에서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루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래?”
“뭐가?”
“아직도 네 장래 희망, 지금도 여전히 그거냐고.”
“당연하지!”
세온은 말해 무얼 하냐는 듯 퍼뜩 대답했다.
“내가 서른이 넘어서 각성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 난 헌터가 돼서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약자들을 구해 주는 영웅이 될 운명이었던 거야. 어벤져스…… 아니, 루루처럼!”
이얍! 이얍! 세온은 담배를 입에 문 채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 마라. 담뱃재 떨어진다.”
그루가 휘휘 손을 휘젓자 세온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얌전히 주먹을 내렸다.
이후 세온은 몇 번이고 그루를 찾아 와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루가 만든 무기만 있으면 자신도 최전선에 설 수 있다며, 올해 생일 선물로 꼭 무기를 선물해 달라고 말이다.
그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결국에는 세온에게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세온의 생일 날.
“옜다, 받아라.”
툭.
그루는 작업실에 놀러 온 세온에게 기다란 보자기를 휙 던졌다.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은 세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네가 그렇게 노래하던 네 선물이지.”
“뭐? 표그루 설마 너…….”
세온은 그 자리에서 곧장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하얀 보자기에 감싸인 붉은 검이 영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와……!”
“어때? 맘에 드냐?”
“표그루, 진짜 X나 사랑해!”
“진짜 X나 사랑하는 건 뭐야, 또.”
그루는 피식 웃었다.
“그거 내 역작이다. 다룰 때 조심히 다뤄야 해.”
“응!”
“용의 피가 들어가 있으니 파괴력은 대단할 거야. 그만큼 세심한 제어가 필요하다는 거, 알지?”
“응!”
“……야, 너 지금 제대로 안 듣고 있지?”
“응!”
세온은 마치 유리로 된 인형을 다루듯 붉은 검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고마워, 역시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이게 있으면 나도 루루처럼 영웅이 될 수 있겠다.”
“나이가 몇인데 영웅은 얼어 죽을.”
그루가 코웃음을 치자 붉은 검에 쪽쪽 입술을 박아 대던 세온이 찌릿 눈을 흘겼다.
“야, 뭔 소리야. 나이는 상관없거든?”
“돈이나 넉넉하게 벌면 그만이지 뭐 하러 영웅 같은 게 되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왜.”
“멋있잖아. 내 꿈이란 말이야.”
“꿈?”
그루는 심드렁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래, 꿈.”
그런 그녀의 반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세온은 품속의 붉은 검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약자들을 지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그리고 탓! 그루 앞에 멋들어지게 검을 뻗고는 씨익 입매를 찢으며 웃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작업실 커튼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며 따스한 봄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세온이 쥔 붉은 검이 햇살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때, 겁나 멋있지? 좀 영웅 같았냐?”
“어, 개미 콧구멍 정도는.”
“지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 * *
‘바보 같은 녀석…….’
그루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캉, 카캉, 캉!
손 모양을 한 하급 몬스터는 주변에 부서진 돌멩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마구잡이로 던져 대고 있었다. 겁이 많은 개체인 데다 자신의 레벨이 낮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만일, 상대가 전투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제작 헌터라는 것을 놈이 알게 된다면? 분명 그때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해 올 테다. 그루는 그때까지 최대한 버틸 생각이었다.
다른 헌터들이 도착할 때까지.
제휘가 산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갈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참 신기하게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그루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치거나 뒤에서 벌벌 떨고만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를 살리고 죽는 거라면, 그것이 비록 개죽음일지언정 그거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임세온, 그 녀석도 그랬을까.’
죽음의 문턱에 선 그때서야 비로소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루 씨! 괜찮아요? 그루 씨!”
“……!”
방패 뒤에 몸을 동그랗게 말아 숨기고 있던 그루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뭐야, 당신! 미쳤어? 아직 안 가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루 씨야말로 미쳤어요?! 거기 그러고 있다가는 죽는다고요!”
“뭐, 뭐라…….”
그루가 놀란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제휘가 이렇게까지 큰 소리를 치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본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루는 방패 너머로 슬쩍 몬스터의 기척을 확인했다.
“드레스는 고쳐 줬잖아. 양산도 확실히 고쳤어. 그거 들고 얼른 도망가. 나도 오래는 못 버틴…… 으앗?!”
그루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시야가 기우뚱 흔들리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제휘가 그루를 들쳐 업고 뛰고 있었다.
저 멀리,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드레스와 양산이 보였다. 제휘는 그것들을 거기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짐을 모두 챙긴 상태로는 도저히 그루를 안고 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짐은? 드레스랑 양산은? 잠시, 잠시만 멈춰 봐! 저거, 엄청 중요한 물건 아니었어?!”
“맞아요! 하지만 저 물건은 다시 가지러 오면 되잖아요! 지금은 그루 씨가 먼저니까!”
“가지러 온다고? 형씨, 게이트 안에 휩쓸려 버리면 찾는 게 쉬운 줄 알아? 이거 놔 봐! 놔 보라고! 귓구멍 처막혔어?! 빨리 저거 챙기고 먼저 도망치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퍽! 퍽!
그루가 제휘의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제휘는 이를 악물고 버티더니 돌연 빽 하고 소리쳤다.
“싫어요!”
“뭐…….”
어찌나 목소리가 컸던지, 제휘의 어깨에 걸쳐진 채 아등바등하던 그루가 멈칫할 정도였다.
“저 아이템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이 사는 게 먼저잖습니까!”
제휘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분명 차 헌터님이었더라도 이렇게 판단하셨을 테니까요─!”
그루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한편 제휘는 굳어 버린 그루는 뒷전이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다. 하지만.
쌔애액액!
손 형태를 한 몬스터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아무리 하급 몬스터라고 한들 일반인을…… 그것도 성인 여성을 들쳐 멘 비각성자를 따라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터.
“악! 미친 괴물이 따라옵니다!”
“도망치는 걸 보고 만만하다고 판단한 거지, 더러운 몬스터 X끼가…….”
“뭐, 뭐라고요?”
험악한 욕설에 제휘가 귀를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쿠당탕!
제휘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보기 좋게 넘어져 버렸다. 그가 들쳐 메고 있던 그루가 함께 굴러 버린 것은 덤이었다.
무릎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찌이잉, 하고 통증이 번져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고 뇌가 흔들거렸다.
어질어질한 시야를 가까스로 붙잡은 그루는 뒤를 확인했다. 점점 더 몬스터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것은 분명 기분 탓이 아닐 테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루는 제휘의 양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곧 따라잡힐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는 신경 끄고 먼저 도망쳐.”
“혼자는 못 갑니다. 어떻게 그럽니까.”
제휘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그루는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 진짜 X나 답답한 거 알아?”
“X나 답답해도 못 갑니다.”
“난 각성자고, 당신은 비각성자잖아. 여기는 효율을 따져서…….”
“각성자면 뭐 합니까? 몬스터 한번 제대로 상대해 본 적 없는 제작 헌터잖습니까.”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제작 헌터고 나발이고 각성도 하지 못한 형씨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
그러자 제휘가 똑바로 시선을 들어 그루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루 씨, 떨고 있었잖아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봤는데, 저더러 어떻게 그루 씨를 두고 혼자 도망치란 소립니까?”
“뭐……?”
“그루 씨는 제가 그 정도로 쓰레기로 보입니까?”
거기까지 말한 제휘는 빙글 몸을 돌려 그루를 향해 업히라는 듯 등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 아직 달릴 수 있어요.”
그루는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제휘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휘는 그루가 업힐 때까지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양 꿋꿋하게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이 남자, 진짜 바보 아니야?’
보통 이렇게까지 욕지거리를 하며 화를 내면 질려서라도 먼저 도망가는 게 정상일 테다. 팔 한쪽을 내놔라는 둥 으름장을 놓았던 데다 담배 심부름에 변기 청소까지 시킨 자식이 도대체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아득바득 우기면서까지 살려 내겠다 고집인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제휘는 “어서요, 그루 씨!” 하며 재촉했다.
그루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몬스터.
그리고 그 너머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양산과 드레스.
‘부탁드립니다. 드레스와 양산을 고쳐 주세요. 제가 모시고 있는 헌터님에게는 이 드레스와 양산이 꼭 필요합니다.’
‘적어도 저와 제 동생은 헌터님에게, 헌터님의 양산 덕분에 살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헌터님께서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고 계시죠.’
‘헌터님은 제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영웅이세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루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면의 제휘가 “네?” 하고 되묻는 순간,
쌔애애액!
몬스터의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루 씨!”
제휘는 반사적으로 그루를 감싸듯 그녀를 향해 필을 뻗었고, 그루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그리고 찾아온 정적.
이상하리만치 주위가 고요했으며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제휘는 제휘는 그루를 감싸 안은 채 조심조심 눈을 떴다.
바스락─
근처에서 낙엽을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가느다랗고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당신은…….”
제휘의 품속에서 그루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아래로 스르륵 내렸다.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낯이 익었다.
“허, 헌터니임!”
제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울부짖듯 그녀를 불렀다.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힐끔 이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다시 이끌리듯 정면에 고정된다.
“아직 더 남았습니다.”
휘익, 탁!
은하가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바닥을 털어 냈다. 손에 묻어 있던 진득진득한 보랏빛 액체가 물감처럼 공중에 휘날린다.
제휘는 그제야 자신들의 근처에 축 처져 있는 몬스터의 사체를 발견했다. 매, 맨손으로 죽이신 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스슥, 스스슥─
몬스터가 그들을 포위하듯 점점 몰려오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대충 보아도 다섯 마리는 되어 보였다.
모두 다 낙수 몬스터, 즉 하급 몬스터에 불과했지만 그루와 제휘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숫자.
“가세요, 매니저님.”
은하는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제휘는 대답 대신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리가 풀려 버린 그루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루 씨, 내 손 잡아요.”
“하지만…….”
넋을 놓고 있던 그루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들을 감싸고 선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찰나, 그루의 샛노란 눈동자에 눈앞의 모든 광경이 느릿하게 담긴다.
바닥에 쓰러진 몬스터의 사체.
분개한 울음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들.
철벽처럼 그들 앞을 막아선 등.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코끝에 닿는 피 냄새.
‘약자들을 지키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지.’
문득, 세온의 목소리가 선명히 귓가에 재생된다.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세온의 말 위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겹쳐지는 목소리.
“아…….”
그루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고개만 돌려 이곳을 힐끔 쳐다본 은하가 제휘와 그녀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