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0)화
(219/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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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위기 속의 용기
2023.03.08.
“실례합니다, 손님. 골든 카드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합니다.”
경비원처럼 보이는 두 남성 중 하나가 은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 골든 카드는 지금 매니저가 들고 있어서요.”
“매니저…… 말씀이십니까?”
“네. 입장이 불가능하다면 제 매니저에게 내려오라고 말을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은하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두 남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은─.”
이후, 은하는 별다른 수속이나 검증 없이 망치 길드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유명인이 된 덕을 여기서 이렇게 또 보게 되는구나 싶었다.
건물 최상층 길드장실에 있던 표의혁은 흑염의 프린세스의 방문 소식을 듣고 아래까지 내려왔다.
“백랑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갔던 것 아니었나?”
“볼일이 빨리 끝나서.”
“그렇군. 여기서 이야기 나누기는 그렇고, 일단 따라와. 길드장실으로 안내하지.”
의혁은 은하를 데리고 길드장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손님이든 길드원이든 마주치는 사람마다 은하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그 시선 속에서는 선망과 동경 외에도 조금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그들은 슬금슬금 은하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듯이 보였다.
“…….”
“…….”
방금도 그랬다. 조금 전 마주친 망치 길드원은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피해 버렸다. 마치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의혁은 길드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따듯한 커피를 내왔다.
“이렇게 빨리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야.”
헤드 헌터 녀석들 말이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잔을 은하 앞에 가져다 둔 의혁은 그리 덧붙였다.
“미국이나 러시아 쪽 탑 공략대에 몇 번 납품 의뢰를 받은 적이 있거든. 그 양반들이랑은 구면이지.”
잔에 설탕을 거의 들이붓다시피 한 그는 ‘그 양반들’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녀석들은 돈과 명예가 무엇보다 우선이거든. 그쪽과는 달리 말이야.”
의혁의 말에 은하는 커피 잔을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마치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 말투네.”
“뭐, 백랑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서비스업에 오래 있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야 생기기 마련이라.”
의혁이 피식 웃었다.
“헌터계에서 일하는 매니저라는 작자들은 보통, 본인이 담당하는 헌터를 위해 팔 한쪽 내놓을 만큼 헌신적이지도 용감하지도 않아. 그쪽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 매니저 양반이 판단한 거겠지.”
“그게 무슨 소리지?”
팔 한쪽을 내놓다니?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던 은하가 멈칫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른 것보다도 먼저,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겠지.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의 매니저는 며칠 전 골든 카드를 가지고 이곳을 방문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드레스와 양산은 고치지 못했을 거야. 아주 높은 확률로 말이지.”
“……수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과하는 건 아닐 테고.”
아직 돈을 지불하기도 전이었으니 망치에서 수리 의뢰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표면상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정도 일로 굳이 길드장실까지 은하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은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매니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은하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채 의혁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해.”
무기를 꺼낸 것도 불을 피워 낸 것도 아니었으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무섭게 돌변했다.
마치 목 언저리에 칼이 들이밀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전투 시에나 느껴보았던 감각에 의혁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잠깐…… 우선 진정 좀 하지. 당신 매니저는 멀쩡하니까. 팔도 잘리지 않았고. 정말이야.”
의혁이 몇 번이고 강조한 끝에서야 은하는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눈빛에는 불신이 서려 있었다.
‘진짜 팔을 자르기라도 했으면 여기서 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르겠군.’
의혁은 웃지 못할 상상을 하며 자세를 바꿔 앉았다.
“팔은 잘리지 않았지만…… 크흠, 내 사촌 동생이 당신 매니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는 모양이더군.”
“짓궂은 장난?”
“내 사촌 동생 표그루는 한때 망치 길드 최고의 제작 헌터로 평판이 자자했던 녀석인데, 몇 년 전부터 반쯤 폐인이 됐거든. 드레스와 양산을 빌미로 당신 매니저를 좋을 대로 굴리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담배 심부름부터 시작해 화장실 청소, 작업실 정리 등등, 의혁은 그루가 어떤 식으로 제휘를 부려 먹었는지까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한편, 그제야 은하는 망치 길드원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 선에서 막아 보려고 했는데…… 표그루 녀석은 물론이고, 당신 매니저도 고집이 대단하던데. 그러지 말라고 해도 이게 본인의 일이라며 끝까지 들은 척도 않더군.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나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그만큼이나 맡겨 달라 큰소리를 뻥뻥 쳐 두었으니, 제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드레스와 양산을 고칠 작정이었으리라.
사실 제휘가 그런 식으로 단단히 마음먹고 버틴다면 은하조차 이기기 힘들었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의혁이 제휘를 막을 수 없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헌터님, 제가 맥주는 하루에 두 캔 이상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골고루 드셔야 합니다. 매운 음식만 먹으면 탈 난다고요. 안 되겠습니다. 오늘 세 끼는 미음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얼굴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귓가에 제휘의 단호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커피 잔을 휘젓던 은하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서렸다.
‘이제야 조금 표정이 풀어졌군.’
맞은편에서 물끄러미 은하를 응시하던 의혁의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미소가 서린다.
“……당신, 좋은 매니저를 두었더군.”
은하가 시선을 들어 의혁을 바라보았다.
“행운이었지.”
작게 답한 은하는 티스푼을 내려 두고 표정을 달리했다.
“드레스와 양산을 고치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보다 지금 매니저님은 어디 있지? 내가 직접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마 본부에는 없을 거다.”
의혁의 말에 은하가 묘한 얼굴을 했다. 분명 오늘 아침, 망치 길드로 출장 갔다는 이야기를 실버문 매니지먼트를 통해 전해 들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그날’이거든.”
커피를 호로록 들이켠 의혁이 찻잔 받침대에 잔을 올려 두며 답했다.
“지금쯤 아마 산에 있을 거다.”
“산이라니─.”
그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려왔다. 은하와 의혁의 주머니 속에서 각각 단말기가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머니를 뒤적여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 떠오른 것은 주변 게이트 출현 경보. 위치는…….
“……!”
돌연 의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하가 힐끗 시선을 들었다. 의혁은 창밖 저 어딘가를 바라보며 심각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루……!”
* * *
쿠구구─
“그루 씨, 피, 피하세요!”
파앗!
제휘가 그루를 강하게 밀쳐 냈다. 초록빛 스파크에서 밀려 나온 강한 바람에 나무가 뚝 하고 부러지며, 방금 전까지 그루가 서 있던 곳을 향해 쓰러졌다.
넋이 나간 채로 멍하니 서 있던 그루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루를 감싸듯 선 제휘는 힐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루 씨가 이상해.’
게이트가 출현한 것은 혼란스러울 법한 일이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지금쯤 주변 헌터들에게 단말기를 통해 알림이 갔을 테다. 조금만 기다리면 헌터든 협회 요원이든 이쪽으로 올 테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게이트의 색깔로 봤을 때 이건 언노운 게이트도 아닌 일반 게이트, 그것도 중하위 랭크에 속하는 B급 게이트였다. 더군다나 아직 전조 현상이 있을 뿐,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기도 전이었다.
침착함만 유지한다면 헌터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루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풀썩 주저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제작 헌터라고 하더라도 각성자는 각성자.
그러나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오히려 비각성자인 제휘가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이트 전조 현상에 동요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정도로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루 씨, 괜찮아요? 뛸 수 있겠어요?”
제휘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거스르며 그루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루는 저쪽에 보이는 녹색 스파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 댈 뿐 제휘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루 씨, 괜찮아요. 여기서 벗어나서 몸을 숨기고 있다 보면 헌터들이 올 겁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제휘는 필사적으로 그루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못 걷겠어요? 그럼 저한테 업히세요. 제가 아래까지 그루 씨를 데리고…… 윽!”
점차 거세지는 바람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돌이 위험하게 날아들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제휘의 얼굴에 선명한 붉은 줄이 긁혔다.
제휘는 짧게 신음을 흘릴 뿐, 손등으로 가볍게 피를 닦아 내고 그루 앞에 등을 가져갔다.
“얼른요, 그루 씨. 되도록 이곳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휘이이, 탁! 타닥!
주변의 자갈과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휘날리며 제휘의 피부에 생채기를 냈다.
지금 보니 그의 얼굴은 뺨, 이마, 눈썹 할 것 없이 긁힌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넋을 놓아 버린 그루를 감싸느라 입은 상처였다.
심지어 이제는 그루가 마셨던 빈 술병이 깨져 유리 파편마저 날아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 매니저 양반은 저를 감싸겠답시고 사정없이 날아드는 물체들을 겉옷과 손등 따위로 쳐 내고 있었다.
비각성자 주제에.
나보다도 약한 주제에.
‘바보같이.’
그루가 으득, 어금니를 갈았다. 역시 이 남자는 손을 쓸 수도 없는 호구, 멍청이다.
──임세온, 그 애처럼.
“그루 씨, 피해야 해요!”
“……해.”
“네? 뭐라고요?”
꾸욱.
흙바닥 위에 올라가 있던 손으로 세게 주먹을 움켜쥔 그루가 버럭 소리쳤다.
“젠장, 당신이나 피하라고!”
슈우우욱!
그루의 앞에 붉은 빛을 내는 방패가 나타났다. ‘적룡의 가호’. 유물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영웅급 이상은 되는, 그루가 직접 제작한 아이템이었다.
탕, 타당, 탕!
바람에 날아든 갖가지 물체들이 방패 표면 위로 튕겨져 나갔다.
“얼른 가.”
“네……?”
“이미 전조는 끝났어. 이제 게이트가 열릴 거야. 내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
그루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리 말했다. 제휘의 시선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정면으로 향한다.
그루의 말대로 전조 증상을 마친 게이트는 점차 소용돌이의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게이트가 열리면서 하급 몬스터가 게이트 외부로 떠밀리듯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낙수(落水) 몬스터라고 부르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이곳에 선 두 사람은 일반인 하나에 제작 헌터 하나. 만일 여기서 낙수 몬스터가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등급이 낮다 하더라도 위협적일 것이 분명했다.
“하, 하지만……!”
“젠장, 뭐 하고 있어! 안 가?!”
“그루 씨는요? 같이 가요, 그루 씨!”
“헌터는커녕 각성도 못 한 일반인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해? 이래 봬도 난 각성자야. 당신보다 백배는 나으니까 신경 끄고 빨리 뛰라고, 이 멍청아!”
머, 멍청……. 제휘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험한 말을 뱉으며 인상을 쓰고 있는 그루였지만, 방패를 쥔 그녀의 손이 미친 듯이 벌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려운 것이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꾸륵, 꾸르륵─
돌연 기괴한 울음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덮쳤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돌처럼 몸을 굳혔다.
‘낙수 몬스터.’
거대한 인간의 손 형태를 한 몬스터. 손바닥 중앙에는 푸른 눈알이 박혀 있었다. 염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손바닥 중앙에 박힌 눈알이 서서히, 그러나 정확하게 두 사람을 향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휘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루는 빠르게 몬스터와 제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여기는 내가…… 내가…….”
“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후들거리는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준 채, 그루는 더욱더 세게 방패를 쥐었다.
“X발, 여기는 내가 맡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