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8)화 (218/306)


#218. 아르헨티나 회담 (3)
2023.03.06.


힐끔.

뮤턴트의 시선이 제 오른손으로 향했다. 총구 부근만 말끔하게 부서진 권총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표정이 얼핏 굳었다.

‘우연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지만 권총을 쥐고 있는 뮤턴트의 손을 피해서 총구만을 정확하게 겨누었다니, 사격 관련 고유 능력을 가졌거나 비슷한 스킬을 지니지 않은 이상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더구나 그녀가 총구를 겨눈 순간, 뮤턴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으니 더욱 그랬다.

‘우연이 아니라면, 노린 걸까?’

그가 듣기로, 흑염의 프린세스는 한국의 1세대 헌터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아직 수류탄, 장총 등의 화기를 통해 몬스터를 잡는 일이 잦았으니 어쩌면 총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움직이는 대상을 두고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조준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뮤턴트가 쥐고 있는 총구, 그 정도로 작은 과녁을 정확하게 겨누었다는 말은 즉, 뮤턴트의 손가락 관절이나 힘줄을 단번에 노리는 일도 가능했다는 소리였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꿀꺽 움직였다.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제 손아귀에서 망가진 권총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30년도 전에 활동했다는 1세대 헌터가 언노운 게이트에서 두 번씩이나 살아남아 귀환했다.

아니, 심지어는 귀환하기도 전에 헤드 헌터 1위의 자리를 꿰차기까지 했다. 뮤턴트는 흑염의 프린세스가 어떤 사람인지 늘 궁금했다.

방금 그의 행동은 변덕이 조금 섞여 있기는 했지만, 명확한 의도가 있었다.

오늘은 헤드 헌터 1위의 첫 회담 참여 날이다. 자신이 1위라는 생각에 들떠 있을 그녀에게 ‘우리는 네 밑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각인시키는 것. 그것이 뮤턴트의 숨겨진 의도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예상에서 많이 벗어난 결과였다.

그녀가 이런 곳에서 진짜 총을 쏠 줄도 몰랐고, 만일 쏜다고 하더라도 자신만큼 순식간에 새들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 뮤턴트를 제외한 나머지 헤드 헌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우조차 그녀가 뮤턴트의 권총을 한 방에 부숴 버릴 줄은 몰랐는지, 놀란 얼굴을 한 채 굳어 있었다.

뮤턴트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짓을…….”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은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나는 심문이나 증명 따위를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거든. 나를 조디악이라 생각하든 몬스터라 생각하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냐.”

은하는 뮤턴트와 그 너머로 보이는 헤드 헌터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당신들의 생각도 잘 알겠어. 다만 나는 당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 인류의 발전? 헌터의 가치? 돈? 그딴 것도 관심 없어. 다만, 여기서 확실히 해 두지.”

한 명씩 차례로 훑어 가던 은하의 까만 시선이 다시금 뮤턴트에게 똑바로 닿았다.

“당신들이 하지 않겠다면.”

휘리릭!

은하는 쥐고 있던 권총을 땅에 내려 두고는 발로 걷어차서 뮤턴트의 발밑까지 밀어 보냈다. 조금 전 그가 그리했듯 말이다.

“내가 탑을 닫겠다.”

“……당신이?”

헤드 헌터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래.”

은하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나는 방금 판단했어. 당신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탑을 닫을 만한 명분도 의지도 없다는 걸. 아닌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현대 헌터들의 대부분이 어떤 방식과 생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지, 언노운 게이트를 나온 이후 직접 겪으며 느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직업’. 돈을 벌고 먹고 사는 밥줄일 뿐, 거기에 거추장스럽고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

이전과는 시대가 달랐다. 각성자는 더는 징병되지 않고 선택의 자유가 존중된다.

그러니 은하 역시 그들에게 힘에 대한 책임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만.

“당신들이 가진 그 힘을 사람을 지키는 데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탑에 관련해서 알고 있는 정보를 내게 공유라도 해 줘. 다른 건 요구하지 않겠어. 조력도 필요 없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 갔다. 그러나 그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밥그릇 싸움을 염려하고 있는 걸까? 갑작스러운 은하의 행동에 당황한 것일지도, 어쩌면 그저 망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답은 들은 셈이었다. 은하는 이들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더는 볼일이 없다. 휙 뒤돌아선 은하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하는 자리를 떠났다.

“선배!”

시우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그곳을 벗어나고, 남은 것은 나머지 10인의 헤드 헌터뿐이었다.

“…….”

“…….”

흑염의 프린세스와 백랑이 자리를 뜬 이후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 * *

그루의 작업실에서 빠져나온 제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루는 따라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얘기 들었잖아. 나 망치 안 들어. 저기에 먼지가 앉아 있든 그렇지 않든 난 모르는 일이라고.’

제휘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스쳤다. 알고 보니 그루는 거짓말이 상당히 서툰 사람이었다. 적어도 제휘가 보기에는 그랬다.

분명 그루는 아무도 없을 때마다 망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만 먼지가 앉아 있지 않은 점도 의심스러웠지만, 작업실을 방문할 때마다 망치가 놓여 있는 위치가 달라지는 점도 그랬다.

더 이상 놀리다가는 술병을 깨부술 것 같아서 자리를 벗어나기는 했는데, 왜 저렇게 정색을 하면서까지 속내를 숨기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차를 어디에 세워 뒀더라.’

곰돌이 젤리를 사러 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제휘는 주차 장소를 떠올렸다. 여기 지하 주차장은 길드원 전용이다 보니 주변에 적당히 주차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 모퉁이를 돌려던 찰나였다.

“표그루, 또 시작이더라. 들었어? 흑염의 프린세스 매니저 이야기.”

우뚝.

제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귀가 쫑긋 세워졌다.

모퉁이 너머로 보이는 비좁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댄 두 남자가 종이컵 커피를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 길드원인 것 같았다.

“어, 들었지. 이번에도 봉 하나 잡았다고 신난 모양이던데.”

“에휴, 걔는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생각이지. 더 이상 일할 생각이 없으면 아예 길드를 나가 버리지, 이게 웬 행패냐고. 길드
평판 떨어지게. 심지어 이번 손님은 그 흑염의 프린세스의 매니저라며? 잘못 보이면 어떡해.”

“마스터의 사촌 동생인데 어쩔 수 없지 뭐. 혈연이 좋다 좋아.”

“아니, 마스터도 그래.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고 해도 1년도 넘게 망나니짓을 해 대고 다니는데 언제까지 못 본 척하실 셈이지?”

커피를 홀짝인 남자는 무섭게 한숨을 쉬었다.

“친구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마스터랑 우리는 뭔 죄냐고.”

“내 말이. 그냥 알아서 길드 나가 줬으면 좋겠─.”

그때였다.

타다닷!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제휘가 돌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워낙에 비좁은 복도였다. 모퉁이 너머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제휘는 손에 종이컵을 쥐고 있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으왓!”

제휘와 부딪힌 남자는 몸을 크게 휘청였다. 다행히 뒤에 벽에 있어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기우뚱 흔들리며 커피가 앞치마에 흐드러지듯 튀었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제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서두르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남자는 눈앞의 그가 어제 길드를 방문한 소문의 손님, 흑염의 프린세스의 매니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 괜찮습니…….”

“그래요? 다행입니다.”

괜찮냐고 한 번은 더 물어볼 법도 한데 제휘는 싱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뭐야, 끝이야? 커피에 앞치마가 젖어 버린 남자는 멍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곰돌이 젤리를 사러 가야 해서.”

“네?”

두 길드원이 멍하니 되물었지만 제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곰돌이 젤리?”

“어, 곰돌이 젤리라고 하는 것 같던데.”

타다닷,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두 남자는 그 방향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편, 그들이 있던 복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그루의 작업실 근처 커다란 실내 화분이 살짝 흔들렸다.

“…….”

화분 뒤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던 그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낙 거리가 있었던 터라 두 길드원은 그루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굳은 얼굴의 그루는 그곳에 가만히 선 채 제휘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오랫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약 3시간 뒤.

제휘는 그루를 데리고 망치 길드 본부 근처에 위치한 산으로 향했다. 물론 제휘의 자가용으로 말이다.

중간부터는 차가 지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주차한 뒤 길을 걸었는데, 쓸데없이 챙겨 온 짐이 한 더미라 산을 오르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헉…… 허억……. 그루 씨…… 같이, 같이 가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제휘가 그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루는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들어? 참 쓸모없네.”

작업실에서는 까만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던 그녀가 웬일인지 말끔한 차림이었다. 검은색 정장에 푸석푸석하던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올려 묶고, 연하긴 하지만 화장도 했다.

이렇게 보니 평범한 회사를 다니는 제휘 또래의 여성처럼만 보였다.

옷차림과 화장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구나. 제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며 새삼 감탄을 했다.

“뭘 봐.”

그루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제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여기에 도대체 뭐가 든 거예요? 너무 무거운데. 설마 술을 박스째로 챙겨 온 겁니까?”

어깨에 메고 있는 커다란 보자기가 하나, 양손에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종이 가방이 각각 두 개씩. 제휘는 자신이 들고 있는 짐이 무엇인지도, 그리고 지금 산을 넘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가 보면 알아.”

그루는 단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산을 올랐다.

그녀의 말대로 산 중턱을 넘을 때쯤, 제휘는 겨우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목적지 앞에서 제휘는 얼떨떨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 잔디였다. 잔디 위로 동그랗게 솟아 있는 흙. 그리고 차게 식은 비석에 누군가의 이름 석 자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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