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7)화 (217/306)


#217. 아르헨티나 회담 (2)
2023.03.05.


심안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그건 이곳에 모인 헤드 헌터 12인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저토록 단언한다면, 아마도 흑염의 프린세스는 조디악이 아닐 것이다. 심안의 발언에는 그 정도로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유엘의 두둔에도 헤드 헌터들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낯서네요, 심안. 우리 어린 왕자님께서는 그녀가 같은 한국인이라고 감싸 주는 건가요?”

판도라가 부채 너머로 미소를 숨기며 물었다.

유엘은 지금까지 헤드 헌터 회담에 다수 참여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헤드 헌터들 중 가장 말수가 적은 이를 꼽자면 바로 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엘이, 오늘 두 번씩이나 은하를 감쌌다. 판도라는 그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유엘은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은하는 힐끔 유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역시 은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백랑 역시 같은 나라 출신이지만 심안은 여태 어떤 식으로도 백랑을 변호한 적이 없어. 게다가 그는 최초의 봉쇄자야. 난 심안을 믿어. 그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칸의 말에 다른 몇몇의 헤드 헌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전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2031년에 게이트 사고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흑염의 프린세스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니키타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듣자 하니 한국에는 이전부터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련한 괴담도─.”

쾅.

누군가 니키타의 말을 끊고 나무 원탁을 손으로 내리쳤다.

“니키타, 그 이상은 그녀에게 실례입니다.”

그것은 은하도 시우도 아닌 발키리였다.

딱히 안면도 없는 은하를 감싸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발키리는 힐끗, 시우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모발 끝이 백색으로 물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일 지금 여기서 발키리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백랑은 순식간에 그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백랑이 흑염의 프린세스를 변호하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따라서 이것은 사전 방지 같은 행동이었다.

“왜? 그의 말에는 나도 동의하는데.”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불쑥 그곳에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뮤턴트였다.

“소식은 들었어. 제대로 된 공략대도 없이 소수로 탑에 진입했다던데, 과연 랭킹 1위다운 패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시스템창에 의하면, 정작 탑을 닫은 건 흑염의 프린세스가 아닌 백랑이더군. 그럼 당신은 거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백랑이 탑을 닫는 동안 말이야.”

“듣고 있을 가치가 없군.”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온 게 시간 낭비였어. 돌아가죠, 선배.”

그때였다.

휘이이잉─!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주먹 크기의 희끄무레한 구체가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원소의 집약체라고 하는 타이니 뉴크(Tiny Nuke).

작은 핵이라고도 알려진 엘리멘탈 마스터의 스킬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제자리에 멈춘 시우가 엘리멘탈 마스터를 향해 스르륵 시선을 돌렸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지?”

그의 눈매가 길게 찢어지는 순간,

“백랑, 당신의 행동은 오히려 의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입가에 조용히 찻잔을 가져간 엘리멘탈 마스터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지름길이 되겠죠.”

“간만에 말이 통하는군.”

뮤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은하 앞에 섰다.

“나는 니키타와 달라. 네가 사람의 탈을 쓴 다른 존재이든 무엇이든 전혀 관심 없거든. 흑염의 프린세스, 난 널 만나는 날을 고대해 왔어. 궁금했단 말이지. 헤드 헌터 1위는 무엇이 다를지, 얼마나 강하고 특별할지.”

그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헤드 헌터 1위라는 것을 여기서 증명해. 두 눈으로 확실히 확인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여기 이 녀석들도 조금은 의심을 거두겠지.”

은하는 새까만 눈을 들어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를 상대로 네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만 한다면, 난 너를 따르겠어. 탑의 자원이든 인류의 발전이든 그딴 건 난 애초부터 관심이 없거든.”

가벼운 말투. 그보다 가벼워 보이는 태도였다.

무표정을 일관하던 은하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증명이라 하면?”

은하가 입을 여는 순간, 뮤턴트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단순한 ‘내기’지.”

그가 움켜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단숨에 힘을 주어 투두둑 뜯어내자…….

슈욱!

그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작은 권총으로 변했다.

신체 일부를 무기로 바꾸는 능력. 그가 가진 돌연변이 스킬 중 하나였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표적이 크니까.”

뮤턴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권총으로 하늘을 겨누었다. 그리고.

탕! 탕! 탕!

고요하던 평원 위로 시끄러운 권총 소리가 연속으로 울렸다. 숲에 숨어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가고, 몇 번의 권총 소리가 더 이어진 결과.

툭, 투두둑…….

총에 맞은 새의 사체들이 소나기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일부는 저 멀리, 몇몇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주변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가 말했던 ‘표적’이란 바로 이 새들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즉 ‘내기’란 새를 죽이는 솜씨를 겨루자는 말이었다.

“…….”

은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아 새의 사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움찔움찔 날개를 떠는 새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여기저기서 피 냄새가 코끝으로 점차 진하게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너도 이름난 헌터라면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겠지. 걱정 마. 나도 총을 잘 다루는 편은 아니거든.”

페어플레이, 페어플레이. 뮤턴트는 방금 전 그리했듯, 또다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뜯어 또 하나의 권총을 만들었다. 그리고 발끝을 이용하여 그것을 은하의 발밑으로 휙 들이밀었다.

헌터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뛰어난 시각과 직감, 그리고 순발력과 섬세함까지 한 번에 확인할 만한 종목으로 사격만큼 좋은 게 또 없지. 표적이 고레벨 몬스터가 아닌 이상, 총에 관련된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하늘을 나는 새 정도는 맞출 수 있을 것이다.

“5초 안에 나보다 더 많은 새를 죽여 봐. 어렵지 않지? 고작 새 정도 죽이는 데에 자격이나 기술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그냥 놀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

“아, 총 쏘는 게 자신이 없어? 그렇다면 총이 아니라 네 능력을 써도 좋아. 불이었지, 아마?”

네 맘대로 해. 뮤턴트가 은하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발키리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군.’

뮤턴트는 때로 범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논리와 발상을 하고는 했다. 그는 이 중에 모인 그 어떤 헤드 헌터보다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었고, 모든 것을 단순히 놀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뮤턴트는 한때 F급 낙인이 찍혔던 그녀에게 일종의 동정심 혹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헤드 헌터들 중 유일한 B급 헌터였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흑염의 프린세스의 반응이 궁금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뮤턴트의 터무니 없는 발언에도 발키리를 포함한 다른 헤드 헌터들은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다들 내심 궁금한 것이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다.

“자, 어서.”

뮤턴트가 은하를 재촉했다.

은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저 멀리, 바닥에 추락한 채 죽어 버린 새들은 피범벅이 된 채 미동도 없었다.

‘때로는 필요한 희생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죠.’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빼앗겨 버린 새들.

‘인류의 발전과 헌터의 가치를 높이는 일. 그것이 우선입니다.’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

‘이전의 시대와는 다르니까요. 우리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하죠.’

죽음 앞에서도 미처 감지 못한 여러 쌍의 눈.

‘지금이 한몫 벌어 둘 기회인데 굳이 황금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은 솔직히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눈앞에 겹쳐지는, 30여 년 전의 악몽 같은 기억들.

피아노 더미에 깔려 있던 엄마의 시체.

허공을 날아가던 대학 합격증.

끌려가다시피 한 훈련장과 주변에서 들려오던 흐느끼는 소리.

눈앞에서 뜬 눈으로 목숨을 거두었던 수많은 동료들과,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속에 악착같이 버티며 서 있었던…… 그때의 나.

죽은 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은하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자격? 증명?”

울컥─

은하의 가슴속 무언가가 고요히, 그러나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은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권총을 쥐었다.

“그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르지만 하나는 알겠군. 너희와는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른 것 같다는 점 말이야.”

그러니까…….

은하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철컥. 익숙한 손놀림으로 총알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증명 따위를 할 생각도 없다.”

하늘이 아닌, 정면에 선 뮤턴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타아앙!

“……!”

시우를 포함한 그곳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은하는 뮤턴트를 향해 총을 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총이…….’

뮤턴트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자그마한 권총을 향해서.

* * *

망치 길드 본부 5층, 길드원 전용 화장실.

“어우, 이게 다 뭐야.”

제휘는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물걸레로 화장실 바닥을 박박 닦고 있었다.

제작 헌터들이 주로 드나드는 곳이다 보니, 바닥에는 오물뿐만 아니라 새까맣고 진득한 기름때까지 껴 있어서 손쉽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골든 카드까지 가져온 VIP 손님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그건 어제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 팔 한쪽이라도 내놓든가.’

‘……마취는 해 주십니까?’

‘뭐?’

그루는 배를 잡고 웃었다.

겁에 질린 주제에 말은 잘한다. 저렇게 새파란 얼굴을 하고 손을 벌벌 떨면서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그에게는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상사에게 빚이라도 졌나 싶었다. 혹은 드레스를 고치지 못했을 때 돌아올 후폭풍이, 팔을 자르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걸까?

하지만 남자의 결연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 남자에게 있어 흑염의 프린세스는 팔 한쪽 정도는 기꺼이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인물인가 보다.

재밌네. 한참을 웃어 젖힌 그루가 그리 중얼대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좋아, 당신 의뢰에 대해 생각해 볼게.’

‘……!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기뻐하지 마. 말했잖아. 생각해 본다고. 아직 확정된 게 아니란 소리야.’

‘그럼…….’

기대에 찬 제휘의 눈을 응시하던 그루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에 이른다.

‘설마 이런 잡일을 시킬 줄이야.’

제휘는 물걸레로 화장실 바닥을 닦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뿐인가. 오전에는 그루의 어깨를 안마하고 담배 심부름도 다녀왔다. 화장실 청소를 마친 후에는 그루의 작업실을 정리해야 했고, 저녁에는 그녀의 단골 술집에 들러 안주를 포장해 올 예정이었다.

‘저 애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내가 책임지고 다른 제작 헌터를 알아봐 줄 테니까.’

망치 길드의 길드 마스터 표의혁이 말했다.

듣자 하니 의혁과 그루는 사촌 간이라고 했다. 의혁은 그루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녀를 봐 왔는데, 그녀가 망치를 손에서 놓고 저렇듯 막무가내가 된 것은 1년 전부터였다고.

비록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의혁은 그루가 드레스와 양산을 고쳐 주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직접 보았다시피 말도 안 통해. 쓸데없이 부려 먹고는 나 몰라라 하고 모른 척할 게 뻔하지. 이전에도 이런 적이 많았거든.’
‘그렇…… 습니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망치 길드가 이렇게까지 커질 수 있었던 것도 저 녀석 덕분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과거 이야기야. 내 사촌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애는 틀렸어.’

의혁은 끝까지 돌아가라고 제휘를 회유했다. 그러나 제휘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의혁이 다른 제작 헌터를 수소문해 준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또 드레스와 양산을 고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더군다나 의혁은 그루의 태도나 언동에 대해 혀를 차면서도 그녀의 실력에 대해서는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즉 그루 씨라면 헌터님의 드레스와 양산을 고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면 그 밖의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리하여 제휘는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 그루가 시키는 일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었다.

“음, 갑자기 곰돌이 젤리가 먹고 싶은데.”

그루의 작업실을 정리하던 중,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술을 마시던 그녀가 돌연 젤리 타령을 시작했다.

“아, 그걸 먹으면 갑자기 일을 하고 싶어질 것 같기도 하고…….”

그루는 탈색을 여러 번 한 듯 인위적일 만큼 밝은색의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 냈다. 지저분한 소파에 비벼 댔더니 먼지가 앉아 있었다.

퀭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그루는 적당히 굴러다니던 케이블 타이를 주워 질끈 머리를 묶었다.

빗자루로 주위를 쓸고 있던 제휘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곰돌이 젤리요?”

“응, 편의점에 파는 그거.”

“알겠습니다.”

앞치마를 벗은 제휘는 작업실 입구 옷걸이에 걸어 둔 정장 재킷을 챙겼다.

“몇 개나 사 올까요?”

작업실을 나가기 직전 빙글 몸을 돌려 그루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그루가 어느새인가 상체를 일으킨 채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피로에 찌든 듯 탁한 눈빛은 제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또 팔을 자르라는 건 아니겠지. 혹시 편의점까지 옷 벗고 다녀오라는 심술을 부린다거나? 좋지 않은 예감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너 혹시 바보야?”

“예?”

제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루는 소파 팔걸이에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제휘는 목뒤를 긁적였다.

“음, 아마 바보는 아닐 겁니다. 아이큐 검사 때 문제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하핫.”

“바보가 아니면 머리라도 세게 박았어? 아니면 선천적으로 어디가 좀 모자라?”

이어지는 폭언에 제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아뇨.”

“그런데 왜?”

“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어제부터 지금까지 남의 길드에서 호구처럼 청소질이나 하고 앉아 있는데. 멍청한 게 아니라면 언제쯤 고쳐 줄 거냐고 한 번쯤 물어볼 만하지 않냐고.”

왜 저러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제휘가 느끼기에는 그루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으며, 기껏 묶어 둔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제휘는 눈을 깜빡거리며 답했다.

“생각해 보신다고 하셨잖아요.”

“……뭐?”

그루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그녀의 인상이 한층 더 매섭게 변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제휘는 어제만큼 그녀가 무섭지는 않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쭉 그녀를 근처에서 관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제휘는 자신이 이곳저곳을 청소하는 동안, 그녀가 아닌 척하면서도 제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스르륵 시선을 돌려 어둡고 퀴퀴한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어제오늘 작업실을 치우는데 곳곳에 아주 먼지가 뽀얗더라고요. 담배를 그렇게 피우시면서, 얼마나 환기를 안 했는지 창틀에도 먼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데요.”

“잔소리라도 할 셈이야?”

“아뇨, 딱히 잔소리는 아니고 그냥 그랬다고요. 그런데…….”

제휘의 시선이 한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작업대 아래 덩그러니 놓인 황금색 망치.

“저기 저 망치에는 먼지가 하나도 앉아 있지 않던데요?”

가시넝쿨 문양이 표면에 새겨져 있고 손잡이 부근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비각성자인 제휘가 보기에도 저것은 일반적인 망치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루의 고유 능력과 관련 있는 물건이 아닐까. 그리고 또…….

“저 망치, 소중한 물건인가 봐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루가 그렇지 않아도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더욱 살벌하게 좁혔다.

“얘기 들었잖아. 나 망치 안 들어. 저기에 먼지가 앉아 있든 그렇지 않든 난 모르는 일이라고.”

그다지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루는 마치 보이기 싫은 물건을 보인 사람처럼 필요 이상의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습니까.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제휘는 어쩐지 그런 그녀가 무섭다기보다는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저 망치를 들고 쫓아올지도 모른다.

작게 헛기침을 한 제휘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문고리를 잡았다.

“곰돌이 젤리는 넉넉히 사 오겠습니다.”

그리고 후다닥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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