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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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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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아르헨티나 회담 (1)
2023.03.04.
12인의 헤드 헌터 앞에 차례로 찻잔과 간단한 디저트가 준비되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언덕 주변에서는 풀을 뜯는 양 떼나 산새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숲이 가까운 탓인지 종종 뻐꾸기의 울음소리 비슷한 새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척 보기에는 그다지 대단할 게 없어 보이는데.’
모두가 아닌 척하면서 이 자리에 처음 나타난 흑염의 프린세스를 눈으로 뜯어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 12인의 헤드 헌터들은 최근 봉쇄된 2개의 탑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얻은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쪽은 지금 30층까지 클리어했다.”
러시아 쪽 탑 공략을 주로 맡고 있는 니키타와 하얀 마녀가 운을 뗐다.
“최상층은 아직인가?”
“기미도 안 보이더군. 히든 퀘스트로 추정되는 퀘스트도 발생하지 않았고.”
“다음 탐색 일정은 언제지?”
랭킹 10위의 몽골 출신 헌터 칸이 러시아 쪽 두 헤드 헌터에게 물었다.
“아마도 다음 달. 올해만 해도 벌써 3개의 탑이 닫혔잖아. 잠시 정도는 쉬어도 되겠지.”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요.”
헤드 헌터 2위 엘리멘탈 마스터도 동의했다.
“언젠가 지구의 탑을 모두 닫게 되겠지만 그건 지금이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가 물었다. 탑을 모두 닫는 것이 지금이 아니라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 따로 있다는 걸까?
“흑염의 프린세스, 히든 퀘스트 덕분에 탑에 처음 진입하자마자 최상층으로 가 버린 당신은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탑의 자원은 게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과는 격이 다릅니다.”
“그에 대해서는 들었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자원들이 얼마나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탑을 닫는 건,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자원을 다 캐내고 난 뒤에도 늦지 않다는 겁니다.”
엘리멘탈 마스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하였으나 어쩐지 은하를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랭킹만 1위일 뿐, 아직 다른 헤드 헌터들에 비해 탑 진입 경험이 역력히 부족했다. 이곳에 모인 헤드 헌터들 중 대부분은 그녀를 내심 인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헤드 헌터는 지구상의 최상위 강자들을 추려 놓은 자리가 아니었다. 소의 화신이자 중국 헌터계의 권위자 왕웨이라든가, 역사상 가장 많은 게이트를 닫은 것으로 유명한 파라오, 1세대 헌터이자 뒤에서는 GIA를 이끌고 있는 수장 마에스트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헌터들 중에서도 이곳에 끼지 못한 자가 많았다.
헤드 헌터 선별 기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시스템의 변덕으로 뮤턴트 같은 B급 헌터도 졸지에 헤드 헌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흑염의 프린세스가 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위상인지는 몰라도 전혀 위축되거나 주눅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지구에 게이트가 등장하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는 영웅처럼 여겨지던 각성자들이 지금에는 그저 엔터테이너나 다를 바 없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탑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다시 각성자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나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헤드 헌터의 몸값은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뛰었습니다. 그것이 그 증거예요.”
엘리멘탈 마스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하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들 말은 즉, 즐길 것을 다 즐기고 난 다음 탑을 닫겠다는 건가?”
은하의 새까만 눈이 날카롭게 그를 향했다.
“……그동안 사람들의 희생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희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탑이 나타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각하고는 있는 건가?”
“네. 압니다.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은 1세대 헌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각성자라고 해도 지구상의 모든 이를 구하는 건 이론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때로는 필요한 희생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죠.”
달그락…….
엘리멘탈 마스터는 티스푼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휘저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요. 우리는 헤드 헌터로 선정된 만큼, 무엇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의 손길에 따라 붉은 홍차에 빙글빙글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찻물 위를 떠다니던 꽃잎은 너무나도 쉽게 홍차 속으로 침몰했다.
“이전의 시대와는 다르니까요. 우리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하죠.”
판도라가 부채를 살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공주님도 황금만능이라고 들어 봤죠? 지금이 한몫 벌어 둘 기회인데 굳이 황금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은 솔직히 하고 싶지 않아서요. 미안하네요.”
판도라가 눈썹을 아래로 축 내렸지만 부채에 가려진 그녀의 입술은 빙그레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차피 우리로는 지구상의 모든 인원을 구할 수 없어요. 인류의 발전과 헌터의 가치를 높이는 일. 그것이 우선입니다.”
아무도 엘리멘탈 마스터의 말에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이곳에 앉은 대부분의 헤드 헌터가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실증이었다.
“인류의 발전, 이라고.”
그리고 돈…….
은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큰 웃음소리는 아니었으나 워낙에 조용했던 터라 모두의 시선이 오롯이 은하에게 향했다.
은하는 조소가 걸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부터 헌터의 일이 인류의 발전 따위가 되었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시스템이 선별한, 세계에서 12인뿐인 선택받은 랭커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여 하고 있는 이야기가 고작 이딴 것이었다니. 진즉에 알았더라면 굳이 시간을 내서 이런 지구 반대편 나라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탑이 나타난 지 3년이 흘렀어.”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 헤드 헌터 랭킹 6위 니키타가 입을 열었다.
러시아 출신의 그는 신체를 강화하는 고유 능력을 가진 헌터로, 구릿빛 피부에 번개를 맞은 듯 뾰족하게 솟은 머리카락이 특징적인 남자였다.
“그동안 조디악은 단 한 번도 탑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리 헤드 헌터와 각국의 헌터 협회는, 모종의 이유로 그들이 탑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지. 정해진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든가, 어떠한 제약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바깥으로 나와 초토화를 시키고도 남았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니키타가 은하를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즉,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탑의 존재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흑염의 프린세스.”
엘리멘탈 마스터의 말대로 탑은 인류에게 오히려 득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듯했다.
게이트가 처음 등장하고 30여 년이 흐르며,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게이트를 그저 자연 현상 중 하나처럼 여기게 되었다. 누구도 게이트를 보며 인류의 종말을 예상하지 않았다.
당장 휴대 전화를 통해 게이트 출현 경보가 울린다 하더라도 지침에 따라 대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일부에서는 안전 불감증이라고 일침을 가했지만, 어쩌면 그저 시대가 바뀌었듯 인식 또한 변화한 것뿐일지도 몰랐다.
한편 게이트와는 달리 각각의 층으로 구성된 탑은 일반인들에게도 좋은 유흥거리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각 지역의 탑 토벌에 주목했고, 공략대가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거나 한 층이라도 클리어하면 그날은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탑에 진입하는 것을 몇 개월에 한 번씩으로 제약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인류에게 그것은 새 시대의 올림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야말로 대 이벤트.
따라서 돈이 있는 나라나 지역 연합은 외국의 이름난 헌터를 탑 토벌대에 스카우트하기 위해 혈안이 되기도 했다. 마치 스포츠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며 몸값을 올리듯, 같은 일이 헌터계에서도 흔히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가 입을 열었다. 은하가 살던 90년대와 지금은 시대부터가 다르다. 은하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일리 있는 말이야. 지금 당장 탑을 통해서 얻는 자원이 아까울 수 있지. 탑의 본질이 어떤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섣불리 행동하는 게 두려울 수도 있어. 하지만.”
은하가 고개를 들어 헤드 헌터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게이트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를, 당신들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 당시 게이트 역시 처음부터 특별한 반응을 보였던 건 아니야. 정부에서 조사단이나 연구원을 파견했지만 이렇다 할 수확도 없었지.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지? 게이트는 폭주했고 몬스터가 쏟아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가 나왔어.”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은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때의 기억, 향기, 광경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잖아.”
은하는 흔들리는 감정을 바로잡고 최대한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당시에는 세계 곳곳에서 각성자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우리에게는 힘이 있어. 사전에 재앙을 막을 만한 여건이, 지금은 있다는 소리야.”
“그럼 당신은, 지금 당장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해서 전 세계의 탑을 치자는 이야기인가요?”
판도라가 착! 하고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 접은 부채를 은하에게 겨누며 물었다.
“그것이 적을 자극하는 형태가 되어, 도리어 재앙을 앞당기는 일이 된다면요?”
“글쎄, 탑이 나타난 시점부터 이미 재앙은 시작된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건 30여 년 전 게이트의 등장이라는 전례가 있기 때문에?”
“또 한 가지 있어.”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덧붙였다.
“조디악이 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건, 오산이야.”
“근거는?”
원탁 테이블에서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 랭킹 10위 몽골의 칸이 물었다. 다른 헤드 헌터들도 진지한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지난 2월, 서울에서 로프티 헌터 훈장 수여식이 열렸던 것은 알고 있어?”
“기사로 봤지. 한국 최초의 로프티 헌터가 정식으로 탄생하는 날이었으니 유럽까지 떠들썩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곳에 조디악의 수하가 등장했다는 것도 알고 있나?”
“……뭐?”
칸의 눈빛이 변하는 그 순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심안 은유엘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심안은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놈과 직접 조우한 것은 그녀뿐이지만, 저 역시 수여식에 참여한 상황이었고, 그곳에서 분명 조디악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다른 헤드 헌터들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부터는 늦어.”
“…….”
은하의 단호한 목소리가 있은 후 모두가 입을 닫았다. 누군가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고, 누군가는 생각에 잠긴 채 팔짱을 꼈으며, 또 누군가는 힐끔 다른 헌터들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온 게 있어.”
은하는 옷 주머니에서 곱게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우선 각자 가지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공유한 다음 각각의 탑 토벌 일정을─.”
“글쎄, 나는 역시 반대야.”
그때, 니키타가 은하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탑이 게이트처럼 폭주해서 재앙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당장 내일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하는 건 우리도, 그리고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도 마찬가지야.”
탁!
니키타는 원탁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확신을 담고 탑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게, 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건가?”
“아니, 잘 알아들었어. 1세대 헌터인 네가 숭고하고 대단하신 뜻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하지만 말이야.”
니키타는 상체를 숙였다. 앉아 있는 은하와 눈높이를 나란히 마주한 그가 설교하듯 입을 열었다.
“네 시대와 지금은 달라. 헌터는 더 이상 영웅도 아니고 총알받이는 더더욱 아니야. 그저 하나의 직업일 뿐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상한 건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이야.”
“이상해?”
니키타의 말에 은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은하의 표정 변화를 감지한 니키타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다들 궁금해하고 있거든. 여기 아르헨티나 쪽 탑을 닫은 자가 누구인지.”
“…….”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으므로.
니키타는 은하가 앉은 의자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2032년 7월 처음으로 지구에 탑이 등장한 이후, 3년 동안의 업적이라고는 심안이 봉쇄한 인마궁이 전부였어. 그런데 2035년이 되고 나서는 벌써 3개의 탑이 봉쇄됐지. 이례적인 일이야. 문제는 그중 2개가 정체 모를 녀석에 의해 봉쇄되었다는 건데…….”
말끝을 흐린 니키타가 걸음을 멈추더니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그걸 왜 내게 묻는지 모르겠는데.”
“올해 봉쇄된 3개의 탑은 모두 흑염의 프린세스, 당신이 귀환하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는 얼마 전 거기 있는 백랑과 함께 탑에 들어섰을 때 닫았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두 개의 탑은? 당신의 귀환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니키타, 그게 무슨 소리죠?”
은하를 대신하여 캐나다 출신 헤드 헌터 4위, 발키리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야.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가 그렇게 개고생을 했을 때는 한 층 한 층 클리어하는 일이 그렇게 벅찼는데, 죽은 줄 알았던 흑염의 프린세스가 갑자기 살아서 돌아온 것도 모자라 탑이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봉쇄되고 있다는 것이.”
니키타가 은하를 향해 힐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게다가 갑자기 회담에 참석하는가 싶더니, 우리를 회유하는 척 탑으로 이끌고자 하고 있지. 이 모든 게 함정이라면?”
“…….”
니키타의 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정적이 증명하고 있었다. 헤드 헌터 중 절반 이상이 그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는 거라고.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은하 본인이 아닌,
“흑염의 프린세스가 탑과 내통이라도 하고 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그 옆에 앉아 있던 백랑 신시우였다.
뼈까지 얼어 버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에 니키타가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니키타는 백랑과 초면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싸늘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마치 처음처럼 느껴졌다.
그의 날 선 반응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니키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이건 단지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니키타가 너스레를 떨 듯 가볍게 입을 열자 시우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확인?”
“조디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쯤 되니 은하는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는 회담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 모인 헤드 헌터들의 절반 이상은 각기의 이유로 은하를, 흑염의 프린세스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우호적일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아르헨티나까지 오는 길, 시우도 어느 정도 그에 대해 경고한 바였으니까.
‘그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조력자라기보다는 경쟁자에 가까운 관계죠. 하위 랭킹에 위치한 몇몇은 자신의 랭킹에 불만을 품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마 그들에게서 괜찮은 정보를 얻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을 거라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시우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헤드 헌터들을 직접 만나 보겠다는 은하의 선택을 존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은하는 시선을 들어 저를 바라보는 헤드 헌터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은하가 조디악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건 눈앞의 니키타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외의 시선이 상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이 상태로 보자면 그들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기는커녕 제대로 된 회담을 진행하는 것도 포기하는 것이 빠를 듯했다.
“…….”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반쯤 포기한 은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때였다.
“그녀는 조디악이 아닙니다.”
심안 은유엘이 은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