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3)화
(213/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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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변질자(變質者)
2023.03.01.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 아르헨티나. 그중에서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멀리 떨어진 엘 찰텐(El Chalten)이라는 지역.
원래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킹 성지 중 하나였지만 탑이 나타난 이후 등산객이 확연히 줄어든 요즘은 그저 피츠로이산(Cerro Fitz Roy)과 가까운 작고 조용한 마을이 되었다.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고즈넉한 산골에 색색의 지붕을 얹은 작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곳.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퉁이에는 케빈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위치해 있었다.
엘 찰텐에서 직접 키우고 짜낸 산양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마을 사람들에게 굉장히 인기였다.
오늘도 영업을 위해 아침 일찍 가게에 나온 케빈은 아이스크림 기계를 돌리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거기 잠시만.”
문득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냉동고에서 어젯밤 미리 얼려 두었던 혼합물을 꺼내던 케빈이 고개를 들었다. 가게 입구 차양막 아래 키가 큰 청년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네. 외지인?’
피츠로이산에 탑이 나타난 이후 간혹 ‘탑 공략대’라고 하는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일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방문객이 없다시피 한 마을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헌터일까?
‘그런 것치고는 뭔가…….’
케빈은 눈앞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마디로 감상을 말하자면 잘생겼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외견만 봐서는 헌터보다는 꼭 배우 같았다.
매끈하고 하얀 피부와 상반되는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 자세히 보면 홍채 중앙의 까만 동공이 가로로 찢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게다가 보기 드문 분홍색 머리카락은 마치 케빈이 집에서 키우는 산양의 털처럼 부드럽고 폭신폭신해 보였다.
“근처에 탑이 있다고 들었는데.”
분홍색 머리 남자가 말했다. 역시 헌터였나. 그를 관찰하던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리는 가깝지만 이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기 산 보이시죠? 피츠로이산 말입니다.”
케빈이 검지로 저 멀리, 하얀 눈이 뒤덮인 산을 가리켰다.
“찾고 계신 탑은 저 산 뒤에 가려져 있거든요. 산맥을 넘어가면 바로 보일 겁니다.”
“……그렇군. 그런 식으로 기척을 숨겼나.”
겁쟁이 녀석. 분홍색 머리 남자가 비웃듯 코웃음을 흘렸다. 케빈이 “예?” 하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남자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휙 돌아섰다. 그러더니 발걸음을 떼기 전, 다시 힐끔 케빈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남자의 빨간 눈이 지그시 아래로 향한다. 우유처럼 새하얀 아이스크림이 둥근 통에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스크림이에요.”
“……아이스크림?”
케빈의 간단한 대답에 남자가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못 알아들은 건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길래 아이스크림을 모르는 거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케빈은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매일 직접 짜낸 산양유에 설탕이랑 바닐라를 넣어서 만든 거예요. 차갑고 달콤하답니다. 칼슘이랑 비타민A도 풍부해서 일반 크림으로 만든 것보다 몸에도 훨씬─.”
그러나 눈치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남자는 케빈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통에 담긴 하얀 아이스크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하나 줘.”
옳거니, 첫 손님.
신이 난 케빈은 콘 위에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아이스크림을 얹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휙, 그것을 건네받았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묘한 시선으로 살피던 그가 할짝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어떠십니까?”
케빈의 물음에 남자는 딱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콧잔등에 자리했던 주름이 미약하게 펴진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다.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허공을 툭툭 두드렸다. 그 행위에 대해서는 케빈도 알고 있었다. 저것은 ‘각성자’들이 인벤토리를 여는 것이었다.
케빈의 예상대로 곧 허공에서 가판대 위로 차르르! 동전과 지폐가 떨어졌다. 달러였다.
“감사합…… 응?”
기껍게 돈을 챙기던 케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1, 10, 100……. 잠깐만. 이게 도대체 얼마야?
작은 가판대 절반을 가득 채운 달러에 케빈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손님, 이건 너무 많은데…… 요?”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 에단의 목적지는 상인이 말했던 피츠로이산 정상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산 하나를 단숨에 넘는 방법 따위 없었겠지만 에단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몇백 달러를 주고 구매한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도 전에 산의 정상에 오른 에단은 어렵지 않게 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인의 말대로 거대한 산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에단은 산의 정상에 우뚝 선 채 아이스크림을 먹어 가며 이곳에서 저쪽 탑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금방이겠군.’
대충 계산을 마친 뒤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적당히 주변에 버리려다가 멈칫 굳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스크림이라는 간식,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입가에 살짝 묻어난 아이스크림을 엄지로 무심히 닦아 내던 에단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은하도 이걸 먹어 본 적이 있으려나.’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녀가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돌아가는 길에 사 가는 게 좋겠군. 내 거까지 해서 두 개.’
아이스크림이 녹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에단은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기는 했지만, 탑 입구까지도 무사히 도착했다.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 남부 부근에 위치한 탑은, 지구에 나타난 11개의 탑 중에서도 가장 험준한 곳에 나타났다.
대한민국 남양주시나 다른 국가들처럼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에 나타난 탑이 아니었기에 다른 탑들에 비해 공략 우선도는 낮았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각성자 수를 가진 북미와는 달리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남미 국가는 비교적 각성자의 수가 적었던 점도 한몫했다.
‘그 겁쟁이 녀석이 둥지를 틀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라는 소리지.’
에단은 저벅저벅 탑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문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그 어떤 시스템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억지로 문을 부숴 들어간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탑은, 네뷸러는 에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예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에단, 너를 이곳에서 영영 추방하겠다.’
불현듯 귓가를 스치는 불쾌한 목소리.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연기처럼 떠오른 그 기억은 하얀 산맥 위로 생생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대지.
공중을 부유하는 황금빛 궁전.
검은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마법진.
머리 위에 축소된 천체(天體)를 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좋아, 이딴 곳은 내 발로 나가 주겠어.’
─그를 마주하고 있는 에단.
에단의 말에 남자는 웃었다.
‘아니, 이곳을 나가는 자유조차 네게는 주어지지 않아.
너는 네뷸러를 벗어나 아스트의 지하 미궁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다.
다쳐도 다치지 못하고, 죽어도 죽지 못하며, 먹어도 배가 부르지 못할 것이니.
너는 끝이 없는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며 현재에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괴한 빛의 눈동자.
‘그것이 내가 네게 내리는 형벌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에단이었다.
바라던 바였다. 고소를 머금은 에단은 스르륵 양손을 들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는 탑에 입장할 수 없다. 시련을 제시하는 자도, 시련을 이겨 내는 자도 아니니까.
그러나 아무런 생각 없이 탑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 어중간한 존재만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에단은 잘 알고 있으니까.
‘……아직 힘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에단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의 신체 형태를 따라 선명한 붉은 기운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콰득, 콰드득…….
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바닥에 굵직한 금이 하나둘씩 번져 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산새가 한 번에 푸드덕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
쿠구구─
산 전체가 내려앉는 듯 흔들림이 극심해진다. 나무가 쓰러지고 지면이 가라앉으며 바람이 거세게 변했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변화.
그러나 이것은 누구를 공격하는 것도, 자신을 방어하는 것도 아닌, 고요한 포효. 즉 지금 에단이 한 행동은 그저 단순한 마력 방출에 불과했다.
그 단순 명료한 행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괴이한 힘. 만일 시스템이 이 힘을 눈치챈다면 오류로 판단할 것이다.
“…….”
에단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렇지 않아도 새빨간 눈동자가 마치 붉은 달을 삼킨 듯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로소 그의 눈앞에 파지직, 검은 스파크가 튄다.
언노운 게이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
잔재(殘在)의 무덤이 그에게 검은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
탑의 최상층, 네뷸러 어딘가.
“너……! 네가 어떻, 게……!”
우드득.
커다란 손에 목을 졸린 채,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목을 조르는 힘은 점차 강해졌다.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덮친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 이곳에 올 수조차 없는 자. 그랬을 텐데…….
“수고했어, 라스퀼.”
나지막한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에 닿는 순간, 아등바등하던 그의 몸이 축 처졌다. 그를 압박하고 있던 손에 스르륵 힘을 풀자,
“이제는 잘 시간이다.”
털썩─
남자는 실이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푸른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가려져 있던 남자의 뺨이 드러났다.
여러 개의 작은 별과 그것을 잇는 직선들. 별자리 문양이었다.
우두커니 선 채 위에서 아래로 그것을 쳐다보던 붉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스르륵 휘어진다.
이후 전 세계 각성자들의 눈앞에는 같은 시스템창이 떠오르게 되었다.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11궁, 보병궁(寶甁宮)이 봉쇄됩니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 탑 봉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