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1)화 (211/306)


#211.그가 그에게 하는 부탁
2023.02.27.


은하와 이준, 시우가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에 온 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흘러 오후 5시가 되었다.

그들은 플룸 라이드를 시작으로 약 두 개의 놀이기구에 탑승했다. 하나는 Y익스프레스, 트리플락스핀.

구정물 위를 내달리는 플룸 라이드와 달리 그다지 불결할 구석이 없는 놀이기구라 시우의 경우에는 탑승에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준이 감당하기에는 어느 쪽도 너무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결국 이준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그들은 한적한 곳을 찾아 잠시 벤치에서 휴식하기로 했다.

“괜찮아, 백이준?”

시우가 주변에서 마실 것을 사 오는 동안, 은하는 창백한 얼굴의 이준을 돌봤다.

“응, 괜찮…… 아.”

이준은 있는 힘껏 웃어 보였지만 미소로 안색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준을 물끄러미 살피던 은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신시우가 마실 것을 사러 갔으니까 우선 벤치에 좀 기대고 눈 감고 있어.”

한심했다. 그녀에게는 죽어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은하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이준이 제 어깨를 살짝살짝 두드려 주는 그녀와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벤치에 기댄 이준은 손등으로 눈가를 가린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

“미안하다니 뭐가?”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나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게 해서.”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지. 고마워. 나 네버랜드에는 처음 오거든.”

은하가 특유의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스르륵, 손을 아래로 내린 이준이 힐끔 은하를 바라보았다.

퍼레이드를 하는 걸까, 저 멀리 화려한 불빛이 반짝이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재밌다, 여기.”

그녀의 긴 눈매가 살며시 접힌다.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이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벤치 뒤편으로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은하의 까만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색색의 꽃잎도 함께 흩날린다.

이준은 홀린 듯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새까만 눈동자 속으로 퍼레이드의 조명이 별처럼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은하가 이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선배, 여기요.”

돌연 그들 사이를 분홍색 몽실몽실한 것이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솜사탕? 슬며시 미간을 좁힌 이준이 시선을 들자, 그곳에는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시우가 있었다.

“웬 솜사탕이야?”

“음료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보여서요.”

분명 은하의 물음에 답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새파란 눈은 꼿꼿이 이준을 향해 있었다. 집어삼킬 듯 부릅뜬 두 눈은 ‘네가 뭘 하려고 했는지 다 알고 있다.’ 마치 그렇게 으르렁대는 것처럼 보였다.

두 남자가 무언의 눈빛 교환을 이어 가는 사이,

“…….”

은하는 시우가 쥐여 준 솜사탕을 빤히 응시했다.

딸기 우유처럼 연한 분홍색에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솜사탕. 그것을 보고 있자니, 탑에 진입한 이후 홀연히 사라져 버린 에단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무심코 손을 뻗어 솜사탕을 만지작거리자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이리 와 봐. 묶어 줄게.’

‘……뭘?’

‘앞머리. 거슬리잖아.’

체리 방울 머리끈으로 그의 앞머리를 묶어 주던 때가 떠올랐다. 에단의 곱슬기가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도 꼭 이런 촉감이었지.

솜사탕을 응시하던 은하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에단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시우에게 머리끈을 전달하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건대 에단이 사라진 것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자의(自意)이리라.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에단이 갈 만한 곳은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구 출신이 아니니까. 시스템 마켓을 이용해 이곳의 화폐를 획득했으니 노숙을 하거나 굶을 걱정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신경이 쓰였다.

언노운 게이트에 오래 갇혀 있을 당시 고양이를 만났고, 이후로 은하는 늘 고양이와 함께였다. 30년이 흐른 현대는 낯설었지만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고양이 덕분이기도 했다.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고양이를 잃고, 그 뒤 우연히 이동한 네뷸러에서 에단을 만났다. 그곳에서 탈출한 후에는 고양이 대신 에단이 은하의 곁에 있었다.

은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탑을 봉쇄하고 돌아온 이 며칠 동안, 어째서 집이 그토록 넓고 쓸쓸하게 느껴졌는지.

‘보고 싶다.’

고양이도, 그리고 에단도.

은하는 그들을 걱정하는 동시에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한편 이준을 노려보던 시우는 힐끔 은하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선배?’

아까와는 달리 조금 어두워진 표정. 근래에 은하가 지었던 바로 그 그늘진 얼굴이었다.

속내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시우는 그런 은하가 신경 쓰였다.

다시 선배를 즐겁게 해 줄 방법은 없을까.

시우는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준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이상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힘들 것 같다.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선배가 조금 더 기뻐할 만한 것이 없을까?

그렇게 주변을 물색하던 도중, 커다란 간판이 시우의 눈에 띄었다.

판타스틱 주(Fantastic Zoo).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가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 동물원이었다.

* * *

「판타스틱 주에 오신 네버랜드 친구 여러분들, 모두모두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신나는 모험을 떠나실 건데요, 그 전에 우리 친구들이 꼬옥 지켜야 할 네 가지 약속 사항에 대해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차량 내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모니터를 통해 사파리 모자를 쓴 캐스트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형 승합차에 탄 인원은 운전 겸 안내를 하는 가이드 하나에 은하, 이준, 시우까지 총 네 명이었다.

이후 차량이 출발하자 투명한 창문 밖으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바위가 이곳저곳에 위치한 울창한 숲에는 반달가슴곰과 호랑이가, 조금 더 넓은 초원으로 나오자 사자와 하이에나가 나타났다.

“이 친구는 곰돌이 가족 중에서도 막내인데요, 이름은 피터라고 해요.”

운전수이자 이곳 판타스틱 주의 가이드인 남성은 동물들을 지나칠 때마다 해당 동물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이준과 시우는 가이드에 설명에도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무심하게 쳐다볼 뿐, 대부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터는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엄청 크죠? 곰 친구들의 성장 속도가 인간의 약 8배나 된다고 해요.”

“굉장하네요.”

그러나 은하의 경우 가이드의 설명에 하나하나 반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다거나 설레어 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평소 은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시우와 이준이 보기에, 지금 은하는 충분히 판타스틱 주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어,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가이드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주변 바위 위에 널브러지듯 누워 있던 곰들이 갑자기 슬금슬금 차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하하, 안녕! 인사하러 왔나 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드나 봐요. 손 한번 흔들어 주시겠어요?”

그러자 이준은 언제부턴가 벗고 있던 장갑을 다시 쓰며 싱긋 웃었다.

“동물들이 굉장히 살갑네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사실 곰들을 이쪽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그는 가이드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한 페로몬을 흘렸고, 그것에 꾀인 곰들이 여기까지 홀린 듯이 다가온 것이었다.

콩콩.

은하가 앉은 좌석 쪽 유리창을 곰이 가볍게 두드렸다. 정말 인사라도 하듯이 꾸벅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래, 안녕.”

은하는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곰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우는 아닌 척하면서도 힐끔 은하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조금 밝아졌군.’

은하는 유리창에 양손을 가져간 채 뚫어져라 창밖을 응시하고 있느라 시우가 저를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뒷좌석 시트에 기대서 동물을 구경하더니, 점점 상체가 앞으로 쏠려 지금은 이마를 유리창에 거의 붙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갑자기 창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밖으로 떨어질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은하를 훔쳐보던 시우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흠.”

시우는 작게 헛기침을 하는 척 주먹을 말아 입을 가렸다. 본의 아니게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가 성가신 듯 일부러 힘을 줘서 아래로 당겨 보았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탓에 얼굴 절반이 가려져 있다는 건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차량은 조금 더 이동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 판타스틱 주의 마스코트 친구들을 만나러 출발해 볼까요?”

마지막으로 펼쳐진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마치 남극의 바닷가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그곳은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발밑 조심하시고요!”

가이드는 차 문을 열어 조금 더 가까이서 펭귄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게 모두 진짜 얼음인가?’

은하는 조금 커진 눈으로 얼음 위를 걸었다. 세상이 좋아지기는 했나 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진짜처럼 남극 풍경을 연출할 수가 있을까?

새하얗게 펼쳐진 얼음 위로 작고 통통한 그림자가 줄지어 뒤뚱뒤뚱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펭귄이었다.

은하는 대부분의 동물을 좋아했지만 그중에서 유독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개와 펭귄이었다. 애견 미용사가 꿈이었으니 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펭귄은 그녀의 지갑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사육사가 그들을 향해 먹이를 던지는 것이 보였다.

“해 보시겠어요?”

사육사가 은하에게 먹이통을 내밀었다.

“……네.”

작게 대답한 은하가 먹이통을 받아 펭귄에게 직접 날생선을 건네주었다. 동물원에서 사육된 펭귄은 낯선 인간을 경계하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냉큼 받아먹었다.

통통한 날개를 파닥이며 제 부리 앞까지 들이민 먹이를 콕콕 받아먹는 그들이 귀여워, 은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찬가지로 차량에서 내린 이준과 시우는 그러한 은하를 뒤쪽에서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분도 어때요?”

사육사가 이준과 시우에게 먹이통을 건넸다. 그러나 그들은 “됐습니다.”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 음…….”

조금 머쓱한 듯한 얼굴을 한 사육사는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은하가 펭귄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감상 중이던 시우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라도?”

“어…… 저기 있는 저분 말인데요. 혹시 흑염의 프린세스가 아닌가요?”

마스크 위로 슬쩍 보이는 시우의 푸른 눈이 일순 흔들렸다. 눈썰미가 좋은 사육사는 그녀가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시우는 눈앞의 사육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주변을 확인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는 없는지, 이곳을 보고 있는 눈은 없는지.

그러자 사육사의 질문에 차량 주변을 서성이던 가이드 역시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도 은하의 정체를 대강 알아챈 것처럼 보였다.

‘둘인가.’

어쩌지.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이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일이 커진다면?

“저 사람은…….”

결심을 마친 시우가 서서히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휴무라서.”

이준이 그의 말꼬리를 잘라 내고 사육사 앞에 섰다.

“조용히 있다가 가고 싶은데.”

그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육사에게 지폐를 건넸다. 그것을 본 사육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아니…… 저는.”

고개를 휘휘 내젓는 사육사에게 이준은 기어코 지폐를 쥐여 주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길 바라.”

그리고 싱긋 웃었다.

사육사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흔들리는 눈으로 제 손 안의 지폐 뭉치를 바라보았다.

“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네버랜드 친구 여러분!”

그러고는 후다닥, 차량 근처의 동료에게 뛰어갔다. 그들의 모습을 힐끗 살핀 이준이 시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보지?”

“능력을 사용하는 편이 빠르지 않았나?”

“내 맘이야.”

이준은 짤막하게 답했지만 사실 시우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페로몬을 사용했더라면 돈을 쓰지 않고도 사육사와 가이드를 손쉽게 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이준의 페로몬 향을 맡은 은하가 이쪽 일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준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펭귄에게 집중하는 은하의 모습을 조금 더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어차피 지금 이곳에는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없어. 아니라고 잡아떼기보다는 확실히 입을 막아 두는 게 여러모로 편하겠지.”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시우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닫았다. 설마 테마파크 직원에게 선뜻 저만큼의 지폐를 건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그의 의견에는 시우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 나도 선배의 평범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같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사이 펭귄과 조금 친해진 은하는 아까보다 조금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빠안히 관찰하고 있었다.

“너는 은하를 선배라고 부르는군.”

은하를 지켜보던 이준이 말문을 열었다.

“선배는 1세대 헌터니까.”

“나도 1세대 헌터이긴 한데.”

“……달리 부를 호칭도 없고. 배울 점도 많으니까.”

“배울 점이라.”

“당시 기록을 대충만 살펴봐도 선배가 얼마나 큰 활약을 펼쳤는지 알 수 있어.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처음 은하를 만났을 때에는 실명도 알지 못했으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차은하’라는 이름으로 웹상의 헌터 자료실에서 조회만 해 보아도 30년 전 그녀의 업적이 주르륵 나왔다.

만일 그런 기록이 없더라도 시우는 알고 있었다. 은하를 만난 이후 쭉 지켜봐 왔으니까. 아니,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됐지.

“은하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야.”

은하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시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함께 은하를 응시하고 있던 이준의 은회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시우를 향했다.

“백랑, 너는 저 애가 영웅 같나?”

그러자 시우의 푸른 눈동자 역시 그를 향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시우가 가만히 이준을 응시했다.

“나는 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저 애를 봐 왔어. 은하가 각성하고 훈련소에 처음 오게 된 날부터 쭉.”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시우가 움찔, 눈썹을 떠는 순간 이준은 다시 은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하는 강했다. 훈련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당시에는 랭크 같은 것이 없었지만, 같은 각성자라고 해도 확연히 다른 수준이었지.

동기들도 훈련관들도, 심지어는 훈련소 소장까지 주목할 정도였다. 동경이나 질투, 두려움이 섞인 눈이 늘 따라다녔어.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희망. 희망이었지.”

은하를 바라보는 이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희망’만큼 잔혹하고도 비정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준은 여전히 은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 애의 어깨에는 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어. 인간은, 우리는, 희망이라는 말을 핑계 삼아 저 애를 최전선에 세웠고 책임감을 갖게 했으며 상실을 강요했지.”

그리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아. 거기까지 말한 이준이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고 시우를 똑바로 마주했다.

“저 애는 영웅이 아니야.”

“…….”

“우리가 영웅으로 만들고자 앞에 세워 둔 방패막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나는 저 애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데리고 오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은하를 대신해서 방패막이가 되어도 상관없어.”

이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시우가 스르륵 입을 열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우와 이준은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준은 갑자기 시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색소가 옅은 금발이 흩날리며 은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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