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9)화 (209/306)


#209.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2023.02.25.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대한민국 최대 규모 테마파크 네버랜드(Neverland).

입구 앞 북적이는 인파 속, 은하는 마스크를 눈 바로 아래까지 올려 얼굴을 꽁꽁 숨겼다.

아침부터 메시지를 보내온 시우와 이준은 대뜸 12시까지 이곳으로 와 달라고 은하에게 말했다. 오라니까 오긴 했는데…….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슬쩍 시선을 들어 눈이 부실 정도로 휘황찬란한 네버랜드 간판을 확인했다. 테마파크에서 미팅 등의 중요한 일정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공통점이랄 게 없는 시우와 이준이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를 제안한 것을 보면…….

‘근처에 게이트 발생 예고라도 있었던 건가?’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분명 사전에 피난 주의보가 떴을 텐데, 지금 이 주변에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나] [오전 8:30] 네버랜드? 알지.

[나] [오전 8:30] 근데 네버랜드는 왜?

은하는 두 사람에게 메시지로 각각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돌아온 답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오면 알게 될 거라니…….’

그렇게 인파 속에 섞여 의문을 가지기를 약 몇 분. 누군가 은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은하와 마찬가지로 마스크로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린 데다 후드를 뒤집어써 머리까지 가린 남자였다.

“선배.”

스르륵. 후드를 살짝 벗자 검푸른 머리카락과 긴 눈매가 드러났다. 신시우였다.

“빨리 오셨네요. 아직 약속 시간까지 20분이나 남았는데요.”

“매니저님이 차로 데려다주셨거든. 생각보다 차가 그다지 막히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싱겁게 대꾸한 시우가 코를 매만지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러 은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은하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엄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시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게…… 데이트라는 건가.’

그러다가도 제 생각에 흠칫 놀라 주변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 독심술사가 있지 않은 이상 그의 속내를 들은 사람은 없을 텐데도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여성과 남성이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해 만나고 ‘기다렸어?’,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그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우가 미디어를 통해 보아 온 데이트의 시작 그 자체였다.

시우는 힐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근처 벽면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어두운 차콜 색상 후드티에 청바지. 평소 시우가 즐겨 입는 편안한 차림새였다. 다만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머리 스타일에 약간 신경을 썼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후드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머리가 살짝 망가져 버렸는데. 괜히 그것이 신경 쓰여서, 시우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그러고 보니 옷도 이런 무채색 계열을 입고 올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화사한 색상으로 할 걸 그랬다.

“몸은 좀 어때?”

그러던 중, 은하가 불쑥 다가왔다.

“……네?”

화등잔처럼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자 은하의 시선이 또르륵 아래로 향했다. 시우의 복부를 향해서였다.

“다쳤던 거 말이야.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빨리 퇴원해도 되는 거야?”

“아…… 네. 그 정도 부상으로 몇 주나 병상에 누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시우의 말에 은하가 작게 웃었다.

“왜 웃습니까?”

시우는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 물었다. 은하는 여전히 웃음기가 옅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복부가 뚫렸는데 ‘그 정도 부상’이라니.”

“……그다지 심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우가 힐끔 은하를 쳐다보더니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는 신수 개의 화신이기도 했다. 그의 회복력이 일반 헌터들보다도 훨씬 높은 까닭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당분간 전투나 훈련은 불가능하겠지만 퇴원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 정도는 가뿐합니다.”

“그래?”

“네.”

짤막하게 답하는 시우는 여전히 은하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사실은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흘리듯이 작게 웃는 그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윙윙 맴돌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흠. 그럼 들어갈까요.”

괜스레 헛기침을 두어 번 흘린 시우가 네버랜드 입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하지만 백이준이 아직 안 왔는데.”

“백…….”

멈칫.

시우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백이준.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에 대해 그제야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자는─.”

휙 고개를 돌린 시우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은하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어느새인가 나타난 이준이 은하 곁에 섰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두 사람은 방금 전 시우가 생각했던 ‘데이트 시작의 정석 대화’를 그대로 읊고 있었다.

와장창…….

시우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그들이 은하를 네버랜드로 데리고 온 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탑을 봉쇄한 이후 생각이 많아 보였던 은하. 그런 그녀에게 기분 전환을 시켜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도 명쾌한 방법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네버랜드? 이번 주 주말에 말이야? 누구랑? ……박제림, 너 설마 남자친구 생겼어? 너 그렇게 사람 붐비는 곳은 싫다고 했잖아.’

제휘가 여동생 제림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휘의 목소리가 워낙 큰 탓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멋대로 통화 내용이 이준과 시우의 귀까지 닿았다.

‘뭐? 네버랜드를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냐니, 네가 저번에 분명…… 야, 박제림! 대답해. 박제림!’

가만있어 봐. 네버랜드?

‘…….’

‘…….’

이준과 시우의 눈이 딱 마주쳤다.

은하는 성인이 되자마자 각성하고 징병되었고, 이후로는 헌터 생활을 쭉 이어 가다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다.

그러니 즉 2030년대,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해 보았을 테마파크에 단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 괜찮은 선택지는 지금으로써는 없는 것 같군.’

제휘의 통화 내용을 듣던 이준이 중얼거렸다.

‘동감이야.’

시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은하를 네버랜드에 데리고 가느냐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시우와 이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너는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않으니 내가 그 애를 데리고 가지.’

‘아니, 당신은 미국인이잖아. 네버랜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텐데? 난 서울에서 나고 자랐거든. 당신과는 달라.’

그로부터 팽팽하게 이어진 기 싸움.

끝까지 승자는 나오지 않았고 그 결과 세 사람이 나란히 네버랜드에 오게 된 것이다.

“성인 세 분, 입장하시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환상의 나라, 축제의 땅 네버랜드에 어서 오세요!”

세 사람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무표정으로 네버랜드에 입장했다.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를 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경쾌하고 신나는 BGM이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외에는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평일 낮이라 생각보다는 사람이 적다는 점이었다.

‘이런 곳을 다 와 보네.’

한편 눈앞에 펼쳐진 동화 속 세상을 바라보는 은하의 얼굴은 감탄이나 환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나…… 아무튼 그쯤에 네버랜드가 용인시에 개장했다는 기사를 신문으로 보았었지.

아버지 없이 자란 은하는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부유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일하던 직장에서 정리 해고를 당했던 때에는 급식비가 자주 밀려 교무실에 불려 갔던 기억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엄마를 졸라 네버랜드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어렸던 은하는 책상 서랍 깊숙이 해당 신문 기사를 집어넣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던가. 오늘 이런 식으로 이곳을 처음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준과 시우와 함께 말이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라더니 정말 그랬다.

원래라면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넋을 놓고 주변을 바라보았겠지만, 은하는 그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지만, 은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S급 헌터인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모였다는 것이 그 증거일 테니까.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길을 걷던 은하는 저 구석에 있는 여자 화장실 간판을 발견했다.

“옷 갈아입고 올게.”

그러고는 결연한 얼굴로 이준과 시우에게 손에 든 쇼핑백을 스윽 들어 보였다.

쇼핑백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검은 레이스. 즉 저 안에 든 것은 흑염의 프린세스의 ‘칠흑 비단 드레스’임이 틀림없었다.

“선배, 드레스는 왜…….”

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시우의 기억상, 저 드레스는 어깨 부근이 주욱 찢어져 제대로 입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시우가 입원한 며칠 사이 드레스를 수리하지 않았다면 저것은 보지 않아도 걸레짝이나 다름없을 것이 뻔했다.

“일하러 온 거 아니었어?”

은하는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순간 시우와 이준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직업병이다.’

은하는 성인이 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헌터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이것도 자연스레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 나름대로 오늘 테마파크 방문은 깜짝 선물이라는 의도가 있었다. 설명을 보충하지 않은 그들의 잘못도 물론 있겠지만…….

“…….”

“…….”

시우와 이준은 애매하게 굳은 시선을 말없이 교환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테마파크 입구를 통해 들어 와 화려하고 환상적인 광경을 목도했을 때 설렘이나 기대를 안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저렇듯 비장한 얼굴로 사명감을 갖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진 않겠지.

“이리 줘, 은하야.”

이준이 은하에게 손을 뻗어 쇼핑백을 가져갔다.

“오늘 이건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대답 대신 코트 안쪽 주머니를 뒤적인 이준은, 가운데에 플라스틱 보석이 박힌 왕관 모양의 똑딱핀을 꺼냈다. 그리고 은하에게 다가가 그것을 머리에 꽂아 주었다.

“이거면 충분해.”

달랑달랑…….

은하의 머리 위에 달린 왕관 장식이 테마파크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했다. 은하는 묘한 얼굴로 자신의 정수리 부분을 매만졌다.

“그리고 이건 네 거.”

이준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시우에게 내밀었다. 회색빛 털이 복슬복슬한 늑대 모양의 탈이었다. 언제 이런 걸 사 왔는지 모르겠다.

종이 가방 내부를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시우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나는 됐어.”

그러자 은하와 비슷한 디자인의 왕관 똑딱핀을 머리에 꽂던 이준이 휙 돌아보았다.

“마음가짐이 되지 않았군.”

“……뭐?”

“테마파크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 이런 장비는 필수거든. 몰랐나?”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

“그래? 정 그렇다면 네 맘대로 해.”

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은하를 향해 말했다.

“어때, 은하야?”

달랑달랑…….

이준의 머리 위, 용수철에 매달린 작은 왕관이 귀엽게 흔들렸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은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이상하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아까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풀린 눈매로 은하가 덧붙였다.

“이런 건 처음이라.”

짧게 대답하는 은하가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에 달린 왕관을 매만졌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는 또르륵 시선을 떨어트려 종이 가방 속 늑대 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바스락─

시우는 더듬더듬 종이 가방에서 늑대 탈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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