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8)화 (208/306)


#208. 두 남자의 작전
2023.02.24.


다음 날 밤, 은하의 오피스텔 앞.

예정대로 퇴원을 마친 시우는 늑대 본부에서 중요한 업무를 끝낸 후 이곳에 찾아왔다. 어제 보았던 선배의 어두운 표정이 내내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짜고짜 여기까지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당장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십 분 이상 그 근처를 서성이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단 한 가지. 선배가 왜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바로 이것이었다.

‘보세요, 제가 뭐랬습니까. 바로 퇴원할 정도로 멀쩡하다고 했잖아요.’

아니, 이건 너무 거들먹거리는 것 같다.

‘어제 표정이 어두워 보이던데 괜찮습니까?’

이것도 아니다. 선배라면 분명 괜찮다고 할 것이고 그럼 바로 대화가 단절될 테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이것도 기각. 지금 시간이면 박 매니저가 그녀의 저녁 식사를 챙겨 주고도 남았을 테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이건…… 못 한다.

“하.”

손등으로 제 눈가를 가린 시우가 억누른 한숨을 토해 냈다.

“뭐 하는 거냐, 진짜.”

차가운 밤공기 위로 새하얀 입김이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도 산더미인데, 그 모든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맡기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도 고작 오피스텔 현관 근처를 머저리처럼 서성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도 너무 우스워서, 시우는 결국 피식 자조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어쨌든 여기 있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우선 올라가자.

제자리에서 장승처럼 굳어 있던 그가 이내 결심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대표님?”

마침 오피스텔에서 내려오던 제휘와 1층에서 딱 마주쳤다. 양손 가득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내려온 것을 보아하니 이제 막 퇴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퇴원하시고 바로 본부로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갔지.”

“그런데 왜…… 아.”

제휘의 눈이 샐쭉 가늘어졌다.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쩐지 기분이 나빠, 시우는 미간을 와락 좁혔다.

제휘는 금방 표정을 고쳤지만 시우가 정색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크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헌터님이라면 아직 깨어 계실 테니 지금 바로 올라가시면 될 겁니다.”

“…….”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

“같이 가지.”

“예?”

제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랑 나는 우연히 근처에서 만난 거고, 네가 날 여기로 데리고 온 거다.”

“그게 무슨…….”

“뭐 해. 앞장서지 않고.”

시우가 오피스텔 현관을 향해 힐긋 턱짓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제휘는 우선 알겠다는 듯 등을 돌렸다.

‘뭐지……? 밤중에 헌터님을 찾아온 것이 부끄럽기라도 하신 걸까?’

대충 짐작한 것이 그 정도였다. 대표님의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제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경비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입구의 유리 자동문이 열리고 오피스텔 내부로 들어선 찰나였다.

“잠시만요.”

등 뒤로 또각또각 다급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제휘는 닫히기 일보 직전인 유리문에 손을 끼워 넣었다.

“감사합니다.”

뒤늦게 현관문을 통과한 여성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머리카락 한 올 놓치지 않고 깔끔하게 올려 묶은 올린 금발. 각진 안경에 키가 큰 여성이었다. 제휘는 그녀와 안면이 있었다.

“어, 당신은…….”

저벅─

이어서 여성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손질한 듯 단정하게 넘긴 옅은 베이지빛 금발. 새까만 슈트에 까만 가죽 장갑. 게다가 정확히 이곳을 향하고 있는 은회색 눈동자까지.

“……너는.”

시우가 중얼거렸다.

눈앞의 남자, 마에스트로 백이준을 향해서였다.

* * *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하하.”

제휘는 눈앞의 여성, 캐서린을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

캐서린 허드슨. 체이서 소속이자 마에스트로의 보좌 역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으로, 일전에 흑염의 프린세스 건으로 제휘와 안면을 튼 적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은하의 오피스텔 근처에 위치한 조용한 카페였다. 어째서 제휘와 캐서린이 이곳에 앉아 있는가 하면, 상황은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하의 오피스텔 앞에서 딱 마주친 네 사람. 캐서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제휘와는 달리, 이준을 발견한 시우는 차갑게 굳었다.

‘당신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너야말로 이 시간에 은하의 집 앞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묻고 싶군.’

‘그걸 내가 설명해야 하나?’

‘나 역시 너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파지지직…….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았다. 캐서린과 제휘는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서로의 상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이준을, 시우가 몸으로 막아섰다. 눈을 가늘게 뜬 이준이 시우에게 나지막이 경고했다.

‘비켜.’

‘지금 이 시간에 선배를 찾아가는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비킬 생각 없어.’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했을 텐데.’

‘그렇다면 나도 비킬 이유가 없지.’

덜컹.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다 말고 시우의 어깨에 부딪히면서 다시 강제적으로 열렸다.

‘모르나 보군. 그 애와 난 만나는 시간 따위를 신경 쓸 만한 사이가 아닌데 말이지.’

‘그래? 몰랐어. 선배는 내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말이야.’

‘…….’

‘…….’

덜컹. 덜컹덜컹.

닫히지도 열리지도 못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살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휘는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수를 썼다.

‘아! 그러고 보니 헌터님께서 오늘은 피곤하셔서 일찍 주무신다고 하셨는데…… 요…….’

그러자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던 시우와 이준이 동시에 제휘에게로 힐끔 시선을 모았다. 바늘처럼 뾰족한 시선에 그대로 악! 하고 비명을 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제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음, 제가 전화해서 확인해 볼 테니 우선은 자리를 옮길까요?’

이준과 시우는 그제야 현관의 유리 자동문 너머로 오피스텔 주민들이 힐끔힐끔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상황은 다시 지금에 이른다.

제휘와 캐서린이 카페 내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 시우와 이준은 카페 뒤쪽에 나와 있었다.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일 정도로 친근한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아직 서로에게 듣지 못한 답이 많았기 때문이다.

“…….”

힐끔 시선만을 돌려 이준을 바라본 시우가 불편한 듯 입매를 굳혔다. 딱딱하게 굳어 있기는 이준도 매한가지였다.

거기서 누군가 먼저 물러났다면, 나머지 한쪽이 그대로 17층 은하 집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안 되면 너도 안 돼. 이준과 시우는 현재 같은 마음으로 여기에 온 것이었다.

가만히 이준을 살피던 시우는 문득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오피스텔 앞에서 조우했을 때부터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비닐봉지를 살피는 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봉지 표면에 인쇄된 문자는 분명 ‘김윤례 할매 국밥’이었다. 선배가 평소 즐겨 먹는 바로 그 국밥집의 상호명이었다.

“그 애가 제일 좋아하는 국밥집이야.”

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오전에 연락을 해 봤는데,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 오늘 근처에 들른 김에 포장해 건네려던 참이었지. 이번 탑 공략에 대해 전할 이야기도 있고. 하지만 네 덕분에 국밥이 다 식게 됐군.”

“……선배는 어제 병원에 들렀어.”

“병원?”

이준이 슥 고개를 돌렸다.

“은하가 다쳤다는 건가?”

“아니. 선배는 멀쩡해. 조디악과 싸우면서 부상을 입은 건 내 쪽이야. 오늘 오전까지 입원해 있었거든.”

“그렇군.”

이준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다친 게 너라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조금 불쾌했지만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시우 역시 다친 것이 선배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고맙다.”

돌연 이준이 시우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어쨌든 그 애를 지키려다가 다쳤으니까.”

“당신이 인사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고마워.”

“…….”

시우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저자가 제게 저렇듯 순한 얼굴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시우가 입을 다물어 버리며 둘 사이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둥근 달이 구름 뒤에 숨고 어둠 속에 마주 선 두 남자는 오래도록 미동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윽고 시우가 다른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배가 병문안을 와 주었을 때 평소보다 얼굴이 어두워 보였어. 내가 다친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아주 멀쩡하다고 보여 주기 위해 잠시 들른 거야.”

“확실히 멀쩡해 보이긴 하는군.”

이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너나 나나 비슷한 목적으로 거기까지 간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했어. 돌아가지.”

그렇게 카페 내부로 들어서려는 이준을 시우가 붙잡았다.

“잠시 기다려.”

일단 붙잡기는 했는데, 어째서인지 시우는 조금 머뭇대는 기색이었다. 괜히 한 번 헛기침을 흘린 시우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

“뭐라고?”

“선배는 무얼 좋아하냐고 물었어.”

“그걸 왜 내게 묻지?”

그리 묻는 이준의 입꼬리가 얼핏 곡선을 그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시우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어쨌든 당신이 나보다 더 오래 선배를 알았으니까.”

선배가 기운이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나보다는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야. 시우가 인상을 찌푸린 채 덧붙였다.

“흐음. 글쎄.”

이준이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확실히 그 애와 나는 아주 오래된 사이기는 하지. 너보다 훨씬 말이야.”

어쩐지 말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았지만 시우는 인내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조금은 굽힐 줄도 알아야 했다.

“은하는 먹을 것을 좋아하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은데. 조용한 장소를 선호하니 아예 레스토랑 전체를 대절하는 것이 좋겠지.”

이런 정보를 그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이준 측에서는 레스토랑 탐색 및 예약이 이미 끝난 뒤였으니 크게 상관없었다. 그것도 서울 야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월드 타워 최상층 레스토랑으로 말이다.

“선배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시우의 말에 승리감에 휩싸여 있던 이준의 표정이 사뭇 굳었다.

“무슨 소리지?”

“이전에도 레스토랑을 대절해서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다지 반응이 특별하지는 않았어.”

“…….”

그러자 이준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에 파지직 실금이 번졌다. 이전에도 그 애랑 단둘이 레스토랑을 대절해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

“선배는 오히려 평범한 것을 더 좋아하지는 않을까 싶은데.”

시우가 중얼거렸다. 이준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평범한 것이라면?”

“촛불 이벤트라거나.”

“아,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때 그런 게 유행하긴 했었지. 한 35년 전쯤이려나.”

“…….”

“…….”

또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옛날 가요 방송을 자주 찾아보시니 90년대 가수들을 불러 모아 콘서트를 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필요한 것을 사게 하는 건 어때. 소비만큼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일도 없지.”

“선배는 돈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어.”

“돈이 아니라 선물. 은하는 상대의 마음을 알아줄 줄 아는 애니까.”

“글쎄. 그런 거라면 차라리…….”

어느덧 두 남자는 머리를 맞대고 30분째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슬슬 카페가 영업을 종료할 시간. 카페 내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제휘와 캐서린은 유리창 너머로 자신들의 상사를 힐끔힐끔 살폈다.

“음, 뭘 하시고 계신 걸까요?”

“분위기가 상당히 진지한 것 같은데, 이번에 상대했던 조디악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사망자가 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큰 전투였으니까요.”

“……카페 직원에게 말해 조금만 더 양해를 구해 보겠습니다.”

콧잔등 위 안경을 살짝 올린 캐서린이 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곳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들더니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근처 직원에게 다가갔다. 제휘는 그 봉투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저 멀리 봉투를 건네받은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벗었던 앞치마를 도로 입으며 간판 불을 끄고 카페 입구의 ‘Open’ 팻말을 ‘Close’로 뒤집었다.

그리고 캐서린과 제휘를 향해 더는 없을 정도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편히 계십시오, 손님!”

* * *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은하는 늘 그렇듯 가장 먼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신착 메시지가 2건. 은하는 차례대로 그것을 확인했다.

[백이준] [오전 7:53] 은하야, 혹시 오늘 시간 돼?

하나는 백이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파란눈] [오전 8:10] 선배, 일어나면 연락 주세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신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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