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5)화
(205/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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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사막에 핀 얼음꽃 (4)
2023.02.21.
‘도련님, 마스터를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자리에 걸맞는 인재가 되셔야 합니다. 도련님께 걸린 기대가 얼마나 큰지, 도련님께서 가진 그릇이 얼마나 넓은지, 제대로 인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늑대의 외아들로 태어난 시우가 늘 들어 왔던 말이다. 처음에는 무리해서 까치발을 들어 가면서까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보며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왜 백야의 아들로 태어난 거지?
나는 왜 늑대를 물려받아야만 하지?
나는 왜 억지로 몬스터를 상대해야 해?
신수는 어째서 나를 화신으로 선택한 거지?
모든 것이 운명이고 사명이었지만 그중 무엇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없었다.
그런 시우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선택’이란 것을 하게 된 건 아마도…… 선배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녀 역시 주어진 운명과 사명에 짓눌린 처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에 가족을 잃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동료를 잃었으며, 벼랑 끝까지 내몰린 결과 혼자 언노운 게이트에 남아 30년이라는 세월마저 잃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선택’했다. 자신이 옳다 하는 길을 믿고, 싸우고, 나아갔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시우는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나도 당신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언젠가 당신 곁에 설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
* * *
지혈 겸 독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상처 부위를 억지로나마 얼음으로 감싼 시우였으나,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채앵─!
챙, 챙, 채앵─!
시우는 얼음 창을 손에 쥔 채 그것을 검처럼 휘둘렀다. 그러나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예가임의 꼬리에 닿는 순간 얼음은 유리처럼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얼음 창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물줄기를 생성해 예가임에게 쏘아 댔다. 얼음보다 살상력이 낮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말이다.
‘설마…….’
얼음 방벽 속에 갇혀 있던 은하는 그 과정에 서 번뜩 깨달았다.
시우 정도 경험이 있는 헌터라면 충분히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예가임에게 단단한 꼬리가 있는 이상, 얼음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도 계속하여 얼음창을 소환하고 있다는 건…….
‘얼음은 눈속임일 뿐이라든가?’
은하는 얼음 방벽 너머로 시우와 예가임의 전투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즉 신시우의 목적은─.’
쉬이이익, 철썩!
틈이 날 때마다 예가임을 향해 뻗어 나가는 물줄기. 바로 저것이 목적일지도 몰랐다.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은 갔다. 예가임의 몸은 모래로 되어 있고, 모래는 물을 머금을수록 무거워진다. 그것을 이용하여, 시우는 놈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은하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현재 시우의 부상은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했고 이어지는 체력과 마력 소모에 온전히 서 있기도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은하를 둘러싸고 있는 얼음 방벽이 표면부터 서서히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신시우는…….’
은하는 얼음 방벽에 손을 가져간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불꽃을 이용해서 얼음 방벽을 녹인 다음 전투에 합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은하의 손끝으로 파지직, 미약한 흑염이 피어올랐다.
‘조금만 저를 믿어 주세요.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부탁합니다.’
“…….”
그러나 불꽃은 이내 다시 사그라들어 버린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시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그가 말한 ‘인정’이란 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은하가 나가면 시우는 다른 의미로 ‘패배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은하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도중에도 예가임과 시우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언제까지 물장난을 할 셈이지?”
예가임이 젖은 머리카락을 훌훌 털며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 선 시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복부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일부 녹아 버린 상처 부근의 얼음을 다시 얼리며, 그가 미간을 좁혔다. 저 정도의 마력 사용도 이제는 벅찬 것이다.
“속셈은 대충 알 것 같군. 물을 이용해서 내 움직임을 더디게 할 생각인가 본데, 칭찬 정도는 해 두지.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하지만 인간.”
예가임은 저벅저벅 시우에게 다가갔다.
“내가 완전히 젖어 움직이지 못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네가 지쳐 쓰러지는 게 먼저일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소리를 냈다.
“마력 소모로 쓰러지든 그 신경독이 퍼져 내 유희거리가 되든 어차피 끝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그냥 포기하고 내게 몸을 내어주는 게 어떠냐, 응? 너 정도라면 저들보다 훨씬 예뻐해 주마.”
“닥쳐.”
쐐애애액!
시우의 왼쪽 어깨에서 날카로운 고드름이 생성되어 예가임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가임은 살짝 목을 옆으로 꺾는 것만으로 그것을 가볍게 회피했다. 이어서 기다렸다는 듯, 구렁이처럼 굵은 물줄기가 잇따라 놈을 덮쳤으나,
‘얼음 공격 다음 물 공격. 슬슬 지루하군.’
예가임은 꼬리를 이용하여 촤악! 물줄기를 둘로 갈라 버렸다.
후드득…….
물방울이 사방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예가임이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매섭기는.”
저벅, 저벅.
시우와 예가임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얼음 방벽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은하의 마음 또한 점차 초조해졌다.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결심에 조금씩 실금이 번지며 사그라들었던 검은 불꽃이 손끝에서 다시금 서서히 피어나는데,
힐끔.
시우가 은하에게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
시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은하는 덜컥 움직임을 멈추었다. 괜찮습니다, 선배. 그 미소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위기는 은하가 움직임을 멈춘 그때,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어느덧 시우의 코앞까지 다가온 예가임이 오만하게 턱을 들고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스슥─
예가임의 등 뒤로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전갈 꼬리가 소리 없이 움직인 찰나, 은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시우!”
타앙!
양손으로 강하게 얼음 방벽을 내리치는 순간, 예가임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놀이는 끝이다.”
파지짓!
예가임의 꼬리가 시우의 복부에 닿았다. 상처 부근에 덮어 두었던 얼음이 산산조각 나며 한 번 관통되었던 복부에 또다시 깊숙이 꼬리가 박힌다.
주르륵─
시우의 턱 선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뚜욱,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꼬리가 복부에 대못처럼 박힌 이상, 시우 입장에서는 더 이상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이다.
“신시우! 당장 이 얼음 치워! 신시우!”
지금이라도 당장 저 꼬리를 잘라 내어 둘을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화르륵! 은하가 흑염을 거세게 피워 냈다. 그녀를 가리고 있던 얼음 방벽이 녹는가 싶더니,
촤아악!
곧 그 앞에 단단한 모래로 된 창살이 바닥으로부터 올라와 다시금 은하를 가두었다. 예가임의 짓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네 차례는 다음이니까.”
예가임이 힐끗 은하를 향해 눈짓했다.
‘젠장!’
아직 완전히 녹지 않은 얼음 방벽. 거기에 더해 모래 창살까지. 흑염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양산까지 이용해서 일격에 부숴야 하나?
양산을 완전히 부러뜨릴 각오를 하고, 은하가 그것을 손에 쥔 순간이었다.
“크읏……!”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시우가, 예가임과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도리어 팔을 뻗어 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시우가 노리고 있는 ‘틈’이었던 것이다.
같은 공격을 반복하며 시우는 자신이 세운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은하의 말대로 예가임의 몸은 모래로 되어 있었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
공격을 하거나 물건을 쥐듯 무언가에 ‘접촉’해야만 할 때 놈의 몸은 모래에서 보통의 신체로 변화한다. 그러니까─.
“……?!”
이번에는 과연 그도 놀란 걸까. 예가임의 눈이 크게 뜨이는 순간, 시우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그를 강하게 껴안았다.
재빨리 모래로 변화하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예가임이 덜컥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우의 복부에 꽂힌 꼬리. 그것이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으드득, 예가임이 어금니를 갈았다. 시우는 피가 묻은 입술 끝을 희미하게 들어 올렸다.
“얼음보다 파괴력이 애매한 물을 그저 마력 낭비를 위해 쏟아부었을 줄 알고.”
시우는 예가임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스스슥─
시우의 머리카락이 온전한 백발로 물들고 어깨와 목, 팔뚝을 타고 서서히 얼음이 번져 간다. 시우로부터 피어난 얼음은 예가임에게까지 착실히 퍼져 나갔다.
급속 냉각.
그 아무리 단단한 물질이더라도 얼음에 가두어져 얼음째로 부숴 버리면, 유리처럼 깨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
예가임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지만 시우의 복부와 자신의 꼬리가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시우가 두 팔로 자신을 감싸듯 속박하고 있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졌, 다고……?’
예가임의 뇌리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결론이 번뜩하니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새하얀 서리를 머금은 목소리로 시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놀이는 끝이다.”
[얼티메이트 스킬(Ultimate Skill) ▶ 설화만개(雪花滿開)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경고. 잔여 마력이 부족합니다. 상태 이상 ‘탈진’이 우려됩니다.]
[확인하셨습니다.]
채애애애앵─!!!
시우의 전신 돌연 눈부신 푸른빛으로 물들더니, 곧 그의 신체 형태를 따라 새하얀 얼음이 마치 눈꽃처럼 흐드러지듯 피어났다.
날카로운 얼음 꽃잎은 예가임의 전신을 일격에 뚫었다. 놈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커다랗게 뜬 눈으로 벌집이 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 이…….’
송곳만큼 날카로운 얼음에 뼈와 살이 뚫렸으나, 뚫린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냉각되며 피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투명하고 거대한 얼음 꽃이 마치 온몸을 감싼 듯 신비롭다 못해 고결한 광경이었다.
설화만개.
얼음을 다루는 시우가 지난 3년간 갈고닦은, 상대방을 천년설에 가두어 버리는 궁극적 기술이었다.
이 기술로 만들어 낸 얼음은 천년이 지나도 녹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차가웠다.
다만 대량의 마력을 요구하는 데다, 아직 완벽히 숙달하지 못한 탓에 빙(氷) 속성 계열 내성이 거의 한계치에 가까운 시우조차 한기에 집어 먹힐 정도로 위험한 기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설화만개야말로 지금 사용해야만 하는 유일무이한 필살기.
투욱…….
투명한 얼음 꽃 위로 예가임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지만 동공의 초점이 사라진 것이 보였다.
이어서 주변에 두둥실 떠 있던 눈알 형태의 구체도 모래알이 되어 공중에 바스스 흩어졌다. 모래로 된 이 성도 점차 무너질 모양인지 땅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긴…… 건가?’
모래성을 뒤덮은 시린 추위.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희미하게 번졌다.
은하의 눈앞에 설탕처럼 하얗고 작은 가루가 송이송이 떨어져 내렸다. 싸늘한 한기에 이곳에 머물러 있던 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은 것이었다.
은하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내려앉은 그것은 피부에 닿자마자 사르륵 녹아 버린다.
“선배.”
멀지 않은 곳에서, 메마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우였다. 은하는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슥…….
공간의 온도가 뚝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널브러진 얼음 창, 은하를 감싸고 있던 얼음 방벽 등 얼음으로 된 모든 것이 완전히 녹기 시작했다.
얼음 방벽과 함께 은하를 가두고 있던 모래 창살 역시 스르륵 재처럼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신시우!”
타닷!
은하는 시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른 얼음들은 모조리 녹아내리고 있는데, 시우와 예가임을 둘러싼 이 얼음 꽃만은 꽁꽁 얼어 도저히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양산을 이용해 얼음을 깨부수려고 했지만, 곧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불꽃이었다. 일반 불꽃이 아닌, 그보다 강력한 흑염이라면 이것을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은하가 얼음 꽃 일부에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그대로 흑염을 불러내기 직전, 은하의 손 위로 피투성이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선, 배…….”
빛을 잃은 흐릿한 청안이 그녀를 향하더니 더듬더듬 다른 한쪽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은하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자신의 옷을 슬쩍 올려 주었다.
“……어깨, 다 보이잖아.”
멈칫.
불꽃을 만들어 내려다 말고, 은하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와중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작게 중얼거린 은하가 미약하게 인상을 썼다. 슬쩍 힘을 주어 시우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는데, 시우 역시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제가…… 선배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런 긴박한 순간에 왜 그런 것을 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제게 고정된 푸른 눈동자는 대답을 갈구하듯 지독히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 무척.”
잠시 고민하던 은하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신시우. 네 덕분에 다치지 않았어.”
내 덕분…….
그 순간 시우의 입술이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만족스럽다는 듯, 안도했다는 듯, 그의 눈매가 봄볕에 흰 눈이 녹아내리듯 편안하고 포근하게 휘어졌다.
“다행…… 입니다.”
지금까지 시우의 미소를 스치듯 여러 번 봤지만, 어쩐지 은하는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그의 진짜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띠링.
[별의 추락. 《백랑》에 의해 네뷸러 제8궁, 천갈궁(天蠍宮)이 봉쇄됩니다.]
황폐한 사막에 비로소 찾아온 새하얀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