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4)화 (204/306)


#204. 사막에 핀 얼음꽃 (3)
2023.02.20.


10, 9, 8, 7…….

시간이 점차 흘러갔다. 시우의 경고대로 예가임의 하반신을 감싼 얼음은 녹기는커녕 점점 더 단단하게 굳으며 스멀스멀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제 하반신을 감싼 얼음을 응시한 채 꿈쩍도 하지 않던 예가임이 돌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야.”

이윽고 그가 뚝 하니 웃음을 멈춘 순간.

“──네가 이딴 얼음 따위가 아니라 다른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말이지.”

채앵!

그를 속박하고 있던 얼음이 거짓말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난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시우는 반사적으로 왼쪽 팔을 뻗어 은하 앞을 막으려 하는 동시에 오른쪽 팔로 제 눈을 보호했다.

“선배, 조금 더 멀리 물러나 계십시오. 여긴 내게 맡기고.”

“너…….”

은하는 곧장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말끝을 흐렸다. 마주친 그녀의 두 눈은 마치 ‘괜찮겠어?’ 하고 묻는 듯했다. 시우가 예가임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시우는,

“괜찮습니다. 저도 많이 따라왔으니까.”

지난 3년이라는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나라고 아무런 각오도 없이 여기에 서 있는 게 아니란 소립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시우의 주변에 파바밧! 얼음으로 된 기다란 창이 여러 개 생겨났다.

쐐애애액!

그것들은 허공에 남은 얼음 파편들을 모조리 튕겨 내며 예가임에게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얼음 창이 직격하기 바로 직전, 예가임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이 보였다.

‘피하지 않았어?’

시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다음 순간, 시우는 제가 만든 얼음 창이 예가임의 신체를 꿰뚫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저 녀석의 몸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 물리적인 공격은 거의 효과가 없다고 보면 돼.”

시우의 뒤쪽에서 은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놈의 신체가 모래라면 전투가 상당히 까다로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무적’이라는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시우는 알았다.

몇 년 전, 귀훈이 시우를 시험하겠다며 해외 유명 헌터를 데리고 왔다. 그중 ‘웨더’라는 싱가포르 출신의 헌터는 정해진 구역 내에서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시우가 물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전투 구역을 사막화시켰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우는 불리한 상성을 가진 적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연구했다.

──물론 수확은 있었다. 그 덕분에 체내 수분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모래의 약점을 이용할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으니까.

“꽤 잘 만들어진 얼음이군. 형태도 경도도 훌륭해.”

발밑에 떨어진 얼음 창을 주운 예가임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며 심심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이런 걸로는 날 쓰러트릴 수 없다.”

콰드득─

예가임의 손에서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피나는 훈련과 수행, 그리고 연구를 통해 능력을 갈고닦고 기술을 연마하여도 결국 얼음은 얼음.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시우는 어린 나이에 당당히 S급 헌터에 등극했다. 훌륭한 출신, 뛰어난 재능, 신수의 화신이라는 위치도 있었지만…….

“그런 것 같군.”

시우의 주변에 다시 한번 한기가 모여들었다. 이번에 그가 생성한 것은 얼음 창이 아니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슈우우욱!

시우의 등 뒤에서 그의 신장보다 더욱 큰 파도가 일어났다.

‘……물?’

예가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자는 얼음뿐만 아니라 물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조금 놀라웠다.

한 헌터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야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은하의 흑염이 그랬다. 그녀가 사용하는 건 화속성과 암속성, 두 가지 속성을 가진 불꽃이니까.

그러나 두 가지 고유 능력을 가진 경우는─.

휘익!

예가임은 재빨리 공중으로 튀어 올라 저를 덮치는 파도를 회피했다. 그런데.

촤아악!

파도는 각도를 달리하지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바닥을 뒤덮었고 그 탓에 주변으로 엄청난 물벼락이 튀었다.

예가임은 분명 공격을 피했고, 사방이 모래인 탓에 대부분의 물은 금방 흡수되어 버렸지만 워낙 많은 양의 물이었다. 그 모든 수적(水滴)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젖어 버렸군.”

뚜욱, 뚜욱…….

예가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타고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얼굴을 포함한 상체 절반 이상이 흥건했다.

만약 이곳이 모래로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사방이 이렇듯 건조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물길에 휩쓸려 엄청난 수력에 의해 벽에 처박히고 말았을 것이다.

예가임은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느슨히 쓸었다. 다행히 이것은 평범한 물인 듯했다. 만일 이 물에 독이나 산(酸)이 섞여 있었다면 신체 일부가 녹아 버리는 등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테다.

“난 추운 게 딱 질색인데.”

그리 중얼거린 예가임이 스르륵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눈이 희번덕 빛나는 순간.

“신시우, 뒤!”

은하가 외쳤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콰악!

“……!”

은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 깜짝할 새 시야에서 사라진 예가임이 졸지에 시우 뒤에 나타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전갈 꼬리로 그의 복부를 그대로 관통해 버린 것이었다.

“윽……!”

시우의 입에서 짧은 신음과 함께 붉은 피가 터지듯 흩어졌다. 흰 셔츠 위로 새빨간 핏자국이 물감처럼 번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 아래 상처가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은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슈욱, 팟!

예가임은 시우의 배에 꽂혀 있던 꼬리를 거두었다. 꼬리 끄트머리의 날카로운 가시에서는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잘도 피했군.”

예가임이 다소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일격에 보내 버릴 생각이었는데, 일말의 틈을 탄 시우가 몸을 비틀며 급소를 피해 버린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뭐 상관없어.’

예가임이 슬쩍 입맛을 다셨다. 그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뾰족뾰족한 치아가 드러났다.

인간치고 저 정도 실력을 가진 자는 많지 않다. 한 번에 두 가지 고유 능력을 가진 자는 더더욱. 저 녀석을 ‘그릇’으로 만든다면, 꽤 쓸 만할 것이다.

방금 전 공격으로 몸에 신경독을 주입해 두었다. 몸 전체에 독이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 그가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목 부근에 ‘표식’을 새기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저 인간도 그의 장기짝이 될 것이다.

─닥터 플랜트나 트릭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신시우, 괜찮아?”

한편 은하는 시우의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뒤에서 보아도 그의 어깨가 괴로운 듯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아스트 때도 그랬지만, 조디악의 신체 능력과 전투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방금도 그랬다. 눈앞에서 사라졌나 싶더니 뒤에서 나타나 복부를 찌른 예가임. 그것은 S급 헌터인 시우마저 순간적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은하는 양산을 손에 쥐었다. 구부러진 양산은 조금만 더 휘두르면 빠각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별수 없었다.

‘역시 내가─.’

내가 해야만 해.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선배.”

시우가 은하를 불렀다.

“괜찮으니 걱정 마시고 거기 가만히 계세요.”

복부로부터 독이 퍼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상처는 둘째 치고 주변 피부가 불에 덴 듯 뜨겁고 따끔따끔했다.

상처 부근이 저릿한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무언가 뜨끈하고 진득한 액체가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뻗어져 나가는 듯한 감각 또한 느껴진다. 아마도 독의 일종인 듯했다.

시우는 찢어진 옷가지를 슬쩍 들춰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손으로 슥, 피를 닦자 상처 주변에 작고 붉은 점이 다수 올라와 마치 문양 같은 형태를 이뤘다.

‘트릭스터의 목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지, 아마.’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몸 전체로 독이 퍼져 나가면 위험하리란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스르륵. 시우가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감쌌다. 목을 긁는 듯 사납고 낮은 한숨을 내쉰 뒤,

스스스─

그의 손바닥 주변으로 새하얀 한기가 피어올랐다.

무얼 하려는 거지? 은하는 시우의 손끝을 주목했다. 예가임은 시우의 몸에 주입한 신경독을 과신하고 있는 것인지, 굳이 그를 방해하지 않고 그저 그 모습을 느긋하게 주시했다.

‘설마 상처 부위를 통째로 얼려 버리려는 건가?’

은하의 예상은 적중했다.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던 복부가 차갑게 식는다. 급속 냉각.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시우 나름의 최대한의 조치였다.

“말했잖아요. 아무런 각오도 없이 여기에 서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너, 배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힐끔, 시우의 시선이 또 한 번 은하를 향했다. 핏자국이 선명히 남은 입매를 휘며 그가 웃었다.

“선배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

그 순간 은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우연히 각성하여 그 귀하다는 자연 계열, 그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라 할 수 있는 화염 능력을 얻은 후 누군가가 이렇듯 자신을 지켜 주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은하가 기억하는 한 그런 적은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이 슬프거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상대보다 자신이 더욱 잘 싸울 수 있었고, 잘 버틸 수 있으니까. 자신이 가장 선두에 나서는 것이 효율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전투 도중 이렇게 누군가의 등 뒤에 있어 보기는, 은하의 긴 헌터 생활 속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쁘다거나 먹먹하다거나 그런 것과는 사뭇 다른…… 조금 어색하면서도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비록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은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신시우, 그만하면 됐어.”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가 망가지기 직전인 양산을 들었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이것을 습득한 이후, 전투할 때에는 거의 손에서 놓지 않았던 녀석이다. 쥐기만 해도 양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드레스도 마찬가지고, 은하의 체력 역시 만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시우는 예가임의 공격으로 큰 부상을 입었다. 지금 상태로는 시우보다는 자신이 예가임을 상대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나을 것이다.

그에게서 조디악에 관련한 정보를 얻는 것 따위 이제 바라지도 않았다.

‘혹시 여기서 죽더라도, 적어도 녀석을 같이 데려갈 수만 있다면 원천 봉쇄는 성립된다.’

예가임의 죽음은 곧 민주와 마을 사람들의 해방. 만일 여기서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시우가 이준 일행과 합류하기만 한다면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효율. 은하가 늘 그렇게 따지는 전투 상의 효율이었다.

“내게 맡기고, 넌 여길 나가서 백이준을 찾아.”

예가임이 소환한 모래 눈알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저것이 환영이 아니라면, 이준 일행은 아직 탑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맡기라고?’

……또다시?

그의 푸른 눈이 꿰뚫듯 은하를 향했다. 마치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그가 슬쩍 웃었다.

“아뇨, 선배.”

스스슥, 은하의 눈앞에 두꺼운 얼음 방벽이 세워졌다. 그것은 마치 유리관처럼 은하의 사방을 감쌌다.

평소였다면 당장 불을 소환하여 이것을 단숨에 녹여 버렸겠지만 지금은 그조차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은하의 불꽃 탓에 예가임에게 향하는 시우의 공격마저 상쇄될 것이다. 그의 공격은 얼음이나 물이 기반이니 말이다.

“신시우.”

은하가 당장 이것을 치우라는 듯 탕! 하고 두꺼운 얼음을 두드렸다. 그러나 시우는 얼음 방벽을 거두지 않았다.

“과격한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선배. 하지만 조금만 저를 믿어 주세요.”

“…….”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부탁합니다.”

──그래야 내가 나를, 조금이나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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