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0)화
(20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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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별의 냄새
2023.02.16.
날이 밝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은하 일행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만 간밤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어제와는 달리 친절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일부는 불안한 얼굴이었고, 일부는 두려워하는 얼굴, 또 일부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허탈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은하도 이준도 아닌 민주였다. 마을 사람들의 중심에 선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도 똑같은 흉터가 있다며 웃통을 벗어 보였다.
이후 민주는 이대로 벌벌 떨면서 지낼 바에는 감시자와 맞서 싸우자며 주민들을 독려했다. 자신은 군단이라는 길드의 우두머리이며, 당신들의 앞날은 군단이 책임질 것을 약속하겠다고.
확실히 군단은 그럴 만한 힘과 자본력이 있는 길드였다. 다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금시초문일 터. 민주의 노력에도 마을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든 것은─.
‘나는 싸울래!’
민주와 함께 공을 차며 뛰놀던 여자아이 ‘53’이었다. 동그란 눈을 부릅뜬 아이는 양손으로 조그맣게 주먹을 쥔 채 말했다.
‘난 여기서 나가서, 오빠가 말하는 바다라는 걸 보고 싶어!’
아이에게 용기를 얻기라도 한 듯, 마을 사람들도 점차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더는 이곳에서 이름도, 기억도 없이 살고 싶지 않아.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어디가 됐든 이곳보단 나을 거야.’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감시자를 무슨 수로 상대해?’
‘맞아. 우리는 싸울 줄도 모르고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데. 그건 그냥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잖아.’
그들의 말이 옳았다. 은하 일행을 덮칠 때에도, 마을 사람들이 챙겨 온 무기란 호미 따위의 농기구나 주변 돌멩이가 전부였다.
만일 은하 일행이 마음먹고 그들을 ‘토벌’했더라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감시자는 은하 일행과 다르다.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실패한 주민들에게 물불 가리지 않고 ‘형벌’을 내릴 것이다. 그 형벌은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일 수도 있고, 사지를 절단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기억을 삭제당하고, 또 다른 이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겨우 마을을 이루고 서로를 의지하며 추억을 쌓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괜찮아!’
불안해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민주가 방긋 웃었다.
‘무기를 만드는 건 내 전문이니까.’
돌멩이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적당한 소재를 구한 다음, 거기에 민주의 상상력과 고유 능력을 조금만 더하면…….
[패시브 ▶ ‘토끼의 떡방아’ 활성화. 즐거운 일은 즐거워! 당신의 상상력이 형태로 빚어집니다.]
장난감이든 무기든 수제비 반죽 뜯듯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살상력이 굉장한 무기의 경우 그에 맞는 신체 능력과 전투 능력을 가진 자만이 다룰 수 있겠지만, 은하 일행이 함께하는 이상 그 정도 무기까지는 필요 없을 테다.
민주는 남성 주민들에게는 창이나 방패, 검을 쥐여 주었고 여성 주민들에게는 멀리서도 전투를 지원할 수 있는 활대와 화살을, 그리고 용감한 꼬마 전사들에게는 토끼가 그려진 작은 소형 폭탄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이 오전의 일이었다.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을 사람들은 마치 민주를 그들의 리더처럼 따르고 있었다.
‘아니, 리더라기보다는…… 촌장이 맞나?’
은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민주를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빠, 이거 그냥 던지면 돼?”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나쁜 놈이 오면 그 녀석한테 던지는 거야. 돌멩이로 연습해 보든가.”
“이, 이렇게?”
“오, 잘하네. 나름대로 느낌 있었어. 너 커서 괜찮은 헌터가 되겠는데.”
“정말? 그럼 나도 궁당에 들어갈 수 있어?”
“궁당이 아니라 군단.”
“형, 나도! 나도 봐 줘!”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길드의 수장인 이유, 그리고 패밀리들이 그를 가족처럼 사랑하고 따르는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 멀리, 이준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끝까지 민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스스로 나서서 마을 주민들을 훈련시켰다. 주변의 곤충이나 짐승을 페로몬으로 꾀어 와 마을 주민들의 모의 전투 상대로 만드는 등, 꽤 열심이었다.
“어젯밤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요.”
그늘에 앉아 민주와 이준의 모습을 응시하던 은하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어제 은하 일행에게 마실 물과 집을 제공해 주었던 여인이 은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으켰다.
“자주는 아니지만, 밤이 되면 스스로의 의지와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어요. 우리는 그걸 ‘명령’이라고 부르죠. 달이 어두운 날에는 제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복종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감시자 때문인가요?”
“……네.”
무겁게 답한 여인이 속눈썹을 낮게 내리깔았다.
“이 마을은 아주 오래전부터 55명 이상 주민이 늘어난 적이 없답니다. 그 이상 늘어나게 되면 머릿수를 줄이도록 ‘명령’이 내려오거든요. 반대로 병이나 사고로 인원이 줄어들게 되면, 다음 날에는 자연스레 한 명이 늘어나 있어요. 우리처럼 목에 흉터를 가진, 기억과 이름을 잃은 사람이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 과정을 반복해 왔는지, 여인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했었다고. 민주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는.
“사실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아요. 우리가 여길 나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런 무기로, 과연 우리가 감시자를 쓰러트릴 수 있을지.”
여인은 민주가 건네준 활과 화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두려움을 품은 그녀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은하가 물었다.
“감시자를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네, 감시자는─.”
여인이 입술을 달싹이던 때였다.
쿠구구구구…….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마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을 근처에 있던 마른 나무가 굉음을 내며 부러지고, 집 지붕을 위태롭게 받치고 있던 돌기둥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꺄악……!”
휙!
여인 위로 지푸라기로 된 지붕이 쓰러져 내리는 순간, 은하가 팔을 뻗어 여인을 감쌌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을 위로 들어 무너져 내리던 지붕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가, 감시자예요……!”
은하의 품에 안긴 여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따라 은하의 시선 역시 서서히 올라가 하늘에 닿았다.
쿠구궁─
세 개의 달이 걸린 하늘이,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쩌억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하늘이 갈라진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실제로든 매체를 통해서든, 그동안 은하가 봐 왔던 그 어떤 자연재해와도 다른 풍경이었다.
갈라진 하늘의 틈새로 검고 작은 점들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까마귀일까? 아직 거리가 멀어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은 마치 벌집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벌 떼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무수한 검은 점이 아니었다.
‘저건…….’
은하는 제자리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두꺼운 구름이 지나기라도 하듯 마을 전체가 어두운 그늘로 뒤덮인다.
모래로 만들어진 커다란 눈알.
태양보다 거대한 그 눈알이, 갈라진 하늘 틈새에서 동공을 크게 확장한 채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주민들이 말하던 감시자가 틀림없다고, 은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으아아악!”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은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겁에 질린 아이들에게로 날개가 달린 검은 눈알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방금 전, 하늘의 틈새에서 쏟아지던 그것들이었다.
“진정하고 다들 내 뒤로 와! 내가 신호를 주면 동시에 폭탄을 던지는 거야. 할 수 있지? 거기 아저씨들, 뭐 하고 있어? 어서 창 들지 않고! 우선 이놈들부터 뚫어야 해!”
민주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선두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다.
‘나도 합류해야 해.’
은하가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띠링, 소리와 함께 커다란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퀘스트에 실패하셨습니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눈앞에서 깜빡이는 시스템창 위로 또 하나의 창이 겹쳐 떠오른다.
[27층 클리어에 실패하셨습니다.]
‘뭐……?’
퀘스트의 실패가 곧 탑 클리어의 실패라는 소리야?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시스템창이 한 번 더 떠오른다.
[경고. 곧 공간이 붕괴됩니다.]
평소의 푸른 시스템창과는 다른, 불길할 정도로 새빨간 시스템창이었다. 아직 감시자를 쓰러트리기는커녕 조디악의 흔적도 찾지 못했는데, 이대로 끝이라는 말인가?
‘누구 맘대로.’
은하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은하야!”
저 멀리서 주민들을 훈련하고 있던 이준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뛰어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은하가 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던 지붕을 번쩍 들어 올렸다.
“괜찮아? 다친 곳은?”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이분을 부탁해.”
은하는 제 품에 안겨 있던 여인을 이준에게 맡겼다.
두 개로 갈라진 하늘은 먹을 칠한 듯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검게 물든 것이 아니라 검은 눈알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었다.
황금빛을 띠던 사막의 모래가 마치 화산재처럼 시커멓게 변했으며, 민주의 바주카 소리로 추정되는 굉음이 펑펑 연달아 들려온다.
아비규환 속 불쾌한 냄새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모래인지 재인지 모를 가루가 시야에 온통 휘날리는 가운데, 둘로 갈라졌던 하늘에 빗금이 번지더니 마치 산산조각 나는 유리처럼 깨지기 시작한다.
챙, 채재쟁─!
문자 그대로 공간이 ‘붕괴’되고 있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여인의 안전 확보를 부탁받은 이준은, 덜덜 떠는 그녀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트릭스터의 말로는, 공간이 완전히 붕괴하기 직전에 잠시 탈출의 틈이 생긴다고 해. 그때가 이곳을 벗어날 유일무이한 기회고, 그걸 놓치면 영영 이곳에 갇힌다고.”
“…….”
“……은하야?”
은하는 이준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턱을 치켜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이준도 그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하늘을 시작으로 바닥도, 나무도, 심지어는 허공에조차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은하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저 멀리 남쪽의 균열이었다.
이준은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신기루?’
깨진 공간의 틈새로 뾰족한 건물이 보였다. 모래로 만들어진 작은 성처럼 보이는 그것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저런 것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첫째는 그저 신기루일 가능성. 그리고 둘째는…….
‘공간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숨겨져 있던 다른 공간이 엿보이고 있는 건가.’
눈매를 좁힌 이준이 다시 힐끔 은하를 확인했다. 은하는 드레스 허리춤을 감싸고 있던 리본을 스르륵 풀더니 그것을 이용하여 긴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었다. 그 과정에서도 단 한 번도 저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준은 눈치채고 말았다.
“은하, 너 저기로 갈 생각이야?”
“그래.”
공간이 붕괴되고 있는 지금, 몬스터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며 전원 무사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이란 것은 은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그들이 무사 탈출하게 되면, 그것이 정말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탑 내부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주와 로제는 종종 정신을 잃고 타의에 휘둘렸다.
즉 민주와 마을 사람들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원천 봉쇄가 필요해.’
휘오오오─
불어오는 모래바람. 그 속에 희미하게 섞인 불쾌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냄새는…… 틀림없다. 아스트에게서도 맡았던, 그 체취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저곳에.’
──조디악.
예가임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