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9)화 (199/306)


#199. 네뷸러의 주민들 (3)
2023.02.15.


“으으…… 죽어……!”

휙!

무언가 은하의 눈앞으로 재빠르게 날아왔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피했다. 칼 따위의 무기일 줄로만 알았는데,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진 그것은 그저 평범한 돌멩이였다.

휙! 휘익!

돌멩이가 이어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도예에나 쓰일 만한 진득한 진흙 덩이도 함께였다. 그러나 맥없이 날아드는 그것들을 피하는 일은, 은하나 이준처럼 단련된 헌터에게 매우 쉬운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은하는 시선을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깊은 밤,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농기나 삽 등을 들고 있는 자들도 보였다.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무래도 그들은 은하 일행이 잠든 사이 습격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이준의 말대로 시스템창에서 말한 ‘적’이란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 맞았던 모양이다.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아스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으아아아!”

어린아이가 은하에게 다가와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낮에 민주를 졸졸 따라다니던 소녀였다. 특별히 피하거나 받아치지 않아도 솜방망이 같은 아이의 주먹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떡할 거야?”

제게 날아드는 공격을 손쉽게 회피하며, 이준이 은하에게 물었다.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다음 진행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찌 됐든 퀘스트 클리어가 강요되는 상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습격을 위해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온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레벨 5 몬스터를 해치우는 일보다 쉬웠다. 즉 힘을 들이지 않아도 55명의 ‘적’을 단숨에 정리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에단처럼 이곳 사람일 수도, 지구에서 이쪽으로 흘러들어 온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은하와 다를 바 없는 인간. 게다가 고유 능력도 가지지 못한 비각성자.

그런 그들을 상대로 S급 헌터가 힘을 휘두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설령 상대가 탑 속 인간이라고 할지언정.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걸어왔던 헌터의 길에 반(反)하는 행동이나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뭐야, 이게 대체.”

뒤늦게 집에서 나온 민주가 상황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 사람들은 은하 일행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은하의 명령이 떨어지길 대기하고 있던 이준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힐끔 시선을 돌렸다.

“은하야, 네가 하지 못하겠으면 내가 할게.”

이준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백이준.”

그런 그를, 은하가 저지했다.

“이 사람들을 재울 수는 없어?”

이전에 민주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은하와 아연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짜고짜 공격해 왔을 때, 에단이 민주를 재우면서 일이 일단락되었다.

이미 지배당한 대상에게 매혹을 덧씌울 수는 없겠지만, 페로몬 능력을 이용해 수면에 빠트리는 방법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그 후에는 어쩔 생각인데? 너도 알겠지만 상태 이상 ‘수면’으로는 ‘지배’나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나도 알아.”

짧게 답한 은하가 다시 한번 이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부탁해.”

얼핏 보아 은하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지만, 이준은 알았다. 그녀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상대로 힘을 휘두르는 것을.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준은 달랐다.

지난 30년간 이준은 꽤 많은 경험을 했다. 어떤 업계이든 일부에선 물이 고이기 마련이었다. 헌터계라고 다를 것 없었다. 특히 S급들의 영역은 더 그랬다.

은하를 잃고 이준이 겪어 온 헌터계는 그다지 숭고하거나 깨끗하지 못했다. 때로는 몬스터보다 같은 인간을 적으로 둔 적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 눈앞의 이 상황은, 이준에게는 그다지 망설일 만한 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이준은 스르륵 장갑을 벗었다. 그가 허공에 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선홍빛을 띤 빛무리가 블랙홀 형태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은하는 익숙한 듯 소매를 입과 코에 가져갔다. 그리고 뒤에서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민주에게도 말했다.

“민주야, 코.”

은하와 민주가 각각 코를 막은 직후, 진한 페로몬 향기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직접적으로 닿은 대상에게만 능력을 쓸 수 있지만 단순히 수면을 명하는 정도라면, 그리고 눈앞의 마을 사람들처럼 내성이 0에 가까운 민간인들이라면 굳이 신체 접촉까지도 필요 없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준의 옅은 금발이 작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잠들어라.”

이준이 ‘매혹’된 대상에게 짧게 명했다.

“아, 안 돼……. 감시자가 올…….”

“감시자님! 감시자님! 아, 안 돼……!”

감시자? 은하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털썩…… 털썩…….

페로몬에 취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렇게 모두를 잠재우는 데에 걸린 시간은 단 10초도 되지 않았다.

이후 은하와 이준 그리고 민주 세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연히 사안은 퀘스트에 대한 것, 즉 마을 주민들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들은 해가 뜰 즈음에는 깨어날 거야. 처리한다면 그 전이 좋겠지. 그들에게도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몰라.”

은하 일행을 공격하던 마을 주민들은 괴로운 듯 목 부근의 흉터를 피가 날 때까지 벅벅 긁거나 ‘감시자’를 외치며 겁에 질린 것처럼 울부짖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이제 그만 편하게 만들어 주자. 이준은 그렇게 말했다.

“…….”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은하 이상으로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민주는 이준이나 은하보다 훨씬 더 그들과 가까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민주 역시 프로 헌터다. 이 이상 탑 공략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퀘스트 클리어가 필수 불가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준의 의견에 아무 반발도 하지 못한 걸 테고.

날이 밝기까지 아직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 은하는 어둑어둑한 하늘을 확인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우선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은하야, 네 맘은 알겠지만 퀘스트를 완료하려면 주민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 이제 확실해졌잖아. 시스템이 말한 ‘적’이란, 틀림없이 저들이야.”

이준의 말에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주민들이 감시자라는 이야기를 했어. 어쩌면 저 사람들을 미끼로 그 감시자라는 존재를 불러올 수 있을지도 몰라.”

우선은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자. 은하는 그렇게 말했다.

그 결정을 받아들인 이준은 수면 상태인 마을 사람들을 지켜본다며 그 곁에 머물기로 했고, 은하는 집 근처에서 감시자에 대한 생각을 했다.

‘미궁에서의 미노타우로스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그 녀석을 처리하면, 주어진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고도 억지로 다음 층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도박이다. 만일 실패한다면 탑 공략은 수포로 돌아가고 조디악도 만나지 못한 채, 아무런 수확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영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 떨어진 움막 뒤쪽으로 민주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딜 가는 거지?’

혹시 민주도 마을 사람들처럼 또 지배 상태에 빠지는 건가? 은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민주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민주는 움막 뒤쪽에 위치한 나무 그루터기 위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 누나.”

은하를 발견한 민주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민주가 입술을 달싹였다가 도로 닫았다. 할 말을 고르는 듯 데굴데굴 굴러가던 시선이 이윽고 툭, 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마에스트로랑 누나는 탑에 진입한 게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제가 좀 더 경계하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마을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고 있더라고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은하는 민주의 흉터가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민주가 사리 분별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까닭은, 아마 목덜미 부근의 흉터가 원인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민주는 막상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 꼬마, ‘53’이라고 한대요.”

“53?”

“아까 저랑 같이 공을 차고 놀았던 여자아이의 이름이요. 아까 우리한테 마실 것을 내어 주고 집도 빌려준 그 아줌마 기억해요? 그 아줌마 이름은 ‘17’이래요.”

민주는 낮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은하에게 전해 주었다.

55명의 마을 사람들은 다들 이름이 숫자로 되어 있었다. 1부터 55까지, 나이나 성별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요, 그 17 아줌마는 53의 친엄마가 아니래요. 난 당연히 모녀간일 줄 알았는데. 여기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는지, 서로가 어떤 사이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대요. 이름도 출신도 기억하지 못해서, 그냥 서로를 적당히 숫자로 부른다고 해요.”

그렇게 살다 보니 가족이 되었대요. 민주가 중얼거렸다.

그제야 은하는 깨달았다. 은하, 이준과는 달리 민주가 마을 사람들과 더 빨리 가까워졌던 이유에 대해서.

민주는 가족이 없었다. 하지만 ‘패밀리’라고 부를 군단 길드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성별이나 나이, 출신을 따지지 않고 서로를 가족처럼 여겼다. 아마 민주는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군단을 본 것일 테다.

“누나, 난 저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 않아요.”

민주가 말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민주의 진짜 속마음이겠지.

“하지만 마에스트로 말이 맞다는 것도 알아요. 탑 공략을 진행하려면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할 테니까. 그냥, 생각이 많아졌어요. 내가 저 사람들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다를 바가 없다니?”

은하가 되묻자 민주는 자신의 옷깃을 슬쩍 열었다. 목덜미의 타투처럼 선명한 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나도 언제 누나를 공격할지, 패밀리들을 공격할지 모르잖아요.”

“민주, 너─.”

알고 있었던 건가. 은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라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언젠가 이름도 기억도 모조리 잊게 될까요?”

아, 그건 싫은데. 민주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했다. 가벼운 듯한 어조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은하는 그런 민주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민주가 앉은 그루터기에 살며시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무섭니?”

민주가 스르륵 시선을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네, 두려워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

“네 말대로, 어쩌면 저 사람들처럼 너 역시도 그렇게 될지도 몰라.”

은하가 무심한 어조로 뱉은 말에 민주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은하는 말투를 바꾸지 않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네……?”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잊었니?”

“……아뇨. 잊지 않았어요.”

“다행이네. 그럼 이것 또한 기억해.”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민주에게 똑바로 고정되었다.

“넌 군단의 마스터, 패밀리의 보스야.”

“…….”

“패밀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이곳에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적어도 그 이유가 이곳에 한심하게 앉아 낙담하고 있기 위해서는 아니었겠지. 은하가 덧붙였다.

민주의 눈동자가 일순 미약하게 흔들렸다. 고민하듯 슬그머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민주가 신음과 비슷한 목소리를 흘렸다.

“저는…….”

* * *

밤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잠든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이준. 그 곁으로 두 쌍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은하와 민주였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준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났나 보네.”

“그래.”

은하 대신 민주가 그에 답했다. 이준의 은회색 눈동자가 민주에게 닿았다가, 은하에게 닿았다가, 다시금 민주에게 돌아갔다.

“……어떻게 할 거지?”

“퀘스트를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야.”

결국 이런 결론이 나올 것을 예상한 바였다. 이준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을 높낮이 없이 읊었다.

“또다시 이들이 습격해 오면?”

“내가 책임지고 사람들을 제압하겠어.”

“퀘스트는 어쩔 거지?”

“사람들이 말한 감시자라는 놈을 기다릴 거야. 그 녀석을 쓰러트리면 다른 공략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지배’를 풀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볼 생각이고.”

“…….”

가만히 민주의 이야기를 듣던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다음은?”

큰 키의 이준이 시선만 아래로 내리깔아 민주를 낮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만에 하나 네 말대로 이들이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면, 그다음은 어쩔 거지? 탑 밖으로 데리고 나갈 셈인가? 그런다 해도 이미 늦었어. 이 사람들은 정상으로 살 수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자신감은 좋군.”

이준이 픽 웃었다.

“그렇다면 감시자는 어떻게 할 거지? 마을 사람들은 감시자를 두려워하고 있어. 즉 감시자는 우리가 아닌 마을 사람들을 목표로 정하고 이곳에 나타날 확률이 높지. 우리가 ‘감시자’를 처치한다고 해도, 그게 어느 정도 레벨일지, 몇 마리일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어. 그런데 우리 셋이서 55명이나 되는 주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 낼 수 있다고, 넌 단언할 수 있나?”

그러나 민주는 이미 다 정해진 일이라는 듯 가뿐하게 입을 열었다.

“주민들에게 ‘감시자’와 맞서 싸우기를 설득시킬 거야.”

“어이가 없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 삽이나 곡괭이 따위를 들고 싸우는 그들이, 과연 감시자를 상대하려고 할까?”

이준이 의심스러운 듯 눈매를 좁혔다.

“백이준, 그 점에 대해서는…….”

은하가 나서서 이준을 설득하려던 때였다. 민주가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으며 은하를 저지하고는, 다시 이준을 향해 말했다.

“그건 내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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