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8)화 (198/306)


#198. 네뷸러의 주민들 (2)
2023.02.14.


돌기둥 위에 얼기설기 올린 지붕은 말린 짚 따위로 대충 햇볕만 차단한 수준이었지만 뙤약볕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목마르시죠? 이것 좀 드세요.”

누군가 은하에게 다가왔다. 키가 크고 마른 여인으로, 민주를 잘 따르던 귀여운 소녀의 어머니였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다가온 그녀는 이준과 은하에게 각각 잔을 건넸다. 나뭇잎을 동동 띄운 미지근한 물이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잔을 받긴 했지만, 은하는 그것을 입에 대지는 않았다. 힐끔 시선을 들어 올리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준 역시 물을 마시는 척하다 은근슬쩍 아래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은하는 잔을 손에 쥔 채 느릿하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돌과 짚 등 흔하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그러모아 겨우 집 흉내만 낸 건물이었다. 소박한 외견에 흙바닥이나 벽면에는 돌로 긁어 새긴 듯한 문양이 빼곡했다. 자세히 보면 탑 입구, 그 거대한 문에 새겨져 있던 문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무늬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여인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은하는 이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

두루뭉술한 질문이었으나 충분했다. 은하가 그랬듯 주변을 훑어보던 이준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수상해.”

“……역시 그렇지?”

“눈치챘어? 여기 사람들, 눈에 초점이 없다는 거.”

그건 은하 역시 진즉에 깨달은 점이었다. 다만 은하의 경우, 그들에게서 발견한 특이 사항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더운 날씨 탓인지 그들의 옷은 상대적으로 얇고 반투명한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탓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옷가지가 하늘하늘 나부꼈다. 어린아이나 남성의 경우 아예 웃통을 벗고 있는 자들도 더러 보였다.

그러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목덜미에 흉터가 있어.”

은하는 입가에 잔을 가져갔다. 여전히 마시지는 않았다. 여인의 호의를 생각한 최소한의 배려일 뿐이었다.

‘흉터……?’

은하의 말에 이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집 근처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향해서였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아이에게서 공통적으로 목덜미 부근의 붉은 흉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슬쩍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서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에게도,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오아시스 근처에서 물을 떠다 나르는 여인들에게도,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뻐끔뻐끔 연기를 뿜어 대는 노년 남성에게도, 같은 자리에 유사한 형태의 흉터가 보였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으로 안내해 주던 꼬마 아이를 스쳐 지나가듯 보았을 때, 목 언저리가 붉은 것을 목격하긴 했지만 그저 벌레에 쏘였거나 강한 햇살에 피부가 붉게 익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확실히 이렇게 보니, 은하의 말대로 마을 주민 모두에게서 붉은 흉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은하에게는 이준에게 한 가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민주에게도 그들과 동일한 자리에 붉은 흉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은하는 자연스럽게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들도 혹시…….’

──민주처럼 어떤 존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예가임.’

잔을 쥔 은하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맞게 찾아온 듯한 직감이 들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영문을 모르겠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 우선 이곳에 왜 이렇듯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퀘스트는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였다.

“그 퀘스트라면 나도 확인했어요.”

어린아이들과 공을 차고 놀던 민주가 어느새 은하와 이준 곁에 다가와 앉았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통통한 뺨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의심 하나 없이 그저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리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은하는 민주에게서 이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백이준, 너도 확인했어?”

“……그래, 내게도 시스템창이 떴으니까.”

확인 결과, 민주와 이준에게도 은하와 동일한 퀘스트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55명의 적을 섬멸하라는 내용의 퀘스트 말이다.
잠시 말문을 닫았던 은하가 다시 물었다.

“발견된 몬스터는?”

“없었어.”

“한 마리도 못 찾았어요.”

그렇다면 그 퀘스트는 도대체…….

은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빠아!”

저 멀리서 한 소녀가 우렁찬 목소리로 민주를 불렀다. 공을 손에 든 채 옹기종기 모여 민주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어, 금방 갈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민주를, 이준이 턱 하니 붙잡았다. 휙 뒤돌아본 민주가 왜 붙잡고 난리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저 사람들…… 아니, 이 마을의 정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아. 섣불리 가까워지는 건 좋지 않을 듯한데.”

이준이 경고하듯 말했다. 그 말에는 어느 정도 은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무슨 소리야? 어떻게 봐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인데.”

탁!

민주는 저를 붙잡은 이준의 손을 쳐 냈다.

“아저씨는 모르겠지만, 탑을 다니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거든. 이 사람들은 탑에 말려든 것뿐일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럼 아저씨는 무얼 확신하는데?”

민주가 사납게 받아쳤다.

패밀리와 은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되바라지게 구는 민주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더욱 날카로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이 다시 한번 민주를 불렀다. 민주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홱 등을 돌리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

은하의 눈이 사뭇 커졌다. 민주가 등을 돌리던 그 짧은 찰나 보고야 만 것이었다.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목덜미,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붉은 흉터를 말이다.

* * *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은 이방인의 방문을 환영하며 조그마한 축제를 벌였다. 사실 평소보다 조금 호화로운 식사를 준비한 정도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평소 물 한 모금도 귀히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축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통으로 구워진 양인지 돼지인지 모를 고기, 완전히 정화되지는 않았는지 조금은 뿌연 빛깔의 물, 무엇으로 담갔는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향의 술, 그리고 조금 마른 풀과 열매가 코스 요리처럼 잇따라 준비되었다.

화려한 색깔의 천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들이 모닥불 주변을 빙그르르 돌며 춤을 추고, 그 곁으로 젊은이들이 북처럼 생긴 악기를 신나게 두들겼다.

낮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무르익은 분위기 탓인지 견딜 만했다. 다만 낮과 마찬가지로, 은하와 이준은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때도 이랬어.”

은하는 화르륵 타오르는 모닥불과 그 주변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이준이 문득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이 비춘 은하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소 심각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 말이야?”

“언노운 게이트를 통해 조디악이 있는 네뷸러로 이동되었을 때.”

아스트를 따라 백색 신전으로 향했던 은하는 그곳에서 그의 수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따듯한 식사는 물론, 갈아입을 옷과 푹 쉴 수 있는 개인 방, 심지어는 꽃잎을 동동 띄운 따듯한 목욕물까지 말이다. 은하가 그곳을 방문한 ‘첫 손님’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던가.

‘당신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초의 방문객. 전 예의를 지키려고 했습니다만, 먼저 거부한 것은 당신입니다.’

아스트에게 습격당하고, 그대로 미궁에 갇혀 버렸다. 물론 그 덕분에 에단을 만났고 에단의 도움으로 미궁도 네뷸러도 벗어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문제없었지만 어쨌든 뒤통수를 맞은 것은 사실.

“아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

은하가 낮게 읊조리자 이준이 무언으로 그녀에게 동감했다.

저 멀리 여인들을 따라 춤을 추는 민주가 보였다. 저렇게 있으니 그들 사이에 완전히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은하와 이준은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롭고 즐거워 보이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끝까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가고 모두가 잠들 시각이 되었다.

주민들은 은하와 이준, 민주에게 빈집을 내어주었다. 이런 초라한 마을에 넓고 호화로운 집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아늑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빈집이 두 채는 없었던 탓에 주민들은 천막을 이용해 작은 방을 둘로 나누어 주었다. 왼편에는 은하의, 오른편에는 이준과 민주의 이부자리가 준비되었다.

주민들은 모두 잠이 든 모양인지 마을 전체가 고요했다. 은하는 흙냄새가 나는 이불을 무릎에 덮은 채, 창문 너머로 사막의 밤 풍경을 응시했다.

하늘에 걸린 세 개의 달. 아스트 때와 같았다. 아직까지 이곳에서 고양이의 흔적은커녕 조디악이 있는 곳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하루를 보내도 되는 걸까.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가 바깥에서는 일주일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아직 퀘스트에 대한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마음이 급해진 은하는 퀘스트창을 열어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다.

[현재 수행 중인 퀘스트 ▶ 적을 섬멸하십시오. (0/55)]

숫자는 여전히 0.

게다가 그곳에는 보통의 퀘스트와는 달리 성공 시 보상이나 실패 시 페널티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별다른 장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면, 탑 공략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그런데 왜 하필 55마리일까.’

10마리도 100마리도 아닌, 뭔가 애매한 숫자. 이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퀘스트창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도중,

“은하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불투명한 천막 너머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넘어가도 될까?”

“그래.”

그리 대답하자 두 공간을 가르고 있던 천막이 스르륵 움직이며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준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55마리를 처치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거든.”

그도 은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은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숫자 55가 의미하는 게 있을까?”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봤어. 그리고 아까 마을 중앙에서 축제를 벌이는 동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봤지.”

“확인하다니 무엇을?”

이준이 잠시 입을 닫았다. 창문 틈을 타고 흘러 들어온 달빛에 그의 옅은 금발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 아래, 이준의 은회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이 말한 ‘적’이란 이 사람들인 것 같아.”

이 사람들.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준은 지금 이곳 마을 사람들이 ‘적’, 그러니까 그들이 쓰러트려야 할 몬스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대신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마을 사람들의 인원이 딱 55명이야. 그리고…….”

이준이 연이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카앙─!

날붙이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집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은하와 이준은 동시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의 어깨 위로 검은 불꽃이 팟!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고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집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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