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7)화 (197/306)


#197. 네뷸러의 주민들 (1)
2023.02.13.


탑 내부 ???층.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가운데 우뚝 세워진 모래성은 태양빛을 받아 황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창문은커녕 성문조차 위치하지 않은 특이한 구조, 성곽 하나 없이 우뚝 솟은 모양새, 고깔모자처럼 날카롭게 솟은 지붕은 사실 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뾰족탑에 가까운 형태였다.

성의 가장 높은 곳. 햇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는 황금을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왕좌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 나른하게 상체를 기댄 채, 팔걸이에 받친 팔에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남자. 지루한 듯 아래로 내려가 있던 입꼬리가 어느 순간 빙긋 호선을 그렸다.

“왔군.”

성의 주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이 성 전체가 그의 목소리가 반응하듯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모래알들을 한데 모아 뭉친 것 같은, 눈알처럼 동그란 형상이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중앙의 화면이 마치 CCTV처럼 다른 곳의 풍경을 선명하게 송출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새까만 머리카락, 화려하고 긴 검은 드레스, 레이스가 달린 검은 양산.

헤드 헌터 1위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서서히 왕좌에서 일어났다. 귀에 달린 무거운 황금 머리카락이 찰랑, 금속음을 내며 흔들렸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모래로 된 눈알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바스스 소리를 내며 동그란 구체가 그의 손아귀에서 문드러졌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보며, 그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일단은 유희(遊戲)가 우선이겠지.”

* * *

[월드 동기화 46%…….]

[월드 동기화 73%…….]

[월드 동기화 99%…….]

띠링.

이어서 시스템창이 몇 개 더 떠오른 뒤, 은하 일행은 탑 내부로 완전히 진입할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보인 것은 커다란 태양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황금빛 모래였다. 뜨거운 공기에 마치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휘이이이─

모래 먼지가 뒤섞인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막?’

은하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귀 뒤로 넘기며 눈을 깜빡였다.

탑 내부의 풍경에 대해서는 막연하게나마 아스트와 에단을 만났던 그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싱그러운 초원 위 눈부신 백색 신전. 그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런 류의 장소일 거라고 말이다.

‘층수마다 맵(Map)의 형태가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이토록 다른 공간일 줄이야.’

다만 아스트가 있던 곳처럼, 이곳도 일반 게이트의 풍경과는 달리 하늘이 있었다. 게이트 내부 혹은 탑 내부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온 듯한 감각이었다.

네뷸러 출신인 에단은 이곳에 대한 것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그를 데리고 온 데에는 길잡이 역할을 기대한 까닭도 있었다.

“에단, 이곳은…….”

문득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은하는 에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에단?”

은하가 주변을 살폈다. 민주와 이준은 분명 그곳에 있었다. 땅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솟은 건지 오직 에단만이 모습을 감춘 듯했다.

‘낙오된 건가?’

그러나 탑 문을 열 당시에는 분명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낙오된 것이라면 도대체 언제?

“혼자만 다른 곳으로 이동될 가능성도 있나?”

이준이 민주를 보며 물었다. 가장 어리지만, 세 사람 중에서는 유일하게 탑 진입 경험이 다수 있는 헌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여태 없었는데. 입구까지 왔다가 무서워서 꽁무니를 뺐다든가?”

민주가 헹, 하고 비아냥 섞인 코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에단이 탑이 무서워서 도망쳤다니,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찾아야 해.”

은하가 말했다.

민주와 이준은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쨌든 함께 탑으로 진입한 이상, 동료는 동료였으니 말이다.

“우선은 그 사람도 찾을 겸, 주변 탐색부터 시작해요. 이건 게이트를 토벌할 때랑 마찬가지죠.”

탑 공략에 있어서는 은하와 이준보다 선배인 민주가 선두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나 주변 탐색이라도 해도…… 이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도대체 무얼 찾아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곳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도 없었다. 공략 방식을 찾아내든 에단을 찾아내든 어쨌든 움직여야만 했기에.

“그럼 적당히 찢어져서 몬스터나 클리어에 도움이 될 만한 장치 같은 걸 찾아보는 게 어때?”

은하의 말에 민주가 “찬성!” 하며 손을 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그럼 누나는 나랑…….”

“은하야, 가자.”

이준과 민주가 동시에 은하 곁에 섰다. 말꼬리가 맞물리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휙 하고 쳐다보았다.

이렇게 또 옥신각신이 시작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하는 언쟁이 짙어지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셋 다 흩어져서 탐색하는 게 빠를 거야. 보아하니 단말기로 외부까지 신호를 보낼 수는 없지만, 작동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네.”

혹시 몰라 챙겨 온 무전기는 탑에 진입하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작동하지 않았지만 단말기는 달랐다.

단말기를 꺼내 든 은하가 삑, 삑, 몇 번 버튼을 누르자 민주와 이준의 단말기가 삐리리 울렸다. 그렇다면 흩어진다 하여도 소통에 문제는 없을 것.

“무언가 발견하면 곧장 신호를 보내기로 하고. 난 동쪽을 맡겠어.”

그러고는 이준과 민주를 번갈아 보며 각각 지시했다.

“백이준 너는 서쪽. 민주는 북쪽을 맡아.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셋이 다시 모여 나머지 남쪽을 알아보자.”

필요한 말만을 전한 채 은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은 이준이 기억하는 분대장 시절의 은하와 너무도 똑같아서 이준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몇 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경례를 할 뻔했으니까.

두 사람과 잠시 떨어진 은하는 홀로 사막을 걸었다. 결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땅을 걸을 때마다 뾰족한 구두 굽이 푹푹 아래로 꺼지는 것이 신경 쓰였던 탓에 결국 구두를 벗어 버렸다.

일반인이라면 태양의 온도를 흡수한 모래에 맨발이 닿는 순간 살이 익어 버렸겠지만, 높은 화 속성 내성치를 가진 은하에게 이 정도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편이 훨씬 편하네.’

한 손에는 양산을, 다른 한 손에는 구두를 쥐고 살짝 자세를 낮춘 뒤,

‘달린다.’

은하가 일순 번쩍 눈을 떴다.

슈우우욱!

그리고 이어지는 전력 질주.

뜨겁게 달아오른 대기를 가로지르며,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낀다. 온 피부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주변을 재빠르게 스캔. 빠르게 이동하는 은하가 사막 위 새까만 잔상을 그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에단이나 몬스터, 특별한 장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아시스 비슷한 장소라도 발견할 줄 알았다.

그러나 5분, 그리고 10분이 흐를 때까지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곳에는 피부를 뚫는 듯 따가운 햇볕, 황금빛 모래, 정말 그것밖에 없었다.

‘동쪽은 꽝이었나.’

제자리에 멈춰 선 은하는 단말기를 확인했다. 두 사람 역시 S급 헌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 역시 지금쯤 각자의 방향으로 은하만큼 먼 거리까지 가 있을 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민주와 이준에게서는 아직 신호가 없었다. 즉 서쪽과 남쪽도 아마 꽝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단말기를 도로 집어넣은 은하는 저 멀리 광활하게 이어지는 사막을 멀거니 응시했다.

‘조금 더 가 볼까?’

……아니면 우선은 두 사람과 합류하고 남쪽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띠링!

익숙한 소리와 함께 푸른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적을 섬멸하십시오. (0/55)]

퀘스트? 그러고 보니 탑에서 간혹 등장하는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다른 층으로 갈 수 있고, 특히 운이 좋다는 가정하에 바로 최상층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었다.

실제로, 인마궁을 클리어한 심안 은유엘도 해당 방법으로 최상층에 도달하여 조디악을 쓰러트렸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적이라니.’

게다가 55마리나?

은하는 잠시 시스템창에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하고 뜨거운 태양과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진 황금 모래뿐이었다.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도 몬스터 특유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쭈욱 확인한 은하는 다시 한번 시스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이 퀘스트는 뭐지? 미간을 좁히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삐리리리…….

단말기가 울렸다. 은하는 그것을 꺼내 단말기 화면에 떠오른 간단 좌표를 확인했다.

[North ↑ 488, 966.]

북쪽. 민주로부터 온 신호였다.

은하는 주저 없이 좌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뛰었다. 간단 좌표인 만큼 그것에만 의지했더라면 민주에게 도달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나, 은하에게는 추적 기능이 달린 특별한 펜던트가 있었다.

그것을 이용하여 이준보다 훨씬 빨리 민주가 있는 곳에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

목표 지점에 도착한 은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 일순 당혹감이 서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못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오아시스와 그 곁의 작고 아담한 마을이 보였으니까. 동쪽으로 쭉 내달리는 내내 은하는 전혀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초가(草家) 사이로, 은하가 아는 얼굴이 불쑥 튀어 나왔다.

“어, 누나. 엄청 빨리 왔네요?”

조금 전 단말기를 이용해 은하에게 신호를 보냈을…… 민주였다. 그는 웬 터번을 머리에 둘둘 둘러매고 있었는데, 귤색 머리카락과 붉고 화려한 색상의 터번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다만 잘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민주의 차림새가 낯설었던 은하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아, 이거요? 이거 하면 햇볕을 받아도 정수리가 덜 뜨겁다길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은하의 말에 민주가 싱긋 웃으며 초가 쪽을 휙 가리켰다.

“이 사람들이 빌려줬어요.”

은하의 눈길이 민주의 손끝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그제야 기둥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대여섯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주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은하를 경계하기라도 하는 듯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주는 그들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다들 겁먹지 않아도 돼. 이 누나, 내 패밀리니까.”

“패밀, 리……?”

기둥 뒤에 완전히 가려져 있던 조그마한 소녀가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에 초콜릿처럼 어두운 피부, 오동통한 뺨에 흩뿌린 듯한 주근깨가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래, 패밀리. 너랑 너희 엄마처럼 가까운 사이.”

민주의 부연 설명에 소녀가 살짝 턱을 들어 치마폭으로 저를 감싸고 있는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커다란 눈을 또르륵 굴려 은하와 민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하! 그렇구나!”

햇살처럼 밝고 따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천진한 반응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성, 파이프를 입에 문 남성, 그 외에도 어린아이,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은하와 민주 곁으로 모여들었다.

뒤이어 이준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민주와 은하가 마을 사람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여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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