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5)화
(195/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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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돌고 돌아 다시 그때처럼
2023.02.11.
그로부터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은하는 탑에 진입하기 전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다. 협회에 내는 ‘탑 진입 요청서’의 구비 및 제출은 제휘가 대신하였으니, 사실상 은하가 해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탑 진입 전에 드레스를 수선할 만한 자를 수소문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제휘의 추천으로 일정이 맞고 평판이 괜찮은 제작 길드는 다 돌아다녔지만, 드레스를 만져 본 제작 헌터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백이준] [오후 7:06] 은하야, 어디야?
탑 진입까지 이틀 남은 시점에서 은하는 이준과의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도 할 겸, 탑 진입 전에 필요한 사항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 [오후 7:07] 로비.
[나] [오후 7;07] 바로 올라가면 돼?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메시지창 옆 숫자 1은 금방 사라졌다.
[백이준] [오후 7:07] 내가 내려갈게.
몇 분 후, 이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에게서 진한 샤워 코롱 냄새가 났다. 급하게 내려온 걸까, 그의 머리카락이 미약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오는 길 괜찮았어?”
“택시 타고 오니 금방이더라.”
“택시? 매니저는?”
“사적인 일에는 굳이 매니저님을 부르지 않아서.”
옛 동료와 저녁 약속에까지 제휘를 불러 운전기사 노릇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준은 “너답네.” 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이준이 머무르는 방은 호텔의 최상층에 해당하는 32층이었다. 평소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오늘따라 로비로부터 최상층까지 향하는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엘리베이터와 같이 밀폐된 공간에 은하와 단둘이 가만히 서 있으려니, 어쩐지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준은 괜히 젖은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도 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도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은하가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비닐 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은하야, 그건…….”
“아, 이거. 김윤례 할매 국밥. 오는 길에 포장해 왔어.”
국밥이 포장된 봉투를 슬쩍 들어 보이며 은하가 덧붙였다.
“너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좋겠다 싶어서……. 좋겠다 싶어서…….
그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이준의 뇌리와 귓가를 마구 휘저어 댔다. 별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이 그러지를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준은 32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혼미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호텔 방에 도착해 있었다.
“들어와.”
몇 걸음 앞서 걸어간 이준이 문을 열어 주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싸고 호화롭다는 호텔 최상층 방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이름도 번쩍번쩍한 프레지던셜 스위트(Presidential Suite). 1박에 천만 원을 가볍게 넘는다는, 귀빈실 중 귀빈실이었다.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응접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거실이었다. 벽면에는 100인치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LED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반대쪽 벽면 전체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 야경이 멋들어지게 눈에 들어왔다.
그 밖에도 통로 왼쪽에는 개인 금고가 딸려 있는 서재가, 오른쪽에는 침실이 두 개, 그에 딸린 욕실과 샤워실이 각각 하나씩. 게다가 저 뒤쪽에 문이 몇 개 보이는 것으로 유추하건대, 남는 공간이 더 있는 듯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내부가 더욱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오늘 은하가 방문하기 전 이준이 손목을 걷어붙이고 구석구석을 정리 정돈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몰라도 될 일이었다.
은하가 사는 곳 역시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초고가 오피스텔이지만 이곳은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호텔 내부 풍경을 확인한 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던 거야?”
“숙소는 한국에 오고 몇 번 옮겼어. 여긴 세 번째. 조만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거고.”
거치대에서 적당한 와인을 꺼낸 이준은 은하가 포장해 온 국밥과 와인 잔을 함께 테이블 위에 나열했다.
국밥과 함께 마실 음료로 그다지 적합한 선택이 아니었으나, 이건 은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기도 하고 적당히 달콤 쌉싸름한 녀석이니 은하 마음에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막상 흑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고급 테이블 위에 우아하게 세팅된 와인 잔, 그리고 소머리 국밥과 깍두기를 보고 있자니 그만큼 아이러니한 광경이 또 없었다.
차라리 소주를 준비할 것을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맛있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은하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을 보니, 그런 후회 따위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사라졌다.
눈앞에 있다. 흑염의 프린세스도, 흉은 안 질 거라고 했던 그녀도 아닌 은하가.
서울 야경을 등진 채 그 언젠가 같이 먹자고 했던 국밥을 뜨는 지금 이때를 위해 살아온 거라고, 그런 말을 내뱉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은 충분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은하가 자주 이야기하던 그 국밥을 같이 먹는 것만으로도.
이후 두 사람은 식사를 이어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를 30년이나 잃게 했던 그 언노운 게이트, 드레스 세트와 더불어 흑염을 얻은 일, 신시우와의 만남과 컨셉 헌터가 된 일, 그리고 네뷸러에서의 재등장까지.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이준은 외려 듣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탑에 들어가기 전에 목적을 공유하려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
“……그래서 나는 언노운 게이트와 탑, 네뷸러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은하가 비로소 마무리를 지었다. 국밥 그릇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고, 테이블 위 남은 것은 선명한 붉은 빛깔을 띤 와인뿐이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오래도록 은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준이 비로소 천천히 말문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노운 게이트와 네뷸러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열린 거고, 넌 그 통로를 통해 조디악이 있는 최상층까지 한 번에 이동한 걸 테니까.”
“어쨌든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탑 진입이 필수 불가결이야. 아니, 진입하는 걸로는 부족해.”
은하의 말에 이준이 받아치듯 입을 열었다.
“……조디악.”
“그래, 조디악을 만나야 해.”
피처럼 새빨간 레드 와인에 시선을 둔 채 은하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틀 후 있을 탑 공략에서,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조디악을 만날 생각이야.”
“또 무리하겠다는 소리네.”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은하는 와인 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필요하다면 행할 뿐이지.”
망설임 없이 던져진 한마디.
그것은 ‘은하답다’는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색소가 옅은 은회색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마에스트로는, GIA는 언제든 네 쪽에 설 거야.”
은하의 기억 속 저 눈동자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열악했던 훈련소 환경, 짧았던 훈련 기간, 헌터의 체계가 지금만큼 성립되어 있지 않던 30년 전, 이준은 항상 주눅 들어 있었고 은하의 뒤를 쫓는 것에만 급급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말릴 줄 알았어.”
은하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하는 말, 행동, 생각,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함께한 시간이 엄청나게 긴 편은 아니었지만, 둘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생사를 넘나들며 그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은하는 불현듯 깨달았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돕겠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결정한 이상 번복하지는 않을 생각이야. 꼴사납잖아.”
피식, 작은 웃음을 흘린 이준이 느른하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불쑥 다가온 낯선 느낌에 은하가 입을 닫았다. 스치듯 지나간 웃는 모습조차도, 은하가 기억하던 순수한 청년의 해맑은 미소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이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묻는다면 솔직히 추천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 조디악을 상대하는 건 단순히 게이트를 토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테니까.”
“……난이도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해야만 해.”
“그렇겠지. 하지만 난 네가 그런 것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야.”
손목을 움직여 와인 잔을 느릿하게 휘저으며, 이준은 제 속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해 나갔다.
“넌 충분히 잘해 왔고, 난 누구보다 그걸 알고 있어. 이제는 싸움에서 벗어나 다른 평범하고 귀중한 것을 누릴 자격이 네게는 있으니까. 하지만 은하야.”
작은 숨결을 느릿하게 내뱉은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런 걸 다 떠나서 네가 그 길을 걷기를 원한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리지 않을 생각이야. 이제는 알거든. 너의 강함이나 사명, 그 일에 대한 당위성,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나는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
“그 행복이 어떤 형태이든 그것이 네가 바라는 행복이라면, 그곳에 네 행복이 있다면.”
와인 잔을 휘휘 내젓던 손목이 멈추었다. 이준이 시선을 들어 다시 그 눈에 은하를 담았다.
“내가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과거에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것에 대한 답례? 아니다. 오해에 대한 속죄?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은하야, 넌 내 전부니까.’
뚫어져라 은하를 지켜보던 이준은 서서히 와인 잔을 은하를 향해 내밀었다. 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은하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후, 은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고마워, 백이준.”
찰랑─
두 와인 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비로소 오늘, 때가 되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헌터님.”
신발장까지 허겁지겁 따라나선 제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은하는 결국 공략대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은하의 목표는 탑 기록 갱신이 아닌 나비 여인의 ‘주인’을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상관도 없는 일반 헌터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S급 헌터인 마에스트로와 저…… 정체 모를 에단이란 남자가 헌터님과 함께 탑에 진입한다고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휘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시우라도 있었더라면 조금 안심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사흘 전에 스위스로 출국한 상황이었다. 일정 조율에 실패한 것이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버젓이 살아 돌아온 분이시다. 이번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실 거라 믿었지만, 그럼에도 제휘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한국의 공략 기록은 25층이라 들었어요. 지난 4차 진입 때는 B급 이하 헌터들도 공략대에 적잖이 구성되어 있었다고요.”
“…….”
“걱정 마세요. 매니저님 말씀대로, 저는 대한민국 최초 로프티 헌터이자 글로벌 랭킹 1위니까.”
금방 돌아올게요. 은하는 검은 구두를 신었다.
오랜만에 ‘흑염의 프린세스’ 세트를 전부 장착하고 외출하려니 낯선 기분이 들었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마음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기 전, 은하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돌아오면 귤은 이제 됐으니, 따듯한 어묵 탕 한 그릇 부탁해요.”
은하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이상, 더는 울상을 짓고 있을 수 없었다. 제휘는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예, 헌터님이 좋아하시는 청양 고추도 팍팍 썰어서 맛있게 끓여 둘게요.”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은하 대신 현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헌터님!”
등 뒤에서 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준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차림을 한 은하와 그 옆의 에단을 묘한 눈으로 번갈아 보던 이준은 은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필요한 건 다 챙겼어?”
그 말에 은하가 소리 없이 웃었다. 30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오른 까닭이었다.
세심한 성격인 이준은 늘 배낭 가득 짐을 싸 들고 왔다. 그의 그런 꼼꼼한 면이 실제로 도움이 된 적도 있었지만, 은하는 언제나 단출한 차림새로 임무에 임했다. 그럴 때마다 이준은 은하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었다.
‘은하야, 짐은 다 챙겼어? 군번줄이랑, 나이프랑…… 아, 그렇지. 혹시 모르니까 연막탄도 챙기는 게 좋겠지?’
그리고 은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이것만 있으면 돼.”
팟. 그녀의 손바닥 위로 새까만 불꽃이 작게 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이 픽, 웃음을 흘리고는 차 문을 열었다.
“그럼 출발할까요, 분대장님.”
목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그곳에 여덟 번째 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