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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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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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먼지 쌓인 일기장
2023.02.10.
예상치 못한 대답에 민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깐죽대듯 입을 열었다.
“그 현안인가 뭔가로 봤다는 건가? 내가 죽는 걸?”
“맞습니다.”
“……흐응.”
민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도르륵 눈을 굴리던 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근데 난 운세 같은 거 안 믿는데. 타로 카드는커녕 사주도 본 적 없단 말이지.”
“현안은 그런 것들과는 다릅니다.”
“뭐가 달라. 그리고 어차피 미래는 늘 바뀌는 거라고 하던데? 준환이 형이 그랬어.”
“……물론 바꿀 수 있죠. 그러기 위해,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고요.”
안드레아는 말을 고르듯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시선을 들어 무겁게 눈을 맞추었다.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짐작 가는 바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 순간 민주의 입가에서 미소가 스르륵 사라졌다.
떠본 것이지만 아주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시 트릭스터도 알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자신의 상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흑염의 프린세스가 귀환해 인류의 전력이 보충된 참이니, 당신의 희생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뷸러 격파가 필요하다고는 해도 게이트도 여전히 생겨나고 있고, 한국에는 이제 S급이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
“당신의 위치와 책임을 생각해서라도 아무쪼록 새겨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전할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민주를 스치듯 지나친 안드레아는 연구실 출입구 문고리에 손을 댔다.
“──내가 죽을 정도면.”
끼이익.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민주가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앞으로 탑이 지금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 될 거란 소리겠네.”
안드레아가 문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민주의 밤색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거길 누나가 들어가서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고?”
“……제가 본 미래대로라면.”
흑염의 프린세스가 귀환했으니, 이제는 두 발 뻗고 있으면 그녀가 알아서 해 줄 거라는 건가?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기고? 안드레아의 말은 마치 그렇게 들렸다.
“─그럼 누나는?”
그건 현안으로 보지 못했나? 자박, 자갈흙을 밟으며 민주가 다가왔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안드레아는 어쩐지 한순간 그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햇살 한 줄기 들지 않는 울창한 숲속, 그의 눈이 슬쩍 번뜩인 듯도 했다.
“그녀는…….”
안드레아는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러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맞은편에 서서 그를 응시하고 있던 민주의 눈이 사뭇 가늘게 변했다.
* * *
달칵─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민주였다. 은하가 연구실을 살피는 사이 안드레아와 대화를 끝낸 모양이었다.
민주를 향해 “왔어?” 하고 물은 은하는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멈칫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민주의 얼굴이 사뭇 어두웠던 까닭이다.
연구소로 막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은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생글대던 민주였다. 지금도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으나, 은하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일 있었어?”
보고 있던 자료들을 잠시 덮고 은하가 물었다. 민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딴에는 내색하지 않는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변화를 감지한 누나가 신기했다.
“어디 아파?”
눈앞까지 다가온 은하가 민주의 안색을 살폈다. 준환이나 다른 패밀리들에 비하자면 은하는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목소리도 높낮이 없이 낮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차갑다고도 느껴질 만큼 무심한 음색.
하지만 이마에 닿는 그녀의 손은 무척이나 상냥했다.
“……열이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민주의 체온을 확인한 은하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주는 팟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손이 너무 차가운 거예요.”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괜찮아요, 누나.”
민주는 은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후 민주는 본부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금방 돌아갔다. 금세 평상시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니 별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표정이 이후로도 뇌리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쌓인 이 자료들을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준은 안드레아와 이야기를 하러 갔는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먼지 쌓인 자료 보관소에 홀로 남은 은하는 다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종이 파일, 공책, 망가진 펜, 각종 도서나 망가진 USB 따위가 널브러져 있었다.
중요한 자료들은 이미 정부 쪽이 가져갔을 거고, 이곳에 남은 것들은 쓸모없다고 판단한 찌꺼기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그다지 알맹이 있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낙서에 가까운 메모나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폐지, 봐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도면들이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쓸 만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은하는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책상 위를 계속해서 뒤졌다.
그러던 중, 바닥에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서류 더미 속에 숨어 있던 얇은 공책이었다. 표지에는 아무런 문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끌리듯 그 공책을 주워 천천히 펼쳐보았다. 처음 몇 장은 텅 비어 있었다. 새 공책인가 싶어서 다시 덮어 버리려던 찰나, 펜으로 휘갈긴 듯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20─년 4월 ─2일]
눈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액체로 일부가 번져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날짜였다. 아무래도 이 공책은 일기인 것 같았다.
[나래가 보고 싶다.]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사실 일기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짤막했다.
은하는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진 뒤, 또다시 짧은 일기를 발견했다. 더 이상 날짜는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나래가 보고 싶다.
이제 곧 만날 수 있겠지.]
나래. 아마도 게이트 사고로 죽었다는 로제의 딸 이름인 듯했다. 은하는 또 한 번 책장을 넘겼다.
[오늘 나래가 웃었다.
나도 기분이 좋다.]
이상했다.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마치 죽은 딸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쓰여 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내용이 다음 장에 있었다.
[나래가 보고 싶다.]
딸을 만난 것처럼 보였는데, 또 다음번에는 딸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일기를 썼다. 아니, 그것보다……. 은하는 그 아래에 덧붙여진 문장에 주목했다.
[예가임은 이제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예가임.
낯선 단어였다. 어쩌면 누군가의 이름일지도 몰랐다. 은하는 ‘예가임’이라는 이름을 머리에 착실히 넣어 둔 뒤, 천천히 책장을 넘겨 갔다.
[오늘은 나래가 아픈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를 고쳐 줄 수 있을지 물었더니, 예가임은 과실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기를 조금 더 자주 쓰자.]
[내가 하는 짓은 잘못되었다.
이 글을 본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멈춰.]
[나래가 보고 싶다.]
[나래가 우는 것 같다.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래가 보고 싶다.]
그것이 마지막 문장이었다. 짧은 일기는 ‘나래가 보고 싶다’로 시작하여 ‘나래가 보고 싶다’로 끝이 났다.
은하는 조용히 공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것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헝클어진 머리로 잔뜩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그리 외치던 로제. 어쩌면 그녀에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인 장본인이 ‘예가임’이라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
은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비록 이 공책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단편적으로나마 로제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당시 보았던 로제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자아가 뒤바뀐 듯 아군을 공격하거나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을 했었지.
‘마치 며칠 전의 민주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역시 공통점이 있었다. 목덜미 부근의 흉터를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어쩌면 민주는 그날 언노운 게이트에서 ‘예가임’이라는 존재와 접촉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예가임’은 상위 레벨 몬스터의 명칭일까. 아니면 혹시…….
‘탑의 주인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디악(Zodiac).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은하는 스르륵 눈을 움직여 공책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낡은 공책은 얼마나 만져 댔는지 그 끝이 걸레처럼 해져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공책 끝을 매만졌다.
‘나래가 보고 싶다.’
마치 그렇게 중얼대는 로제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로제의 마지막 모습.
‘그만둬!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이 게이트는 사라지지 않아!’
‘아아, 안 돼, 안 돼……! 거의 다…… 거의 다 됐는데……!’
많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녀를 살인자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테다. 은하는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은하 역시 가족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한때는 한국 헌터계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던 그녀는 희대의 살인마가 되었고, 그녀가 이끌며 자원 봉사 등의 선행을 일삼던 장미 길드는 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터계의 블랙리스트에 영구적으로 추가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예가임.’
은하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갈라진 벽 틈을 통해 차가운 바깥 공기가 미끄러지듯 새어 들어온다.
책상 위에 쓸쓸하게 놓인 공책 한 권이 마치 흐느끼듯 파르르 떨렸다.
* * *
다음 날 저녁, 시우가 집 근처로 찾아왔다.
은하는 올라가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시우는 금방 돌아갈 것이라며 차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에단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다행히 에단이 잠든 상태였다. 은하는 겉옷만 대충 걸친 채 시우의 차에 탔다.
우선 그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연히 이준과 만났다는 지점에서 조금 삐딱해졌던 눈썹이, 로제의 연구소에 대해 말하자 곧 일자로 굳어졌다.
“예가임…… 이요?”
“그래,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혹시 어디선가 들은 적 없어?”
“아뇨, 전혀.”
잠시 입을 닫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시우가 곧 고개를 들어 힐끔 은하를 쳐다보았다.
“……에단이라는 자에게는 물어봤습니까?”
“아니, 아직.”
“그에게 물어보면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은하도 그 말에는 동감했다.
하지만 에단은 어째서인지 탑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길 꺼려 하는 눈치였다. 은하가 집요하게 물어볼 때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거나, 애매한 대답으로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더군다나 은하가 단도직입적으로 조디악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은 이상, 재차 탑이나 조디악에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이상했다. 그건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입장을 바꿔 만일 자신이 생판 모르는 곳에 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저를 끊임없이 의심한다면? 그것만큼 쓸쓸하고 외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에단의 정체가 어찌 됐든, 은하는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인류를 멸할 존재는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 쪽은 어땠어?”
은하가 물었다. 어제 시우는 자신이 대신 그의 몸을 확인해 보겠다며 에단을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있었어? 표식.”
“아뇨, 없었습니다.”
시우의 대답에 은하는 “그렇구나.” 하고 무심히 중얼거릴 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
시우가 룸미러를 통해 힐끗 은하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은하의 목소리에 미약한 안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어쨌든 시간이 얼마 없으니, 정보를 모으는 것은 이후가 되겠네.”
그러자 가라앉아 있던 시우의 눈빛이 휙 바뀌었다.
“선배, 설마 5차 탐색 전에 혼자 탑에 뛰어들 생각이었습니까?”
은하에게 나비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들었지만, 시우는 은하가 탑에 들어간다면 당연히 5차 탐색 일정에 맞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은하 생각에도 강력한 공대를 꾸리고 드레스를 수리한 다음 탑에 진입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나비 여인과 약속한 기한이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5차 탐색이 있는 날까지 기다린다면, 그사이 나비 여인을 보낸 자가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다.
은하는 덧붙여 말했다.
“앞으로 열흘 안에는 탑에 들어갈 생각이야.”
열흘? 시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시우는 약 한 달 후에 다시 스위스에 입국해야만 했다. 지난 일정이 급하게 끝난 탓에 아직 계약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은하가 베테랑 뺨치는 1세대 헌터라고 해도, 네뷸러는 일반 게이트와는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언노운 게이트에 가까웠다.
층마다 필드가 달라 어떤 구간에서는 무수히 몬스터가 쏟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몬스터가 나오는 대신 함정이나 퀘스트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이 언노운 게이트와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곳에, 공략대도 없이 혼자 들어가겠다고?
“왜? 안 될 것 있어?”
안 될 것이야 없었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현재 랭킹 1위였다. 그녀에게 전한 적은 없지만, 협회는 물론 전 세계의 헌터 업계가 그녀의 탑 진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헤드 헌터는 원한다면 공략대를 따로 꾸리지 않고도 혼자서도 충분히 탑 진입이 가능했다. 그럴 만한 권리와 자격이 있는 자리였으니 법적으로도 표면적으로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
무릎 위에 올라간 시우의 주먹이 소리 없이 쥐어졌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그녀를 보낼 생각을 하니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