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3)화 (193/306)


#193. 닥터 플랜트의 연구실
2023.02.09.


아로마 스페셜 D 사우나 6층 탈의실 로비.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제휘는 1층 카운터에서 빌려 온 부채를 부지런히 흔들어 대며 물었다. 소파에 반쯤 쓰러져 누운 시우를 향해서였다.

한여름에는 대낮에 외출조차 삼갈 정도로 더위에 약한 분이셨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 도져서 60도가 넘는 불가마에서 3시간이 넘도록 버텼던 건지.

애초에 일반인도 불가마에서 3시간은커녕 1시간조차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각성자라면 가능할 법한 이야기일는지 몰라도, 얼음과 물을 다루는 시우에게 그렇듯 뜨겁고 건조한 환경은 쥐약이었다. 그것을 시우 본인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사우나 건물 전체를 대절하더니, 그 에단이라는 자와 단둘이서 사우나에서 오래 버티기 경쟁이라도 했다는 건가? 제휘는 그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자는?”

시우가 혼미한 푸른 눈을 들어 제휘를 바라보았다. 에단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제휘는 부채질을 멈추지 않으며 답했다.

“혼자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붙일 것을 그랬나요?”

“아니, 됐어.”

짧게 대꾸한 시우는 열이 가시지 않는 이마 위로 철퍼덕 손등을 올렸다. 호흡이 뜨겁고 정신이 몽롱하다. 아직 열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뭔가 더 필요하신 건 없고요?”

“없어. 조금 더 쉬다 내려갈 테니 먼저 가서 건물 앞에 차 대기시켜 놔.”

“예, 대표님.”

제휘가 내려가고, 탈의실 로비에는 정적이 돌아왔다. 곁에 세워 둔 선풍기 팬이 위이잉 돌아가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시우는 커다란 손등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에단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신시우라고 했나?’

불가마에서 3시간을 버틴 뒤.

에단은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두 손 두 발을 든 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흥이 가셨다는 얼굴로 그가 뒤돌아보았다.

‘네가 뭘 의심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네.’

‘쓸데없는 짓이라고?’

‘이게 쓸데없는 짓이지 뭐겠어. 결국 네가 원하던 것, 확인하지 못했잖아?’

‘글쎄. 어느 정도는 확인한 것 같은데.’

시우는 펄펄 끓는 불가마 속에서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태연한 얼굴로 받아쳤다.

‘보통의 인간은, 이런 곳에서 3시간을 버티면 너만큼 멀쩡하지는 못하거든. 각성자라고 해도 말이지.’

시우의 말에 에단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갈 줄 알았던 에단은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여 물었다.

‘……왜지?’

무미건조한 말투였으나 시우를 바라보는 에단의 붉은 눈에 처음으로 미약한 흥미가 생긴 것이 보였다.

‘굳이 이런 까다롭고 성가신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 않나? 너라면.’

너라면. 그 말에 함축된 의미는 많았다. 그러나 에단은 그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곳에 서서, 시우의 대답을 기다릴 뿐.

그의 말은 옳았다. 에단의 말대로, 시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빠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기습 공격을 해서 강제로 몸의 표식을 확인한다든가.

심안처럼. 혹은 그보다 더 능숙하게.

시우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배가 원치 않을 테니까.’

눈앞의 에단이라는 남자는 선배를 도왔고, 선배는 이자를 자의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에단을 공격하는 행위는 선배의 의지에 비껴가는 일이었다.

‘선배는 이자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과 용납하는 건 별개의 문제. 이 자식 앞에서 그 말은 절대로 뱉고 싶지 않아,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턱을 든 채 가만히 시우를 응시하고 있던 에단이 툭 내뱉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너, 재미없구나.’

그의 붉은 두 눈에는, 방금 전 서렸던 미약한 흥미의 기색이 그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시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에게 재밌어야 하나?’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데.

선선하게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에 이마와 뺨에 들러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조금씩 건조해지며 부드럽게 휘날리기 시작하자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호흡도 가라앉고 타오르는 것처럼 뜨겁던 체온도 점차 안정되었다. 이 정도면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겠다.

시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결과는 하나. 그의 몸에서 표식 따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

내일 선배를 찾아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저녁에라도 당장 그녀를 찾아가고 싶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상태가 아니니까.’

시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마 속에서 너무 오래 버티다 보니 열이 올라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은, 입이 찢어져도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 * *

경기도 외곽에 있는 로제의 기밀 연구소는 이름 없는 산 중턱에 위치했다. 노란 테이프로 입구가 단단히 봉쇄된 그곳은 오랫동안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해 보였다.

“방치되어 있었던 건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필요가 있을 테니까. 사실상 GIA 멤버들은 뒤쪽으로 출입했고.”

“이곳에 너와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어?”

“포츈 텔러. 너도 이전에 만난 적이 있지?”

3년 전 서울 S호텔에서 열렸던 파티. 은하는 그곳에서 나비 모양의 반 가면을 쓴 남자를 만났다.

기억대로라면 그는 자신을 GIA 소속이라 소개했었다.

“그 사람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오늘은 여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너 말고도 오늘 이곳을 방문할 예정인 사람이 있거든.”

거기까지 말한 이준이 슥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너도 알지? 트릭스터.”

트릭스터. 민주의 이명이었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트릭스터는 닥터 플랜트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붉은 흉터가 있어. 부위도 유사하지. 그 흉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포츈 텔러가 현안으로 트릭스터의 미래를 봤다고 해.”

포츈 텔러, 안드레아에게 미래를 예지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신경 쓰이는 것은 그의 고유 능력이 아니었다.

“어떤 미래?”

“…….”

은하가 이준에게 묻자 그는 일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찰나일 뿐이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듣지 못했어.”

그렇게만 답한 이준은 은하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쪽이야.”

어쩐지 급하게 화제를 바꾼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준 본인의 일이 아닌 이상 그에게 캐묻는 것도 이상했다. 은하는 이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그를 따랐다.

이준은 은하를 데리고 연구소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통로나 출입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곤 아무렇게나 뻗은 나뭇가지와 우거진 수풀뿐이었다.

“여기로 들어가는 거라고?”

“그래.”

적당한 곳에 멈춰 선 이준이 검은 장갑을 벗었다. 허공을 향해 맨손을 슬쩍 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아아─

나뭇잎 틈새에 숨어 있기라도 했던 걸까, 어디선가 하얀 불빛을 내는 벌레들이 이준의 근처로 모여들었다. 반딧불이처럼도 보이는 그것들은…….

“‘꿈결벌레’야.”

손 주변으로 새하얀 안개꽃처럼 모여든 그것들을 바라보며 이준이 말했다. 유명한 테이머 헌터가 A급 게이트에서 습득한 유충을 현대 기술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양식한 것이라고.

“길들이기 까다롭지만 한 번 길들여 두면 결계 역할을 톡톡히 해내거든.”

“너라면 길들일 필요도 없겠네.”

페로몬 능력자인 이준은 테이머들과는 비슷한 듯 조금 달랐다.

적을 조련하여 애완동물처럼 사역 혹은 소환하는 일반 테이머와는 달리, 이준은 상대에게 ‘매혹’을 걸어 상태 이상에 빠뜨리는 형식이었다.

상태 이상이 해제되지 않는 이상, 대상은 이준의 말 한마디에 목을 매는 노예가 된다. 죽으라고 하면 당장 혀를 깨물고 죽을 정도로.

“한 번 힘을 사용하면 그대로 죽어 버리는 하루살이 같은 녀석들이지만 뭐, 평상시에는 나름대로 쓸 만해. 결계 역할을 해 주는 데다 추격자를 교란시키는 데에도 안성맞춤이라서.”

은하는 그 언젠가 묘비에서 이준을 닮은 이를 보았던 기억을 문득 떠올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를 쫓으려 했지만, 펜던트의 추적 기능이 먹히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어쩌면 이 꿈결벌레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파아앗……!

이준의 손 주변을 뭉게뭉게 떠다니던 꿈결벌레들은 생애 마지막으로 환한 빛을 뿜어내더니 이내 공중으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커튼을 걷은 듯,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통로가 이윽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곧장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왔군.”

은하도 이준을 따라 저쪽 수풀 너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바스락─

얼마 있지 않아, 그의 말대로 그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이 상당히 험하던데.”

무성한 수풀 사이로 뿅, 하고 귤색 더듬이가 튀어나왔다. 뒤이어 나뭇잎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진한 얼굴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으면 각오해, 아저씨.”

S급 헌터, 트릭스터 송민주였다. 오늘 이곳을 방문할 거라던 이준의 말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통통한 뺨에 묻어 있는 흙, 더러워진 운동화를 보아하니 꽤 길을 헤맨 모양이었다.

민주는 몸에 묻은 잎이나 잔가지들을 툭툭 털어 내더니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제야 은하를 발견한 민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누나?”

반응을 보니 민주는 은하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누나가 여기 왜 있어요? 누나도 혹시 포츈 텔러의 현안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예요?”

우다다 뛰어가 은하 품에 쏙 안기는 모습은 영락없이 천진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방금 전까지 건방지게 이준을 응시하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준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우선 들어가지. 안에서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세 사람은 수풀 사이 통로를 지나, 엄폐되어 있던 연구소로 천천히 들어섰다.

“왔구나, 요한.”

연구소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누군가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중단발에 은하보다 키가 조금 더 작은 외국인 남자는 은하와 민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 좋은 밝은 금발이 가볍게 찰랑였다. 여성의 것인지 남성의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미성. 그는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코인 형태에 날개 문양이었다.

은하는 자신의 기억 속 포츈 텔러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인상이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이 포츈 텔러?”

민주가 그를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GIA의 명성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마에스트로가 GIA의 숨은 멤버, 그것도 창시자라는 사실, 그리고 GIA의 포츈 텔러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여러 재앙을 예고했던 포츈 텔러가 이렇듯 무르고 연약한 외모의 소년일 줄이야. 자신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이 뭔데?”

안드레아를 응시하던 민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이준과 은하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리를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듯했다. 이준과 은하에게까지 숨길 정도로 말이다.

들어보고 별것도 아닌 일이라면 민주는 포츈텔러는 물론 마에스트로에게까지 온갖 생색을 낼 생각이었다.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 시답잖은 용건이었다면 굳이 얼굴까지 공개하며 자신을 이곳으로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든가.”

“그럼 가시죠.”

민주의 대답을 들은 안드레아는 통로 쪽으로 손짓했다. 그 곁에서, 이준이 은하를 향해 다른 쪽 통로를 가리켰다.

“자료 보관소는 이쪽이야.”

아무래도 민주와는 잠시 갈라져야 할 모양이었다. 안드레아를 따라 벌써 저 멀리까지 간 민주가 “좀 이따 그쪽으로 갈게요!” 하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민주도 S급이다. 상대는 이준의 동료라고 하니 큰일은 없겠지.

이후 은하는 이준과 함께 자료 보관소로 향했고, 안드레아는 민주를 데리고 기나긴 통로를 걸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민주가 의심을 품는 사이, 두 사람은 연구소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아까 이준이 개방했던 출입구 부근이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크게 범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혹시 근처를 지나는 사람이 있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는 울창한 수풀로만 보일 테니. 이준이 연구소 내부로 들어서며 다시 꿈결벌레를 이용해 출입구를 닫아 둔 덕분이었다.

“한때 정부가 압수했던 곳이니, 연구소 안에 도청 장치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의아한 얼굴을 한 민주에게 안드레아는 그리 말했다. 그는 긴말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세 달 후에 있을 5차 탐색 때, 되도록 당신은 참여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거기 가면 당신, 높은 확률로 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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