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1)화
(19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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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양보할 수 없는 것
2023.02.07.
늑대 길드 본부 20층, 길드장실.
복도를 지나치던 길드원, 관리인들은 하나같이 길드장실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유독 이곳만 기온이 낮은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그 건물에 있는 모두가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또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봐…….’
어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돌연 취소하고 사라진 그들의 마스터 백랑은 오늘 아침 일찍 본부로 귀환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길드장실로 쏙 들어가 버리더니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그곳에서 나오질 않고 있었다.
“어쩌지? 이 서류, 확인받아야 하는데…….”
“이, 일단은 보고실에 가져다 두고, 조금 이따가 다시 올라오는 게 좋겠는데.”
“음…….”
눈빛을 교환하던 늑대 길드의 동료들은 후다닥 길드장실 주변에서 벗어났다. 이럴 때 마스터의 눈에 띄면 좋을 일이 없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물론 여기서 물러나면 제때 서류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며 이후에 물벼락을 맞게 되겠지만, 지금 이 문을 여느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 것이다.
한편 길드장실 안에서는…….
“후우.”
몸이 반쯤 가라앉을 만큼 푹신하고 커다란 의자. 그곳에 반쯤 파묻혀 있던 시우가 느릿느릿 팔을 들어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차은하 선배] [오전 9:03] 목도리 가져다줘서 고마워.
은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못했다. 시우는 머뭇머뭇 손가락을 움직여 액정을 두드렸다.
[선배, 왜…….]
하지만 다시 멈추고, 기껏 써 두었던 메시지를 통째로 다시 지워 버렸다. 벌써 열 번도 넘게 반복하고 있는 행위였다.
답장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뭐라고 답장을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아직 시우의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놈 옷은 왜 벗기려고 하셨나요?’
그렇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잖아. 시우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이마를 쿵, 박았다.
그러자 번쩍 눈앞에 떠오르는 잔상 하나.
‘뭐야, 이건.’
현관으로 들어선 시우를 삐딱하게 쳐다보던 새빨간 눈동자. 에단이었다. 그는 마치 불청객을…… 아니, 도둑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우를 쳐다보았다.
물론 시우는 도둑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도리를 돌려주러 온 것이지, 그런 눈빛을 받을 만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은하를 내려 준 시우는 곧장 늑대 본부로 돌아가다가 도중에야 조수석에 덩그러니 놓인 은하의 목도리를 발견했다. 이제 막 오피스텔 단지를 벗어난 참이니, 지금 차를 돌려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한 시우는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웬일인지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목도리를 두고 온 것을 깨달은 은하가 다시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옷, 벗어 줄 수 있어?’
열린 현관 틈 사이로 들려온 은하의 목소리 탓에 뇌 속이 텅 비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그때는 워낙 충격을 받았던 탓에 유야무야 목도리만 돌려주고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지만, 조금만 이성을 되찾고 머리를 굴려 보니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선배는 그자를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조디악의 몸에 표식이 있다는 사실은 헤드 헌터, 그러니까 시스템 공인 랭킹 12위권의 헌터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디악을 쓰러트린 지구상의 유일한 헌터 심안이 그 정보를 그들에게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우는 이렇게 추측했다.
유엘과 만난 은하가 그에게서 어떠한 정보를 얻었고, 그로 인해 에단을 의심하기 시작한 거라고. 그래서 옷을…… 옷을…….
“으…….”
시우가 침음을 흘렸다. 그때 본 굉장한 광경이 눈꺼풀에 접착제처럼 들러붙어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나 아직도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워낙 타고나길 예민한 탓에 조금만 신경 쓰는 일이 생겨도 편두통이 말썽이었다.
똑똑─
꾹꾹 관자놀이를 누르던 중, 누군가 길드장실 문을 두드렸다. 이런 상황에서 겁도 없이 노크를 할 만한 자는 두 명뿐, 늑대의 전(前) 부마스터 이하균과─.
“잠시 실례합니다, 대표님…….”
박제휘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제휘는 의자에 반쯤 파묻힌 채 퀭한 눈빛을 한 시우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게…… 보고실에 쌓인 서류가…….”
노크를 할 용기는 있어도, 현 상태의 시우에게 업무를 종용할 용기는 없던 모양인지 제휘가 머뭇머뭇 입술을 우물거렸다. 시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그거라면 이따 확인할 테니 거기 둬. 곧 가지.”
“넵.”
휴, 다행이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제휘는 그대로 길드장실을 벗어나려다가 힐끗 다시 고개를 돌려 시우의 안색을 살폈다.
‘근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
오지랖으로 따지자면 실버문 매니지먼트 최고봉으로서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우리 대표님 일이니까.
“저…… 대표님, 혹시 고민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용기를 쥐어짜 내 그리 물어보았다. 사실 시우의 고민거리가 무엇일지, 제휘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차 헌터님에 관련된 일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웬만한 일은 칼처럼 싹둑싹둑 처리해 버리시는 분이 아닌가.
“…….”
시우의 푸른 눈동자가 힐끔 제휘에게 향했다. 말해? 말아? 잠시 고민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박 대리.”
“예.”
“……너라면.”
거기까지 말한 시우가 끄응,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제휘는 이어질 시우의 말을 기다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라면.”
“……너라면, 상대의 몸을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겠어?”
“예?!”
제휘가 갑판 위로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조금만 더 점프력이 좋았더라면 천장에 정수리를 박아 버렸을 것이다.
“대, 대대, 대표님, 방금 뭐라고…….”
“상대의 몸을 보고 싶을 때, 너라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어.”
제휘가 “딸꾹.” 하고 소리를 내더니 헙, 입을 닫았다. 맙소사.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제휘의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대표님이, 설마, 우리 대표님이……?
화등잔이 된 눈으로 멀거니 시우를 응시하고 있자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다는 듯 시우가 퍽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손을 힘없이 흔들었다.
“됐다. 나가.”
“아, 아닙니다, 대표님.”
제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래, 우리 대표님은 그런 파렴치한 분이 아니시다. 호색한은 더더욱 아니시고.
분명 나 따위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민을 안고 계신 것일 테다. 차 헌터님이 아니라.
“음…….”
무엇이 있을까. 상대의 몸을 보고 싶을 때.
답은 의외로 단순하게 튀어 나왔다.
“목욕탕…… 은 어떨까요?”
힐끔. 시우의 눈이 제휘에게로 향했다.
어째선지 시우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덜컥 겁을 먹었지만 제휘는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웃는 낯을 유지하며 가볍게 말했다.
“그,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요?”
그 순간 제휘는 책상 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따듯한 커피가 눈 깜짝할 새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변모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나가.”
“넵.”
* * *
서울시 청담동 ‘아로마 스페셜 D 사우나’.
그곳은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러 봤을, 초호화 공중목욕탕이었다. 원래라면 부잣집 사모님이나 유명 배우, 헌터 할 것 없이 로비부터 붐볐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어떤 이름 모를 재벌이 이 건물의 층 하나를 통째로 대절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목욕탕?”
로비를 지나치던 에단이 걸음을 멈추었다. 시우는 힐끗 뒤돌아보더니 짧게 말했다.
“따라와. 탈의실은 이쪽이다.”
앞서 탈의실로 걸어가던 시우는 참 복잡한 기분이었다. 이자와 단둘이 목욕탕을 방문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꿈에야 알았겠는가.
‘……에단과 목욕탕을 가겠다고?’
은하조차 놀란 얼굴로 되물을 정도였으니까.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하겠다고?’
‘네. 그자에게 표식이 있는 건지 궁금하신 거잖아요.’
아닙니까? 시우가 물었다.
정답이었던 모양인지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망설이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에단이 가려고 할까?’
그 점에 대해서는 시우도 고민하고 있었다. 에단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눈치챌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좋아.’
에단은 의외로 시우를 흔쾌히 따라나섰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군말 없이 따라 준다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와 탈의실에서 나란히 옷을 벗고 사이좋게 사우나로 들어서는 상상을 하니…….
‘끔찍하군.’
시우는 탈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에단에게서 홱 돌아섰다. 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휘릭 옷을 벗은 다음 먼저 사우나로 들어갔다.
아무리 공중목욕탕이고 그곳이 넓다고 하여도 같은 욕조에 그와 몸을 담그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주변을 살피던 시우는 욕탕 구석에 위치한 불가마를 발견했다.
건물 전체를 대절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청소원이라도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에는 저렇듯 밀폐된 공간이 아무래도 좋겠지. 물론 좁은 곳에 저자와 단둘이 있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함께 탕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표식 확인만 하고 나오는 거야.’
시우는 불가마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탈의를 한 에단이 불가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긴 꽤 덥네. 나무 냄새가 나.”
“…….”
시우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힐끔 그를 살폈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수려한 몸이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손발은 웬만한 남자의 것보다 컸다. 특히 팔다리에 붙은 근육은 형태로 미루어 보아 오랜 전투로 다져진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으로썬 표식이라고 할 만한 문양은 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단을 살피던 시우는 문득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손발, 그리고 복부를 힐끗 확인했다. 에단의 신체와 차이가 있다면, 장인이 깎아 내린 조각처럼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피부를 가진 에단과는 달리 제 몸은 어렸을 적 고된 훈련에서 비롯된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에단과 자신의 몸을 번갈아 쳐다보던 중,
“왜?”
에단이 시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시우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는 그의 몸을 확인하러 온 거지, 그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어.’
어쩌면 표식은, 저 수건으로 가려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그런 결심과는 반대로, 시우는 저 수건 속이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애당초 설마 그런 곳에 표식이 있을까. 아니, 하지만…… 만에 하나 진짜 저곳에 표식이 있다면?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몇 분이나 훌쩍 흘러 있었다. 시우의 턱 선을 따라 또르륵, 땀이 방울져 떨어졌다.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괜찮은 거냐며 당신의 안색을 살핍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시우를 오랫동안 봐 왔던 신수는 얼음과 물을 다루는 그가 추위에 강한 만큼 더위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리하지 않고 이만 나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 얼음처럼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 몸을 확인한 시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에단이 힐끗 시선을 던져 왔다.
“벌써 나가려고? 뭐, 힘들면 그러든가.”
새빨간 두 눈이 빙긋, 휘어졌다.
“난 괜찮지만 말이야.”
“…….”
그 순간 시우의 눈썹이 크게 씰룩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시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자세가 불편했을 뿐이야.”
이대로는 나갈 수 없었다. 표식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니, 저 자식이 제 발로 불가마를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 * *
한편 그 시각 은하는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시우가 에단을 데리고 나갔으니 오랜만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모처럼 얻은 휴일, 은하는 어머니의 묘비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불현듯 이준과 만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다. 탑에 입장하기 전에 이준과도 한 번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지만…….
‘조디악과의 전투가 시작되면 한동안은 또 찾아가지 못할 테니까.’
오늘은 엄마를 만나러 가고 싶다.
은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신발장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