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90)화 (189/306)


#190. 의심과 오해
2023.02.06.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산맥 너머로 해가 뜨며,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시우는 힐끔 눈을 돌렸다. 조수석에 앉아 창문에 턱을 괴고 한동안 밖을 바라보던 은하는 그새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

딸깍─

아무 말 없이 히터 온도를 조금 더 올린 뒤 다시 핸들을 잡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시우의 시선에 일순 묘한 빛이 감돌았다.

혹시 몰라 싶어서 준비한 특별 제작 신호탄. 그것을 사용하는 일이 없어 다행이긴 했지만 조금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이 연장을 들고 찾아왔을 때 은하는 돌연 사라졌다. 그녀를 쫓아 골짜기를 헤매던 시우는 심안과 마주쳤고, 곧 그와 함께 주민들 앞에 우두커니 선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차림을 한 은하는 주민들 앞에서 산군을 감싸고 있던 참이었다. 힐끗 옆을 살피자 유엘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은하가 저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들을 감쌀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시우도 의문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뻗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는 어떤 계산도 없다는 것을, 시우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불빛으로 마을 사람들을 배웅하는 은하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를, 유엘이 빤히 살폈다.

‘왜 그렇게 보지?’

‘백랑, 당신은 그녀를…….’

말끝을 흐리던 유엘은 곧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후 주민들이 돌아가고 은하가 두 사람을 발견하면서 대화는 단절되었다. 유엘은 시우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워낙에 촉이 좋은 녀석이다. 은하를 바라보는 자신에게서 어떠한 감정이라도 읽은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마음속 깊숙한 곳에 아직은 웅크리고 있는 작은 감정을.

“…….”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유엘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하는 것을 관두기로 한 시우는 다시 이끌리듯 시선을 힐끔 옆으로 옮겼다.

은하는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박제휘] [오후 8:14] 대표님, 정말 헬기 필요 없으십니까? 지금이라도 보내 놓을까요?

어젯밤 제휘는 헬기는커녕 운전기사 하나 없이 떠난 시우와 은하가 못내 신경 쓰이는 듯 메시지를 보내 왔다. 그러나 시우는 필요 없다며 끝까지 그의 제안을 밀어냈다.

물론 몸도 편하고 시간도 아끼겠지만, 이런 시골에 헬기나 리무진을 가져오면 온갖 시선이 다 몰려들 텐데. 그것은 ‘여기 유명인 납시오.’ 하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거름 냄새 탓에 구역질을 가까스로 삼켜 내는 동안에는, 헬기를 타고 오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지만…….

“음…….”

은하가 작게 신음했다. 자세가 불편한지 창가로 돌아가 있던 목을 움직여 운전석에 앉은 시우 쪽으로 스르륵 기울였다.

그 탓에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시야 가득 그녀의 얼굴이 들어와 버렸다. 긴 속눈썹, 오뚝한 콧대, 그리고 빨간 목도리에 반쯤 가려진…… 연분홍색 입술.

“……!”

은하는 분명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우는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펌프질을 시작한 후였다. 얼마나 미친 듯이 뛰어 대는지 이 소리에 은하가 자다가 깨지는 않을까 우려가 들 정도였다.

‘미쳤나.’

시우는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왼손 손등을 들어 이마를 마구 비벼 댔다. 방금 자신은 나쁜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몹쓸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지 알 길이 없다.

핸들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을 꽉 주었다. 순간적인 동요에 제어력을 잃은 모양이다. 손끝에서 얼음이 쩌저적, 피어났다. 시우는 아뿔싸 하는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시우는 머리를 비우고 냉정함을 유지해 보았다. 전투 시에 곧잘 해내듯, 머릿속을 차갑게.

아직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좀 더 남았다. 그것이 원망스럽기도, 다행스럽기도 한 묘한 감각이 일었다.

그로부터 약 5분 뒤.

미쳐 날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잠재운 시우는 차마 은하 쪽을 다시 쳐다보지는 못했다. 잠귀가 밝은 그녀가 혹시나 깨어날까, 희미하게 새어 나오던 라디오 볼륨을 조심스럽게 내릴 뿐이었다.

* * *

“다녀왔어?”

집으로 들어서자 에단이 현관에서부터 은하를 반겼다.

설마 밤새 현관에 서서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는 신발을 벗고 집 내부로 들어섰다.

‘그럼 선배, 조심히 올라가세요.’

오피스텔까지 은하를 데려다준 시우는 급한 일이 있다며 곧장 돌아갔다.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도망치듯 주차장을 벗어나는 것을 보니 아주 급한 일인 것 같았다.

원래라면 잠시 올라왔다 가라고 말이라도 했겠지만, 집에 에단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섣불리 그런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외박할 줄은 몰랐는데.”

은하를 졸졸 따라오며 에단이 말했다. 은하는 대충 짐들을 식탁 위에 올려 두며 답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최대한 빨리 온 거야.”

“그래? 혼자 다녀온 거야?”

“아니, 신시…….”

신시우랑.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은하가 입을 닫았다.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시우와 함께 볼일을 보고 왔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왠지 불길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은하가 입술을 도로 닫아 버리자 두 사람 사이에 멋쩍은 침묵이 흘렀다.

“…….”

에단이 시선을 떨구어 은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윽고 은하의 허전한 목 부근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목도리는?”

은하가 “아.” 하고 짧게 목소리를 내더니 손가락으로 제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두고 왔나 봐.”

피곤했는지 차 안에서 깜빡 졸아 버린 은하는 그 상태 그대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숙면을 취해 버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차에서 내리느라 목도리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어디에?”

“……차에.”

그대로 뒤돌아 현관문을 열어젖힌 은하는 그대로 복도로 나가려다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이미 늦었겠다. 지금쯤이면 벌써 시우는 단지를 빠져나갔을 테니까.

다시 신발장으로 돌아온 은하는 힐끗 에단을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은하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매가 삐뚜름했다.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에단의 정수리 부근을 확인했다. 동그랗고 빨간 체리 두 알. 은하가 묶어 준 귀여운 머리 방울을 빼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그 주제에 덩치는 커서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 저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우습달까 친숙하달까. 은하를 쳐다보는 에단의 얼굴은 뚱하다기보다는 살벌한 얼굴에 가까웠지만, 머리를 저렇게 묶고 있으니 곤란하기는커녕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거, 언제까지 하고 있으려고?”

“잘 어울린다며.”

“…….”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순간, 불현듯 유엘이 했던 말이 은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를 적으로 두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그자의 몸 어딘가에, 분명 별자리 형태를 한 표식이 있을 겁니다.’

곡선을 그리려던 입꼬리가 우뚝 멈추고 은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그 작은 변화를 감지한 에단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

은하는 곧장 입을 열지 않고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에단은 은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기색으로 느릿하게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단, 혹시 너.”

은하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조디악이야?”

째깍째깍…….

이어지는 몇 초간, 거실 벽면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은 정적 속에서 “풋.”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단이었다.

“조디악이라는 말은 어디서 배웠어?”

“내 물음에 먼저 답해 줘.”

“음, 아니.”

에단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너도 알다시피 난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무심히 쓸어 넘긴 그가 체리 머리 방울을 빼내었다. 손바닥 위에서 체리를 데굴데굴 굴리던 그가 휙 하고 붉은 시선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들과 동급 취급하는 건 조금 기분이 나쁜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

눈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입은 그렇지 못했다. 순식간에 둘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은하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물러서지 않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확인 사살을 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네가 조디악이 아니라는 소리지?”

“어.”

에단이 즉답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적.

에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은하를 바라볼 뿐.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은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방구석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기분 나쁜 나비가 신경 쓰이는 탓도 있었다.

은하는 에단과 함께 쇼핑을 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목도리를 훔쳤다고 오해한 은하를 향해 에단은 훔친 것이 아니라고 반론했다. 은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던가.

“…….”

의심이 서려 있던 은하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의 손바닥에 꼭 쥐어진 체리 머리 방울을 응시하며, 은하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믿어 주고 싶었다. 또다시 불필요한 오해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에단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은하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맘처럼 의심을 완전히 걷어 버리는 것도 힘들었다. 그를 한국에 데려온 장본인인 은하 역시도 에단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한편,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어쩌면’ 하는 의심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은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도자기 표면처럼 희고 매끈한 얼굴 피부에는 표식은커녕 트러블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곱상한 이목구비와는 달리 조금 굵은 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툭 튀어나온 목젖뿐이었다. 입고 있는 티셔츠 목이 조금 느슨하게 늘어난 탓에 붓으로 그린 듯한 쇄골 선도 훤히 보였다.

조금 더 시선을 내려,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손을 확인했다. 푸른 혈관이 도드라진 손등에도, 굵지만 선이 수려한 손가락에도, 마찬가지로 표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그를 빤히 살피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옷, 벗어 줄 수 있어?”

“……뭐?”

은하의 물음에 에단이 돌처럼 쩍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좁아졌던 미간이 매끈하게 펼쳐지며, 사납던 기색의 붉은 눈동자가 머리 방울의 체리처럼 똥그래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현저한 동요를 보이는 에단 탓에 은하까지 머쓱해졌다. 에단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할 테다. 대뜸 옷을 벗어 보라 하면 누구든 놀랄 테니까.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 무어라 설명하는 게 좋을까, 말을 고르던 중이었다.

툭…….

어떤 물건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신발장에 떨어진 물건은 새빨간 목도리였다. 그리고 그 곁으로 보이는 한 쌍의 구두.

은하는 차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

에단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한, 시우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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