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8)화 (188/306)


#188. 주민들의 봉기
2023.02.04.


소년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간절기 때마다 지독한 감기를 앓는 것은 기본이었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체구가 작기도 했다.

워낙 유약한 체질 탓에 학창 시절에는 체육 수업을 빠져야만 했고, 먼 곳으로 나가는 현장 학습이나 수학여행은 참여조차 한 적 없었다.

그런 소년을 늘 보살피고 격려해 주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유엘, 널 이렇게 낳아서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소년이 가끔 심하게 앓아누운 밤에는 작은 방 문을 닫고 흐느껴 울던 어머니를 기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탓에 수술이나 장기 치료는커녕 입원조차 힘든 상황 속에서,

[식별을 시작합니다.]

[이름 : 은유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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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도 각성의 기회가 찾아왔다.

각성자.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날렵하게 건물 사이사이를 누비는 자들. 그들은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거나, 마법을 부리듯 번쩍번쩍한 기술을 선보였다.

‘각성이 제 인생을 바꾸었죠.’

TV에 나온 남자는 가슴을 펴고 그리 말했다. 꽤 유명한 A급 헌터였다.

당당하고 떳떳한 얼굴. 모두가 그를 향해 박수 쳤다.

소년은 TV에서 본 그들을 떠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마에 붙어 있던 미지근한 수건이 툭, 무릎 위로 떨어졌다.

제대로 된 호흡조차 힘들 정도로 올랐던 열이 어느새 내려 있었고, 새 다리처럼 얇고 후들거리던 다리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소년의 고유 능력은 ‘검기구현(劍氣具現)’. 말 그대로 검이 가진 기운을 실제로 구현하는 힘이었다.

심지어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됐다. 소년이 원하기만 한다면, 마치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그곳에 나타났으니.

“우와…….”

소년은 자신의 손안에 깃든 검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듯 고요히 빛나는 칼날. 손잡이 부근에 달린 푸른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던 소년의 눈동자에 반짝 환한 별이 떠올랐다.

“엄마! 엄마!”

평소와는 달리 기운찬 소년의 목소리에 문이 벌컥 열렸다.

“유엘? 너 어떻게…….”

“이것 봐, 나 각성했어!”

잔뜩 들뜬 소년은 엄마의 앞에서 보란 듯이 부웅, 검을 휘둘렀다.

[패시브 ▶ ‘검령(劍靈)’ 활성화. 검에 깃든 혼령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오류. 검에 혼령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주변 원혼이 당신의 검에 대신 깃듭니다. 길들이지 못한 원혼은 당신의 의지에 답하지 않습니다. 제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의. 제어에 필요한 능력치가 낮습니다.]

촤아아악!

검으로부터 새까맣고 무수한 넝쿨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소년이 미처 길들이지 못한 원혼의 팔이었다.

눈앞에 붉은 핏방울들이 흐드러지듯 피어났다. 크게 뜨인 소년의 눈. 그 아래 흰 뺨에 튄 피가 뚜욱, 느릿하게 낙하한다.

“……엄마?”

챙! 챙그르르…….

소년의 작은 손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검.

TV에 나왔던 헌터의 말이 맞았다.

──각성은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 * *

“젠장. 귀찮게 하네, 진짜.”

휘리릭─

낮게 욕설을 뱉은 의영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기와지붕으로부터 땅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벌써 동백나무 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시간문제야.”

“……조만간 또 거점을 옮겨야 하겠군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를 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시우와 은하를 이곳까지 안내했던 자였다.

“또? 난 싫어. 여기 마음에 든다고.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지 않고 수련하기도 딱 좋잖아. 저번처럼 등산로에 잘못 거점을 두었다가는 한 달도 못 가서 다시 이사 가야 할 텐데, 언제 또 이런 좋은 터를 찾아?”

의영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도깨비 집이니 뭐니 쓸데없이 헛소문만 부풀려져서는. 야, 두첩! 너 때문이잖아.”

“제가 왜요?”

“네가 수염을 그딴 식으로 기르고 시꺼먼 한복이나 입고 다니잖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횃불 들고 봉기나 일으키러 오지. 자기네들 자식새끼 잡아갈까 봐 그런 거 아니겠냐고.”

“그런……. 전 억울합니다.”

“내가 뭐랬냐? 최대한 마을 쪽에는 가지 말라고 했지? 어휴, 하여간 진짜.”

쯧, 혀를 찬 의영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령님은? 가란이 모시러 간 거 아니었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별채 뒤쪽에서 유엘과 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다른 쪽 별채 지붕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우가 재빨리 착지하여 은하에게 뛰어갔다.

“선배, 괜찮으십니까? 심안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 그보다 무슨 일이야?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은하가 시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엘은 그들을 지나쳐 의영과 산군 일원들이 선 곳으로 걸어갔다.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어서 숨지 않고.”

“수, 수령님!”

“두첩, 너도 멍하니 있지 말고 서둘러 결계를 쳐라.”

“예? 결계는 이미…….”

“여기 말고 이 동백나무 골짜기 전체에 말이다. 밤이 깊어. 길을 헤매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들이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는 동안, 은하는 묘한 눈빛으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처음 이곳 푸른 기와집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유엘과 의영, 가란 그리고 두첩, 이 네 사람만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인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네 사람과 마찬가지로 전통 복식을 한 사내들은 모두 다 산군의 일원처럼 보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총 여섯 명. 그리고─.

‘지붕 위에 둘. 울타리 너머…… 셋 정도인가.’

기척을 숨기는 것에 능한 것인지, 아니면 잠시 거점을 벗어나 있다가 막 돌아온 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전자라면, 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은하조차 지금에서야 인지할 정도였다. 적어도 기척을 숨기는 일에 있어서는 뛰어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 시우가 은하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물러나 있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와 크게 관계도 없는 일이니.”

시우는 마치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은하는 그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옥계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 집을 태우러 오는 것 같습니다.”

쿠데타 같은 거죠. 시우가 덧붙였다. 그러나 은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이곳을 왜 태우지?”

“선배도 들었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흉흉한 도깨비 집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꺼림칙한 장소를 없애 버리려는 거겠죠.”

마을 근처에 흉가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태우든 부수든 깔끔하게 허물어 버리는 것이 마음이 편할 테다.

문득 마을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던 대낮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이걸 대비해서 그토록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은하가 말끝을 흐리는 사이, 부산하게 각자 도맡은 일을 행하던 산군 무리 중 얼굴에 가장 불만이 서려 있는 자, 의영이 유엘 곁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수령님, 그냥 나가서 조져 버리죠.”

프로 헌터는커녕 각성조차 하지 않은 일반인을 상대로는 과격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으나, 사실 의영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만큼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었다.

산군은 오래도록 칩거를 이어 왔다. 탑이 등장하기 전에는 헌터 활동은커녕 세간에 모습조차 거의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정체를 모르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신흥 종교단 따위의 수상한 집단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숱하게 오해를 샀다.

‘들었어? 저기 저 집, 귀신 들린 집이래.’

‘저 사람들 무서워…….’

‘예끼, 이눔 자식들! 소금이나 처먹어라!’

‘여, 여기 오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진짜인가요……?’

──그것도 아주 종류별로 다양하게.

그뿐이랴. 호기심을 느낀 겁 없는 자들이 담력 시험이랍시고 기웃거리기 일쑤, 이렇듯 농기와 무기 따위를 들고 찾아오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산군은 그럴 때마다 심안의 뜻으로 거점을 옮겨 왔다. 세간에는 천왕봉 어딘가에 산군의 거점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늘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산군의 우두머리인 심안이 세간에 알려진 상태. 알려졌다뿐일까, 그는 인류 최초의 탑 봉쇄자다. 영웅급 명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불필요한 오해를 사서 도망치듯 숨어 다니는 생활을, 의영은 이제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가란을 포함한 다른 산군의 일원들도 티를 내지 않을 뿐 속내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심안은 단호했다.

“가만히 있어라. 큰소리도 내지 마.”

“하지만 수령님,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의영.”

“…….”

시무룩해진 의영은 터덜터덜 걸어 다시 멀어졌다. 그로서는 도저히 심안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은하가 유엘을 향해 물었다.

“왜 나가지 않는 겁니까? 당신은 헤드 헌터잖아요. 얼굴을 보이면 모두가 잠잠해질 텐데.”

그러자 유엘이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의견은 타당했다. 하지만…….

‘제 어미도 못 알아보는 놈.’

‘저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으면 국가에서 관리를 하든 감금을 해든 해야지.’

‘혹시 아느냐고. 저 꼬마가 또 폭주해서 이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어째?’

──이제 더 이상은.

팔보다 조금 더 긴 도포 자락 속, 유엘의 주먹이 슬그머니 쥐어졌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보였던 그가 짧게 입을 열었다.

“인간은 원래 낯선 것을 두려워하니까요.”

본능인 겁니다. 그리 덧붙인 그가 뒤돌아섰다.

“……가까워져서 좋을 것은 없을 테니.”

애매모호한 답변은 은하의 물음과는 사뭇 맞물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랬듯, 검은 천으로 가려진 탓에 그의 표정도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은하는 그 말뜻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왜냐하면, 1세대 헌터 차은하. 당신과 저는 닮았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심안 은유엘이 머무는 이 집을 도깨비 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횃불과 연장을 챙겨 이 집을 없애 버리려고 했다.

은하가 보아도 오해받을 만한 외견이긴 했다. 더군다나 이 기와집 전체를 감싼 기묘한 결계 탓에,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도 들 테다.

생각해 보면 은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흑염의 프린세스를 F급 컨셉 헌터라고 손가락질했다. 괴담 속 존재라 보는 자도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외모와 차림새였다.

인간은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멀리하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한다. 일부 용감한 자들은 그 근원을 없애려고 들기도 했다.

은하는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아마 유엘도 그럴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둘은 비슷할 수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유엘은 ‘그들’…… 그러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이 가까워져서 좋은 점은 없을 거라고 말한 것.
그러나 은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헌터님, 이번 반찬은 어땠습니까? 이 박제휘, 꽤 솜씨를 발휘해 보았는데요!’

‘언니이! 이번 주 영화관 콜? 울 언니랑 보려고 공짜 표도 얻어 놨는데. 아, 훔친 건 아니고요.’

‘누나도 오늘부터 우리 패밀리야.’

──그들과 가까워져서 좋은 기억밖에 없었으니까.

“…….”

은하는 시선을 들어 유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수여식 날, 유엘은 에단을 공격했다. 그날 회장 근처에 나비 여인이 나타났고, 에단을 발견한 유엘은 그 일이 에단과 관련되었다고 확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엘은 끝까지 에단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물론 은하가 그를 가로막은 탓도 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일반인 피해는?’

‘의식 불명인 자가 7명 정도 있다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일반인의 안전을 확인한 유엘은 그대로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더는 에단을 공격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렇다면 됐다는 듯이. 일반인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듯이.

“무기를 숨겨라. 두첩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유 능력 사용을 금한다.”

유엘은 산군의 일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들 방으로 들어가.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는 그 누구도 나와서는 안 된다.”

유엘의 명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다시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살피던 은하가 별채 마루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종이백. 혹시나 싶어 챙겨 왔던 드레스가 그곳에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시선을 떨구어 손안의 양산을 응시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은하가 다른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나무 타는 냄새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개의 화신인 시우가 아니더라도 이곳 모두가 확연하게 느낄 정도였다.

“주민들이 가까이 왔나 봅니다.”

살짝 인상을 쓴 시우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미리 쓰고 있던 마스크 위에 손수건을 덧댔지만 콜록콜록 새어 나오는 잔기침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매캐한 연기가 가까워질수록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 상관도 없는 일에 휘말리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시우는 손수건을 코에 갖다 댄 채 힐끔 시선을 돌렸다.

“선배, 볼일이 끝났다면 우리는 이만 돌아갈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선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시우가 스르륵 손수건을 아래로 내렸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서 있었던 은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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