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7)화 (187/306)


#187. 탑의 주인, 조디악(Zodiac)
2023.02.03.


‘아…….’

의영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헛것을 보는 건지 시우의 모발 끝이 희게 물드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변의 기온이 뚝 떨어지는 듯한 감각까지도.

백랑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왜─.”

의영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란이 “크흠.” 하고 기침 소리를 내더니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닥쳐.’

그 눈빛은 정확히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의영의 귓가에 수령님의 말씀이 벼락처럼 스친다.

‘잘 알아들었지? 다른 길드는 몰라도 늑대만큼은 적으로 돌리면 안 돼.’

──성가시게 될 테니까. 분명 그리 말씀하셨다. 의영은 하려던 말을 목 안으로 꿀꺽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라고 불렸던 백야.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저 청년은 그 남자의 외동아들이었다. 또한 현대에서 활동하는 전 세계의 헌터 중 유일하게 두 가지의 고유 능력을 가진 자, 그것도 흔한 능력도 아니고 물과 얼음이라는 자연계열을 동시에 구사하는 특별한 헌터였다.

시한부 환자였던 백야가 죽고 현재는 눈앞의 이 청년이 늑대의 길드장이 되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시스템 랭킹 글로벌 랭킹 3위에 올랐다. 스위스의 탑에 투입되어 최단 시간에 17층을 격파한 괴물이자 거물.

의영의 사과를 들은 시우는 관심을 껐다는 듯 다른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릴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우의 옆얼굴을 흘긋 훔쳐본 의영의 눈빛에 불현듯 의문이 스쳤다. 실례를 범했다고는 말했으나, 백랑에게 있어 의영의 발언이 어째서 ‘실례’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백랑씩이나 되는 헌터가 그녀를 이렇게 감싸는지도.

흑염의 프린세스가 랭킹 1위 헌터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 연인 사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런 사이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약점이 잡혔다든가? 하지만 그렇다면 백랑이 저토록 정색하면서까지 그녀를 감쌀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흑염의 프린세스가 랭킹 1위라고는 해도 늑대의 현 주인인 백랑을 상대로 큰 약점을 잡기는 쉽지도 않을 테고.

‘그녀에게 무언가 있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수령님께서 그녀를 여기까지 부른 것도 비슷한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 백랑 앞에서는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한 언급을 삼가는 것이 좋겠군.’

의영은 힐끔 본채 쪽을 바라보았다.

유엘과 은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본채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느덧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

석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던 시우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서 가란과 장기를 두던 의영은 괜히 흠칫 놀랐다.

‘이,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일이지? 가란 역시 고개를 들어 시우를 쳐다보았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백랑.”

“……나무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

“예?”

의영과 가란의 시선이 문득 마주쳤다. 나무가 타는 냄새라니. 그들 역시 각성자로 일반인보다는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런 냄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불이라도 난 건가?”

신발을 신은 의영이 별채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턱을 조금 높게 든 시우가 푸른 시선을 저 멀리로 보냈다.

검푸른 그의 머리카락이 밤바람이 은은하게 휘날렸다. 나무 타는 냄새만 난다면 산불을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바람이 싣고 온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희미한 기름 냄새.’

시우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한편 가옥 뒤편의 조그마한 사당. 본채를 벗어난 유엘은 은하를 그곳으로 데리고 왔다.

“왜 이곳에 날 데리고 온 거죠?”

“함정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로 온 거니까요. 그리 덧붙인 유엘이 작은 제단 앞에 고정되어 있는 양초를 쥐고, 남은 왼손을 뻗어 더듬더듬 제단을 짚었다. 성냥을 찾는 듯했다.
화륵─
문득 따듯하고 포근한 기운이 곁에 드리워졌다. 뒤에 서 있던 은하가 고유 능력을 이용하여 양초에 불을 피워 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전한 유엘이 촛불 위로 향초를 가져가 불을 지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능숙한 손길이었다.

주홍빛 촛불과 함께 은은한 향내가 사방으로 퍼진다. 어둡던 사당 내부가 밝아졌다.

이곳에도 검은 먹으로 그린 호랑이의 수묵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호랑이가 바로 산군의 상징인 까닭이었다.

사당 내부를 살피던 도중, 제단 위에 놓인 작은 액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젊은 여인이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탑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고 하셨죠.”

은하가 액자 속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중, 유엘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먼저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스르륵─

검은 천이 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따라 은하의 시선 역시 아래로 떨어진다. 그 천은 유엘의 눈을 가리고 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탑을 닫았습니다.”

은하가 다시 시선을 드는 순간, 탁한 빛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것이 그 대가였고요.”

희끄무레한 동공은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정확히 은하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얻게 된 것도 있죠. 원래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원래는 보지 못했던 것?”

“네.”

유엘이 한 걸음 은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은하는 깨달았다.

유엘은 정확히 은하 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하의 어깨 부근, 어쩌면 그 너머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내게 향해진 살기, 상대가 느끼는 감정,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운…… 그런 것들요.”

산군의 일원은 특별한 수련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우두머리인 심안 은유엘의 경우 시력을 잃으며 그러한 것들을 확실히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가 그자를 공격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자. 에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엘은 어느새 은하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당신도 그와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군요.”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은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것을 유엘이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가 입가에 유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선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두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적으로 둘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1세대 헌터 차은하. 당신과 저는 닮았으니까.”

……닮았다고? 은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핏 보아도 그와 은하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외모도, 그리고 내면도 말이다.

“당신에 대한 정보는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유엘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한 걸음 물러났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늙지 않은 것은 아마도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겠죠. 언노운 게이트인 만큼 그곳과 현대의 시간 차이가 있었다는 것도 가정의 이야기는 아닐 테고요. 그 기운은 아마 거기서 옮겨붙듯이 섞인 거라 생각합니다.”

“…….”

“하지만 그자는 확실히 다릅니다.”

오래도록 게이트 토벌을 이어 온 베테랑 헌터들은, 농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개 그런 비슷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유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제가 당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가 하나 따로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당신께 확실히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유엘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말씀해 주세요. 그는 인간이 아니지요?”

“…….”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단을 감싸기 위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아직 유엘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이려고요?”

유엘의 기색을 살피던 은하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그리 물었다. 빙빙 둘러서 묻는 것은 은하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유엘 역시 단호하게 답했다. 몸을 딱딱하게 굳히는 은하를 보며, 유엘은 걱정 말라는 듯 옅게 웃었다.

“그러나 차은하 헌터, 당신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그자와 당신이 다르다는 것을 저는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당신과 내 목적은, 아마도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달라.”

가만히 유엘의 이야기를 듣던 은하가 입을 열었다.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 정확한 건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죠.”

“어째서죠?”

“당신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은하가 유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싸우려는 건 ‘인간이 아닌 자’가 아니니까.”

때로는 인간보다 나은 짐승이 있고, 짐승보다 못한 인간도 있다. ‘인간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은하에게 있어 어떤 면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했다.

“인간을 위협하려는 자. 그게 내 적이니까요.”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은하의 목소리가 아렴풋이 울려 퍼졌다. 그에 따라 사당 벽 위에 걸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 역시 느릿하게 흔들린다.

“……탑의 주인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짧게 이어진 정적 끝에서 유엘이 제단을 향해 휙 몸을 돌렸다.

“내 눈을 앗아 간 자도 그랬죠. 그것이 진짜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붉은 머리카락에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엘이 턱을 들어 조금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조디악(Zodiac).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상체를 숙인 유엘은 바닥을 더듬어 검은 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흘러내리지 않게끔 매듭을 묶어 다시금 단단히 눈을 가렸다.

“나는 그들이 이 모든 재앙의 원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난 탑을, 조디악을 지구상에서 지워 버릴 작정입니다.”

“에단이 조디악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자의 이름이 에단이군요.”

에단의 이름을 작게 되뇌인 유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에단’이라는 자의 몸을 잘 살펴보십시오. 조디악의 몸에는 표식이 있으니.”

표식. 그 순간 짧은 기억의 단편이 은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아스트에게도…….’

아스트의 손등에 있었던 별 문양. 옅은 빛을 발하고 있던 기묘한 문신을, 은하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아스트가 사라지자마자 떠올랐던 시스템창.

‘그가 탑의 주인 중 하나였다는 말인가?’

아스트가 죽고 탑이 봉쇄된 것이라면, 그를 죽인 것은 에단일 확률이 높았다. 네뷸러를 탈출하기 직전 에단이 아스트를 데리고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유엘의 예상대로 에단이 ‘조디악’이라면, 같은 조디악 동료를 죽일 이유가 있을까?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를 적으로 두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그자의 몸 어딘가에, 분명 별자리 형태를 한 표식이 있을 겁니다.”

강한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유엘은 은하에게 말했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자는 우리의 적입니다.”

“하지만 에단은─.”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였다. 문득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사당 문을 두드렸다.

“수령님.”

유엘의 수하, 가란의 목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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