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4)화 (184/306)


#184. 체리 머리 방울
2023.01.31.


“산군에게서 초대장이요?”

시우는 손에 파스타 면을 한 줌 쥔 채 휙 고개를 돌렸다. 오늘 일정이 생겨 버린 제휘를 대신하여 오피스텔을 방문한 차였다.

식탁에 앉은 은하는 앞치마 차림의 시우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위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봉투, 산군으로부터의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어제 일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다고 꼭 와 달래.”

“…….”

시우가 입을 닫았다.

산군은 글로벌 랭킹 12위 은유엘이 이끄는 소규모 조직으로, 지리산 천왕봉 어딘가에 근거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알기로 산군의 일원을 제외하고 그곳을 방문한 자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왜 선배를?’

단순히 그녀가 랭킹 1위이기 때문에?

아니면…… 수여식 때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시우 앞의 냄비가 팔팔 끓기 시작했다.

“물 끓어.”

“아.”

시우는 뒤늦게 파스타 면을 투입했다.

이래 봬도 시우, 그러니까 백랑은 글로벌 랭킹 3위이자 현재는 늑대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그러나 냄비에 파스타 면을 넣고 휘휘 젓는 그 뒷모습은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후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시우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은하는 컨벤션 센터에서 보았던 나비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녀가 전했던 전언에 대해서도.

“한 달 뒤, 네뷸러에서 기다리겠다고.”

“가시려고요?”

“가지 않을 이유는 없지.”

은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는 동안 갑자기 나타난 11개의 탑. 그리고 아스트가 했던 의미심장한 이야기. 열쇠는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저것이 인류에게 있어 위협적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흑염의 프린세스는 현재 글로벌 랭킹 1위. 이전보다 더욱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은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 그 전언 때문입니까? 선배가 심안의 초대에 응하려고 하는 이유 말입니다.”

“심안은 인류 최초의 탑 봉쇄자라고 들었어. 어쩌면 탑 공략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 대답한 은하는 식탁 위에 놓인 초대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 은하가 그 초대에 응하려고 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네뷸러에서 에단을 데리고 온 은하조차, 어렴풋이 이쪽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그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등 뒤에 숨기고 있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당신은 그걸 알고도 감싸고 있는 건가요?’

심안 은유엘은 에단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가능하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시우가 그리 말했다. 봉투에서 시선을 뗀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는 이상 선배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선배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동행─.”

시우는 그리 말하다 말고 덜컥 입을 닫았다. 자는 줄 알았더니 그새 손님방에서 튀어나온 에단 때문이었다. 곱슬곱슬하고 덥수룩한 분홍색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붉은 눈은 아직 졸린 기색이 역력했다.

“은하, 밥 먹어?”

조금 헐렁해 보이는 흰 티셔츠가 어깨선을 따라 스르륵 흘러내렸다. 움푹 팬 쇄골이 훤히 드러났다. 새 티셔츠를 사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조금 늘어난 모양이다.

“일어났어?”

“응.”

작게 하품을 한 이쪽으로 다가와 은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시우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은하, 나도 배고파.”

“네 건 저기 따로 챙겨 놨어.”

은하는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며 답했다. 그대로 그것을 입에 넣으려던 찰나, 에단이 은하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입가로 이끌었다.

은하의 포크가 에단의 입에 쏙 들어간 것은 다음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다지 맛은 없네.”

파스타를 우물대던 에단이 툭 던지듯 말했다.

붉은 눈동자가 슬쩍 움직이더니 시우를 향했다. 피식, 그의 입매가 비스듬한 곡선을 그리던 그때였다.

스스스─

식탁 가장자리부터 새하얀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힐끗 그것을 확인한 은하는 에단의 손아귀에서 조심스레 손을 빼내었다.

* * *

아무래도 시우와 에단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그 정도면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은하는 그들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에단이 시우를 그다지 기꺼이 여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말하자면 독점욕과 비슷한 형태일 거야.’

에단은 한국…… 아니, 지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함께 생활하거나 외출할 만한 가족도 친구도 여기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 에단이 의지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 은하뿐일 테다.

그러니 저번 목도리 사건 때처럼 은하와 사이가 벌어지면 그에게는 그것이 유독 더 크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었으나, 은하가 제휘나 시우 등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에단은 조금 심술이 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에단이 머리로 인지를 하고 있든 아니든, 그 사실이 은하를 향한 어렴풋한 독점욕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은하가 저를 두고 외출하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것뿐인가. 점심에는 은하의 파스타를 입에 쏙 넣더니 보란 듯이 시우를 비웃기도 했다. 덕분에 식탁 절반이 얼어 버린 것은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평소에는 잘 안 그랬잖아.”

은하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소파 위에 느슨하게 누워 있던 에단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까 점심에 말이야. 파스타.”

그러자 에단이 “아아.” 하고 허공을 응시했다. 붉은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휙 초승달 형태로 휘어졌다.

“자주 하라는 소리야? 그런 거.”

“…….”

은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 따듯한 코코아를 휘저으며 다시 생각해 본다. 에단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우는 왜 그럴까, 하고.

시우가 경계심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웬 남자가 이곳에 있으니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시우가 에단에게 보내는 그 눈빛은…… 단순히 경계라고 보기에는 무척 뾰족했다.

은하가 알기로 시우는 상대의 도발에 하나하나 반응을 할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심안처럼, 에단에게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힐끔, 다시 에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누운 에단은 그렇게 자고도 또 졸린 것인지 쿠션을 끌어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덥수룩한 제 앞머리가 거슬리는지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지작댔다.

이렇게 보면 기분 좋고 나른한 주말을 보내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었다.

“몸은 좀 어때?”

“몸? 괜찮은데.”

에단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지하 미궁에서 처음 빠져나왔을 때도, 두꺼운 못에 의해 뚫려 있던 손바닥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았던 그였다. 이번에 다친 팔의 상처도 흔적이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인 것과는 별개로, 일반 헌터들이 가진 자가 치유력을 웃돌 수준의 엄청난 회복력이라는 점을 의식하게 되었다.

“……오늘 잠깐 어디 좀 다녀오려고 해.”

거실 의자에서 일어난 은하가 말했다.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만지작대던 에단이 힐끗 이곳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물끄러미 이곳을 향한 붉은 눈은 마치 ‘나는?’ 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은하는 거실의 작은 서랍을 열며 말했다.

“중요한 일이라서, 넌 데리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두 번째 서랍 속에는 유리 장식함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예쁘게 정돈된 머리 장식들이 보였다. 바나나 형태의 집게 핀부터 헤어밴드, 반짝이는 비즈가 달린 똑딱 핀도 보인다.

머리가 긴 은하를 위해 제휘가 미리 사 둔 것들이었다. 여동생이 구매를 도와줬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은하는 배달 음식을 시킨 뒤 남은 노란 고무줄로 충분했기에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중요한 일이라서 나는 못 간다는 소리야?”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에단이 상체를 일으켰다. 목소리에 희미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너를 공격했던 그 남자, 유엘을 만나러 가려고. 그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산군의 근거지를 찾아가는데 에단을 데리고 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그다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빨간 체리가 달린 머리 방울을 꺼낸 은하는 서랍을 닫고 에단에게 다가왔다. 소파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그에게 손을 뻗자, 에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이리 와 봐. 묶어 줄게.”

“……뭘?”

“앞머리. 거슬리잖아.”

“…….”

에단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이 자리해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스르륵 머리를 은하에게 가까이 댔다. 희미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친다. 은하와 같은 향이었다. 같은 것을 쓰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프면 말해.”

은하는 에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솜처럼 폭신한 감촉이었다. 에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인형처럼 가만히 굳어 있었다.

이래 봬도 한때 애견미용사를 꿈꿨던 그녀였다. 은하는 꽤 능숙한 손길로 에단의 앞머리를 묶어 주었다.

“됐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사과 꽁지처럼 작게 솟아올랐다. 반듯하고 매끈한 이마가 드러나며, 그 아래 반쯤 가려져 있던 붉은 눈동자 역시 훤히 드러났다.

다 큰 남자가 체리 장식의 방울이 달린 고무줄로 앞머리를 올려 묶은 모습은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다소 우스웠지만, 예쁜 이목구비 탓인지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았다. 에단의 붉은 눈동자와 새빨간 체리 머리 장식이 비슷한 톤인 덕분일지도 몰랐다.

“잘 어울리네.”

“…….”

묘한 얼굴로 제 머리 위 체리 장식을 만지작대는 에단.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은 은하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우가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에단과 마주칠 것을 염려해 올라오지 말라고 사전에 전해 두었다.

시간을 확인한 은하는 미리 준비한 종이 가방에 드레스를 개어 넣었다. 신발장 우산 꽂이에 끼워 둔 양산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기 직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럼 다녀올게.”

소파에 앉은 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은하는 그것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삐빅─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락 소리가 조용한 집 안을 울렸다.

은하가 손을 댄 이후 굳어 버린 밀랍 인형처럼 여태껏 움직이지 않았던 에단이, 삐거덕삐거덕 손을 올려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

동글동글하고 딱딱한 감촉. 체리 모양의 방울이 손끝에 닿았다.

에단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매끌매끌한 냉장고 표면에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낯설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숨에 머리 방울을 빼내려다가,

‘잘 어울리네.’

그대로 다시 굳었다.

그리고 몇 초 뒤, 고요한 거실 속에서 에단의 중얼거림이 낮게 울렸다.

“……괜찮나?”

─다시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혼자 거실에 남은 에단은 자꾸만 제 머리 위 체리 두 알을 만지작거렸다.

* *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근처 작은 마을.

비포장도로 위로 자동차 바퀴가 움직일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 확실합니까?”

운전석에 앉은 시우는 핸들을 움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움직여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고즈넉한 주택들과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논밭, 그리고 채도 높은 색상의 컨테이너 창고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럴 거야.”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은하는 유엘이 보내온 초대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함양군 마천면 옥계 마을 근처 푸른 기와집. 그렇게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초대라고 하기엔 상당히 불친절했다.

벌써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며 군데군데 표지판을 확인한 참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찾는 옥계 마을은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제부터는 도로가 거의 뚫려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려서 조금 걸어 볼까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시우는 냉큼 내려 은하가 앉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길이 험하니 발밑 조심하시…… 욱.”

그러다가 홱 몸을 돌려 입을 틀어막는다.

“신시우, 괜찮아?”

“네, 저는 괜찮…… 우욱.”

신수 개의 영향으로 후각이 유달리 발달한 그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지독한 거름 냄새를 견디기 힘들 만도 했다.

결국 시우는 차에서 두꺼운 마스크를 꺼내 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여전히 미간은 찡그린 상태였다.

“이거라도 쓸래?”

고통스러워 보이는 시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제 목에 걸려 있던 빨간 목도리를 그에게 건넸다. 이걸로 코랑 입까지 가리면 좀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날씨도 추운데 선배가 하고 계세요.”

“난 안 추워. 그리고 너 그 상태로 걷기 힘들잖아.”

“…….”

이런 어이없는 문제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던 시우는 결국 목도리를 받았다.

목에 두르자마자 은하 특유의 체취가 코에 확 다가와서, 아까와는 사뭇 다른 이유로 몸이 굳어 버렸다.

“어때? 좀 나아?”

은하가 시우의 안색을 살폈다.

무심한 얼굴에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이제는 알았다. 그녀는 시우를 신경 쓰고 있었다.

“……네, 훨씬.”

“얼른 가자.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하는 게 좋겠어.”

시우를 지나친 은하가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아직 날도 밝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놓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길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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