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3)화 (183/306)


#183. 불청객 (3)
2023.01.30.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수여식이 종료된 후, 뒤풀이는커녕 인터뷰에도 참석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온 은하가 혹여 배라도 고플까, 제휘는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식사를 준비했다.

식탁에 나열된 음식 자체는 그다지 휘황찬란하지 않았다. 흰 쌀밥에 된장찌개, 멸치조림, 청양 고추를 팍팍 썰어 넣은 매운 어묵 볶음, 깍두기와 파김치, 노릇하게 구운 떡갈비 등등 평소에도 자주 먹던 것들이었다. 다만 하나같이 은하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자, 우리 차 헌터님은 여기 앉으시고요.”

“고맙습니다, 매니저님.”

은하는 제휘가 직접 빼내 준 의자에 앉았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음, 그리고 대표님은 여기, 차 헌터님 옆자리에─.”

기이익.

제휘가 은하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려던 순간, 순식간에 그것을 낚아챈 자가 있었으니.

“맛있겠네.”

또 이 남자! 분홍색 솜사탕이었다!

튀어나올 듯한 눈을 한 제휘가 아연한 얼굴로 에단을 쳐다보는데, 정작 에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연한 낯빛을 한 에단이 은하의 옆자리에 그대로 착석하기 직전,

기이익.

또 한 번 의자가 멋대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시우에 의해서였다. 만일 에단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을 것이다.

“…….”

에단은 의자를 잡은 시우의 손을 빤히 응시하다가 스르륵, 붉은 시선을 들었다. 단지 그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입꼬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 시우는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며 말했다.

“놔.”

기이익─

강한 악력에 의해 의자가 바닥 위에 끌렸다. 그러나 에단은 의자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기이익─

바닥을 끄는 의자 소리가 이번에는 조금 더 묵직했다. 에단과 시우는 서로의 시선을 잠시도 피하지 않은 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와중에도 양쪽 모두 손만큼은 의자 등받이에 꿋꿋하게 붙어 있었다.

기익, 기이익. 드륵, 드르륵.

제휘의 눈앞에서 식탁 의자가 오른쪽, 왼쪽, 시도 때도 없이 움직였다. 층간 소음이 굉장히 염려된 제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제 옆자리도 비어 있는데…….”

아주 짧은 순간, 시우와 에단의 시선이 힐끗 제휘에게 닿았다. 제휘는 최대한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고 입을 열었다.

“그, 여기에 앉아도 될 것 같……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깨갱 하는 얼굴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누가 보면 내 옆자리에 똥이라도 묻은 줄 알겠다. 하지만 그런 말은 죽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계속된 실랑이에 식사를 시작할 수 없었던 은하는 식탁 위에 조용히 수저를 내려 둔 다음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매니저님이 여기 앉으세요.”

“예……? 제가, 요……?”

멍하니 되묻자, 근처에 있던 두 쌍의 눈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제휘의 얼굴에 동시에 꽂혔다.

그 순간, 제휘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휘는 차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그 방향을 향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식사 자리를 두고 일어난 두 사람의 소리 없는 전쟁은, 결국 은하에 의해 제휘가 옆자리에 앉으며 일시 휴전이 되는 듯싶었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실버문의 윤 팀장이, 제게 헌터님의 사인을 받아 와 주면 A호텔 코스 요리를 쏘겠다고 하는데 글쎄…….”

원활하고 평범한 식사 시간을 위해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낀 제휘는 불편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

“…….”

달그락, 달그락. 수저가 부딪히는 차가운 금속음만이 식탁 위를 스쳤다.

제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틀렸다. 아무리 유능한 매니저라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인지한 것이다.

특히 시우의 주변으로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이 거의 한파 주의보가 내릴 지경이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시지.’

제휘는 시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오랜만에 헌터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차에서도 저 솜사탕의 옆자리에 앉더니 밥을 먹을 때까지 옆자리라니. 만일 이곳에 은하가 없었더라면 눈앞의 밥과 반찬들이 냉동식품이 되고도 남았을 테다.

“선배, 여기요.”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던 시우가 깍두기가 담긴 그릇을 은하 앞에 스윽 내밀었다.

“이거, 그 집 깍두깁니다. 선배가 좋아하는 거기…….”

시우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은하가 희미하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김윤례 할매 국밥?”

“네, 거기요. 좋아하셨잖아요. 여기 깍두기.”

옅은 그 미소에 이끌리듯 시우의 입가도 느슨해졌다.

이렇게 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얼마 만인지……. 게다가 마주 보고 미소 짓는 신 대표님과 차 헌터님을 보고 있자니, 제휘는 마치 마음속에 따듯한 봄볕이 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만일 오늘 이 자리가 세 사람만의 식사였더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깍두기를 집어 먹던 은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안 먹어?”

그들을 따라 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도통 수저를 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단을 향해서였다.

식탁 위 반찬을 한 번, 눈앞의 은하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본 에단이 돌연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먹여 주라.”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정작 은하가 아니라, 그의 옆에서 조용히 수저를 들던 시우였다.

홱!

바람을 거세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우의 고개가 에단을 향해 돌아갔다.

놀라기는 제휘도 마찬가지였다.

시우가 귀국하기 전, 제휘는 은하가 에단과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헌터님이 저 솜사탕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본 적은 없었는데……?

“…….”

시우가 뚫어져라 에단을 응시했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으나 표정만으로도 그의 속내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 새X가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마치 그런 얼굴이었다.

은하 역시 시우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 동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로잡고 식사를 이어 갔다.

“네가 알아서 먹어.”

그래, 선배 말이 맞다.

보아하니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먹여 달라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참 기가 찼다. 저런 헛소리에 일일이 반응을 하는 것도 감정 소모, 시간 낭비다. 그렇게 판단한 시우의 얼굴에 강 같은 평화가 돌아왔다.

“식기 전에 얼른 드시죠, 선배.”

저런 건 무시하고. 멈추었던 수저를 움직여 멸치조림을 향해 뻗으려는데,

“그때는 먹여 줬잖아. 왜 지금은 안 먹여 줘?”

멈칫.

에단이 옆에서 또 해괴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식탁에 턱을 괸 에단은 시선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은하를 바라보았다.

“나 아파.”

그리고 보란 듯이 들어 보이는, 붕대가 감긴 왼쪽 팔. 붕대는 오피스텔에 돌아오자마자 은하가 감아 준 것이었다.

“…….”

지금까지 반쯤 에단을 무시하고 있던 은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른손잡이인 그는 왼팔이 다쳤다고 해도 수저를 옮기는 데에 무리가 없을 텐데 왜 이런 어리광을 부리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저 왼팔조차도, 이미 거의 다 나은 것을 확인했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은하는 에단이 다친 원인 중에 자신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만이야.”

은하가 그렇게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빠드득.

시우의 손안에서 수저가 용수철처럼 휘어졌다. 제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대표님, 그거 철인데…….’

* * *

그날 저녁.

은하의 오피스텔에서 식사를 마친 뒤 대표님을 저택까지 모셔다드리는 길, 제휘는 목에 깁스라도 한 사람처럼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차 안을 가득 채운 공기만으로도 시우의 기분이 얼마나 저기압인지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무거운 분위기에 어깨가 짓눌리다 못해 땅으로 꺼질 지경이었다. 신호가 걸린 참에 은근슬쩍 라디오라도 켜려고 손을 뻗는데,

“그 남자 말이야.”

뒷좌석에 있는 시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선배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나?”

“아, 헌터님께서 그자에게 도움을 좀 받았다는 것은 듣긴 했습니다만.”

“도움? 어떤.”

“그건 저도 잘……. 헌터님께서도 그자에 대해 자세하게는 말씀하지 않으셔서요.”

“…….”

“제, 제가 내일이라도 한번 여쭤볼까요?”

“아니, 됐어.”

생각에 잠긴 듯 시우의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처음 수여식장에 도착하고 은하를 발견했던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현장에 막 도달한 시우는 심안 은유엘과 그의 일행이 은하를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은하는 크게 다치지 않은 상태였고, 오히려 그 뒤편에 서 있던 에단이 중상을 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심안과 그의 무리는 은하가 아니라 에단을 공격했다고 볼 수 있었다.

‘왜?’

시우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다.

심안이 이끄는 조직 ‘산군’. 다른 말로는 은둔자들.

그들은 일반적인 헌터 길드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의뢰를 받지 않고, 게이트가 열려도 경매에 참여하거나 토벌을 행하지 않았다.

또 심안을 포함한 산군의 모든 자가 비각성자 혹은 각성은 했으나 정식으로 헌터 자격증을 발급받지는 않은 미등록자라는 게 특이점이었다.

시우는 만일 심안이 글로벌 랭킹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까지도 천왕봉(天王峯) 어딘가에 몸을 숨긴 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깥으로 알려진 산군이라는 조직은, 그 정도로 속세에 관심이 없고 베일에 싸인 괴짜들이었다.

다만 시우는 헤드 헌터 모임에서 몇 번 심안을 만난 적이 있었다. 자연스레 심안의 휘하인 가란과 의영이라는 사내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들은 비밀이 많은 자들이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예의를 아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처음 보는 남자를 공격했다니. 몬스터도 아니라 인간을. 산군의 선악이나 행동 가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점은 또 있었다.

산군이 그자를 공격한 것을, 선배는 몸을 던져 막아 냈다. 시우가 딱 그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 그자에게 날아드는 표창을 양산으로 떨쳐 내는 은하를 보았으니 확실했다.

‘왜?’

선배는 왜 그를 감쌌을까.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식사를 챙겨 주고, 잠을 재워 주면서까지, 선배는 왜 그를 돌보고 있는 거지?

현대에서는 머리카락이나 눈 색으로는 인종을 구별할 수 없으니 제외하고…… 그의 이목구비는 어땠던가. 시우는 에단의 생김새에 대해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에단의 인상은 굵직굵직하고 커다랗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가느다랗고 유려한 형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서양보다는 동양 계열의 외모. 게다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헌터계에 발을 들였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자는 듣도 보도 못 했다.

“그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음, 헌터님께서는 ‘에단’이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닉네임이나 이명일 가능성도 있으나 만일 그것이 이름이 맞다면 한국의 형식은 아니었다.

……에단.

시우는 속으로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시우가 에단을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는 또 있었다. 신수 개의 화신인 그의 후각이 알려 주었다. 그는 여태껏 어디에서도 맡아 본 적 없을 정도로 독특한 체취를 풍기고 있었다.

인간이라 하기에는 희미하고, 몬스터라 하기에는 그 정도로 고약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식물이나 짐승의 느낌도 아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한 냄새.

“…….”

아무래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생각을 마친 시우는 슬쩍 턱을 들어 룸미러를 통해 제휘와 시선을 맞추었다. 또 한 가지 알아볼 것이 있었다.

“아무 곳이나 적당한 집 좀 알아봐.”

“집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우는 카시트에 느슨히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먹여 주라.’

피곤한 건지 불쾌한 건지 모를 감상에 잔뜩 미간을 좁힌 시우가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덧붙였다.

“서울에서 멀면 더 좋고.”

* * *

다음 날.

눈을 뜬 은하는 휴대전화에 도착해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제휘로부터였다.

[박 매니저] [오전 7:53] 헌터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오전에 급하게 부동산을 들러야 해서 아마 오후쯤이나 돼야 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ㅠㅠ

[박 매니저] [오전 7:53] 냉장고에 미리 넣어 둔 반찬이 있으니 일단 아침 식사는 대충 그걸로 때우시고요

[박 매니저] [오전 7:53] 가는 길에 혹시라도 맛있어 보이는 게 있으면 포장해 갈게요!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메시지 남겨 주십쇼!! (이모티콘)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은하는 제휘가 없어도 식사 정도는 무리 없이 챙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휘는 제가 없으면 은하가 굶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나] [오전 8:11] 네.

짧은 답장을 보낸 은하는 액정 속 제휘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딱 그러셨다. 늦잠을 자서 급하게 등교하려는 은하를 잡고 빵 한 조각이라도 먹이려고 하셨지. 지금의 제휘처럼 말이다.

그때는 그것이 귀찮게 느껴진 적도 있었는데…….

[나] [오전 8:12]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은하는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님방 쪽이 조용한 것을 보아하니 에단은 아직 꿈나라인 모양이었다. 부상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수면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진 것 같았다.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지.

은하는 침대를 바로 벗어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짹짹짹…….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들려오는, 평화로운 여느 날의 아침이었다. 창문 밖 먼 곳을 응시하던 은하는 수여식 때 만났던 나비 여인을 떠올렸다.

‘앞으로 한 달 뒤, 네뷸러로 오렴. 주인님께서 널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단다.’

‘네가 오기만 하면 길이야 열릴 테니까.’

‘어쩔 거야? 약속하겠니?’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의무 따위 은하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약속과는 별개로 네뷸러, 탑에 는 진입할 생각이었다.

나비 여인에게는 ‘주인님’이 있다고 했다.

만일 그가 나비 여인의 죽음을 인지했다면, 그리고 이야기한 시일이 지나도록 은하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또다시 이쪽으로 수하를 보내올 수도 있다. 어쩌면 이번에는 조금 더 난폭한 방법을 쓸지도 몰랐다. 은하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했다.

게다가…….

‘곧 ‘지구’로의 통로가 생길 겁니다. 당신이 열고 온 그런 문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통로가 말이죠.’

아스트가 말한 ‘통로’가 지구에 갑자기 등장한 저 정체불명의 탑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직접 들어가 어떤 곳인지 확인해야 하겠지. 다들 말하듯, 저 11개의 탑들이 인류에게 있어서 정말 위협적인 거라면.

‘없애야겠지.’

그것이 이 힘의, 각성의 대가. 무력하게 잃기만 했던 과거에 대한 속죄이자 복수.

은하는 침대 시트 위로 작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비로소 다시 얻게 된 둥지와 인연을,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지키겠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최소한의 사전 조사가 필요해.’

S급 헌터인 민주나 아연, 시우는 탑에 진입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최상층에 도달하여 ‘탑의 주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현재까지 탑을 봉쇄한 헌터는 단 한 명. 심안.

하지만 그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수여식 때의 태도로 보아서는 힘들 것 같은데.

‘어딘가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기를 수 분.

‘에단에게 물어볼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젓는다. 에단에게 탑에 대한 것을 물어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 버리거나 ‘글쎄’ 하고 아리송한 대답을 흘리며 웃어넘기는 것이 대다수였다.

어쨌든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회를 봐서 에단에게 다시 물어보든가, 정보를 얻을 만한 다른 구멍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우선 그건 접어 두고.’

은하는 실내화를 신고 침실을 나섰다.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화장실도 냉장고도 아닌 현관문이었다.

문의 구멍을 통해 바깥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은하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 쌓인 택배와 수십 개의 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최근 은하의 하루는 이 모든 것을 집 안으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했다.

적당히 커피를 내린 은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어느 쪽부터 정리하지?’

산더미처럼 쌓인 우편물들을 바라보며, 은하는 호로록 커피를 삼켰다. 늘 제휘가 도와주던 일을 혼자 하려니 까마득하기는 했다.

팬레터로 추정되는 알록달록한 봉투도 사이사이에 보였다. 원래라면 팬레터는 그 헌터가 속한 길드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무소속인 흑염의 프린세스의 경우 협회에서 사서함 역할을 대신했다. 이렇듯 쌓인 팬레터를 한꺼번에 은하에게 전달해 주는 식이었다.

물론 은하의 경우, 그것도 최근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 여태까지 팬레터가 도착할 수준의 인기를 누렸던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가만히 자리에 앉아 각종 팬레터, 엽서, 택배, 선물, 초청장들을 정리해 나가던 중, 문득 한 봉투에 시선이 멈추었다.

‘이건…….’

깔끔한 백색 무지 봉투 위로 푸른 물감으로 수려하게 그려진 호랑이 수채화. 그리고 그 아래 붓으로 휘갈긴 듯 새겨진 한자, 산군(山君).

‘추후에 치료 비용을 포함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에서 조만간 사람을 보내죠.’

글로벌 랭킹 12위, 심안 은유엘로부터 온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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