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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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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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불청객 (2)
2023.01.29.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새장 속 새를 쓰다듬던 안드레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수여식에 흑염의 프린세스가 참여한 모양이더라.】”
멈칫.
이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적막 속에서 위스키 잔에 담긴 각진 얼음이 딸깍, 하고 움직였다.
‘수여식에 은하가?’
오늘 서울에 위치한 대형 컨벤션 센터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훈장 수여식이 열린다는 사실은 이준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준은 그녀가 그곳에 참석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준이 아는 은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기피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즐기지도 않는 유형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세계 헌터 기구뿐만 아니라 한국 헌터 협회와 길드 등의 집단, 온갖 취재진이 들끓는 그곳에 참석했다니. 그것은 필요에 의해서였을까, 강요에 의해서였을까.
“【…….】”
──갈 것을 그랬나.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은회색 눈동자가 손아귀 속 위스키 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새장에서 시선을 거둔 안드레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들은 바로는, 그곳에 작은 사고가 있었나 봐.】”
“【사고?】”
“【협회 측에서 쉬쉬하고 있기는 한데, 그 사건이 네뷸러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요한?】”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준이 주변을 둘러본다. 겉옷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안드레아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진정해, 이미 정리됐대. 아무런 인명 피해도 없었고.】”
“【…….】”
“【그녀도 무사해.】”
안드레아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그 말에, 이준은 그제야 스르륵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던지듯 내려 두었던 위스키 잔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꼴깍꼴깍 위스키를 몇 모금 넘기더니,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휴대전화를 켜 인터넷에 흑염의 프린세스를 검색해 보기를 몇 분. 이준은 탁, 하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안드레아의 말대로 은하는 수여식을 마친 모양이었다. 인터넷 전체가 난리였다. 다행히 사고에 관련한 이야기는 없었다.
“…….”
위스키 잔을 손에 쥔 채 이준은 생각에 잠겼다.
그 애를 본 날, 이준은 인천항 근처에서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러한 목격담이나 신고는 인터넷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고는 했다. 그 대부분은 장난, 소위 말하는 ‘어그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은 인천항으로 향했다. 그것이 진실일지 가짜일지는 몰라도, 은하가 귀환한 이상 괴담 속 존재를 가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는 이가 생길 것이다. 그것은 은하의 명예를 위협할 것이 확실했다.
다행히 그 목격담은 진실이었다. 이준은 그곳에서 괴담 속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와 마주한 은하를 목격한 순간, 이준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은하를 대신하여 ‘그것’을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기 전에 은하는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리를 떴다.
‘조만간 네 쪽으로 찾아갈게.’
……그날로부터 벌써 며칠이 흘렀나. 체감상으로는 몇 개월은 흐른 듯했다.
그사이 은하는 수여식에 참여한 건가.
너덜너덜해진 탁상용 달력을 흘끔 확인한 이준은 속이 타는 듯 위스키 잔에 입을 가져갔다.
늘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던 금발은 얼마나 만지작댔던지 이준답지 않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비친 은회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먼저 찾아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준은 금방 머릿속을 정리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은하가 먼저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기다려야지. 계속해서, 며칠이든.
위스키 잔을 만지작대던 이준은 멍하니 턱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그의 은회색 눈동자가 일순 흐려진다.
‘하지만…….’
시선만을 움직여 방금 보았던 탁상용 달력을 또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위스키 잔에 입을 가져간다. 그리고 몇 초 뒤, 희미하게 고개를 젓는다.
맞은편에 앉은 안드레아는 그렇듯 산만한 이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이준과 알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라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다행이기는 한데……. 이제는 하루 종일 달력을 확인하고 한숨을 푹푹 쉬어 대니,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후.”
또 한 번 느릿하게 숨을 뱉은 이준은 비어 버린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좀처럼 시간이 가지 않는, 늦은 오후였다.
* * *
은하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그쪽은 알아서 처리해. 협회장에게는 내가 따로 전달하도록 하지.”
탁.
통화를 마친 시우는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주인공인 흑염의 프린세스를 곧장 데리고 와 버렸으니 자연스레 뒷감당을 해야 할 일이 줄줄이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우는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뻗는 찰나,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배가 돌아왔다.
처음 제휘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로만 알았다.
‘차은하라고 해. 내 이름.’
──고마워, 신시우.
남해안 게이트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시우의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후 시우는 은하를 그곳에서 빼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불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이 무색하게 흐르는 동안 시우가 가장 처음 깨달은 사실은 바로, 자신이 너무나도 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1세대 헌터인 선배의 힘을 빌려 늑대에서 벗어나고자 한 뒤, 뒤늦게 계약을 해지하고 스스로 일어서고자 했지만, 그것마저 이뤄 내지 못했다. 결국 은하의 도움을 받고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가 오롯이 혼자서 해낼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시우가 두 번째로 깨닫게 된 사실은──.
“……선배.”
시우가 오피스텔에 들어서자, 소파에서 캔 맥주를 홀짝이던 은하가 현관으로 나왔다.
은하는 들어오라는 듯 집 안을 향해 손짓했고, 신발을 벗은 시우는 조용히 실내로 들어섰다.
주방 쪽에서 탁탁 채소를 써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휘가 한창 식사를 준비 중인 모양이었다. 거실에는 TV 예능 프로그램 속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옅게 깔려 있었다.
“통화는 끝났어?”
다시 소파에 앉은 은하는 TV를 끄며 물었다. 넓은 거실에 깔려 있던 유일한 소음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며 짧게 답해 본다. 이상하게 심장이 조여 왔다.
시우가 지하에서 통화를 하는 30분 동안, 제휘와 함께 먼저 집으로 올라온 은하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긴 머리카락을 대충 높게 올려 묶은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지? 시우는 미간을 좁히고 생각해 보았다. 3년 전에는 자주 봤던 이 편안한 풍경이, 그녀의 모습이, 지금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새 맥주 캔을 집어 든 은하가 시우를 향해 가볍게 눈짓했다.
주춤주춤 은하에게 다가간 시우는 캔을 받아 들고 소파 끄트머리, 그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슬그머니 앉았다.
푸쉬익─
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시우는 맥주 캔에 조용히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목젖이 크게 한번 움직였고, 그것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
“…….”
살짝만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선배가 있는데, 분명 그녀에게 할 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목이 맘처럼 움직여 주지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먼저 입을 연 것은 은하였다.
“매니저님이 그러시더라. 지금은 네가 늑대를 이끌고 있다고 말이야.”
“……그렇게 됐습니다.”
“어때?”
“……바쁩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시우가 덧붙였다.
“책임이라는 게 생각보다 무거운 것이더군요.”
그러자 은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
그 웃음의 기색을 따라 살며시 시선을 들었다.
“확실히, 조금 달라졌네. 3년 전에 비해서.”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불쑥 마주쳐 버린 시선에 시우가 소리 없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환기를 위해 제휘가 발코니 문을 살짝 열어 두었던 걸까. 바람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수수하게 휘날리며, 시우의 코끝에 은하 특유의 체취가 닿았다. 약간의 피 냄새가 섞인, 시원하고도 말끔한 향.
“선배는, 그대로네요.”
시우는 속삭이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선배를 만나면 할 말이 많았다. 만일 머릿속에 메모장이 있다면 수십 장이어도 부족할 만큼 아주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말들 따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우의 속을 채우는 단 하나의 감정.
“……돌아오셔서 기뻐요.”
그 한 줄만이 전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시우는 저도 모르게 은하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 듯,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얽혔다.
은하는 조금 놀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흠칫 놀란 시우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우는 웃음기가 없는 얼굴로, 제 손가락 마디마디를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홀린 듯 응시했다.
한참을 그곳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시선이 서서히 올라와 은하의 검은 눈동자에 닿았다.
사라락…….
새하얀 거실 커튼이 소파 곁에서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선배.”
시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지난 3년간, 저는 계속 선배를──.”
그러나 시우는 채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를 불쑥 비집고 들어온 웬 불청객 때문이었다.
“둘이 뭐 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소파 뒤쪽에서 상체를 숙인 채 턱을 괸 에단이 비스듬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와 얼음처럼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친다.
스르륵.
은하는 시우의 손에 부드럽게 얽혀 있던 제 머리카락을 소리 없이 빼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시우는 딱딱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