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9)화
(179/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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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이질적인 향을 쫓아
2023.01.26.
수여식은 어찌어찌 종료되었다.
이후 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각종 매스컴 관계자들이 은하를 향해 썰물처럼 밀려들었고,
‘헌터님, 뒷일은 제게 맡기고 부디 먼저 가십시오……!’
제휘는 몸을 던져 그들로부터 은하를 지켜 냈다. 그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무사히 대기실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은하는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 냈다.
‘잘한 걸까.’
막상 수여식이 끝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제 손바닥 위의 황금빛 메달, 로프티 헌터 훈장을 바라보았다.
로프티 헌터 차은하(Lofty Hunter Eunha Cha). 메달 중앙에 새겨진 금장이 눈부셨다.
세계 헌터 기구 총장 오스틴은 거절하는 은하에게 기어코 훈장을 건넸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니, 세계 헌터 기구의 체면이니,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니 거절은 거절한다.’ 뭐 그런 말이었다.
‘받아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은하는 훈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제휘도 기뻐하는 눈치였고, 상관없겠지.
아닌 척했지만 어깨에 꽤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인지 목과 연결된 승모근 부근이 뻐근했다. 어깨를 잡고 빙빙 돌리던 은하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겨를이 없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기실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할 에단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길을 잃었다거나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찾으러 가야 하나?’
은하는 벽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제휘가 알아서 쳐 내겠지만 협회장과의 만남이 곧 예정되어 있는 게 문제였다.
‘말도 없이 또 자리를 비우면…….’
이번에는 정말로 제휘가 엉엉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은하는 소파에서 슬쩍 떼어 내던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괜찮겠지.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도 했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은하는 소파에 등을 느슨하게 기댔다.
“…….”
벌떡. 그리고 3초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걱정이 되었다. 에단이 걱정된다기보다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우려되어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찾아보고 오자.’
매니저님, 미안해요. 속으로 사과를 삼킨 은하가 이윽고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똑똑─
누군가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벌써 제휘가 돌아온 걸까? 안 되는데. 은하는 슬쩍 문을 열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제휘가 아닌,
“누나!”
“유라 씨!”
녹색 망토를 두른 두 사람, 트릭스터 송민주와 군단의 부마스터 배준환이 있었다.
협회장을 포함한 대한민국 헌터계의 주요 인사들은 아마 필수로 참여할 것이라던 제휘의 말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누나, 오늘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진짜 나이스 타이밍! 완전 멋졌어요!”
“아…….”
민주는 은하에게 한 아름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준환 역시 곁에서 박수를 치며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오신 것을 알았더라면 진즉에 인사드리러 갔을 텐데요.”
준환은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다. 패밀리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라더니 민주는 정말로 은하의 생존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듯 은하의 표정이 묘해지자 준환은 짧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빙긋 웃었다.
“……하지만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무사히 귀환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른 패밀리 녀석들도 안부 전해 달라고 난리였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조만간 본부에 들러서 얼굴 한번 비쳐 주세요. 패밀리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럴게요.”
은하는 민주가 건넨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답했다. 그러자 그녀 곁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민주가 흐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나, 그날 일은 정말 죄송해요.”
그날 일이라면, 은하의 오피스텔에서 벌였던 무사 귀환 축하 파티를 말하는 것일 테다.
늦은 밤이 돼서야 눈을 뜬 민주는 마치 취한 것처럼 흐물흐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은하는 지하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운전기사에게 부탁해 민주를 본부로 돌려보냈다.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은하가 답하자 민주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도 진짜 죄송해요. 요즘 잠이 부족한가 봐요. 자꾸 그러네.”
……잠? 은하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날 일을, 민주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자 틈을 놓치지 않고 준환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스터. 마스터는 아직 미성년자고 한창 크실 나이니까 밤에는 주무셔야 한다고요. 매일 제조실에서 날이 밝도록 깨어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준환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꾸짖듯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민주가 이 일만큼은 저도 인정하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마스터, 협회장님이 아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먼저 가 보시죠.”
“아, 싫은데…….”
민주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은하가 물었다.
“협회장님이 민주를요?”
“예. 센터 근처 건물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어 조사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혹시 몰라서 저희 군단 측에 의뢰가 들어온 거고요. 마스터, 어서요. 저도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준환의 거듭된 재촉에 민주는 그제야 뭉그적뭉그적 몸을 움직였다. “누나, 좀 이따 봐요!” 그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은하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준환이 묘한 눈빛으로 민주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주어는 없었으나 그것은 민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민주가 보였던 이상 증세 말이다.
“……아마도 언노운 게이트에 진입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민주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준환이 은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밝던 그의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크게 다친 이후부터요.”
역시 그런 건가. 은하는 민주의 목에 있는 흉터를 떠올렸다. 준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보시다시피 마스터께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원인을 찾고는 있지만 워낙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요.”
게이트에 다녀온 이후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야 꽤 많았다. 공략 난도가 높은 던전일수록 현실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광경을 보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동료가 몬스터에게 한입에 꿀꺽 먹혀 버리는 장면이라든가.
그렇듯 견디지 못할 만큼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거나 죽을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돌아온 헌터들은 불면증이나 우울증, 무기력증을 앓는 일이 빈번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일단 그날 민주가 향했던 곳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언노운 게이트였다는 점부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평소에는 멀쩡하다가 가끔씩 사람이 바뀐 듯 이상 행동을 보인다는 점도 말이다.
그를 구슬려 병원에서 진단도 받아 보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이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 최고의 치유 헌터이자 마스터를 그 게이트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었던 닥터 플랜트마저 죽어 버렸으니, 마스터의 증세에 대해 알아낼 구석도 마땅치가 않아서 말입니다.”
준환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소문 끝에 찾은 외국 치유 헌터들도 민주의 증세에 대해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고, 목격자도 없는 데다 민주 본인조차 당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니 진실은 더욱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실정이었다.
‘원래 전갈한테 물리면 다 그래. 독에 ‘감염’된 거지.’
준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민주가 전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전갈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그런 이야기는…….”
준환이 고개를 갸웃했고 은하는 입을 닫았다. 그의 반응을 보니 짚이는 곳이 없는 듯했다.
문득 센터 왼쪽 건물에서 만났던 나비 여인, 그리고 무언가에 ‘주입’당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민주의 이상 증세와 연관이 있는 걸까.’
그때 준환이 다른 생각을 하는 은하 앞에서 이마가 땅에 닿을 듯 깊게 허리를 숙였다.
“어쨌든 지난번에는 큰 폐를 끼쳤습니다. 마스터를 대신하여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 괜찮으니 고개를 드세요.”
“하지만…….”
“다친 곳도 없는걸요. 그보다 민주가 걱정이죠. 이 일에 대해서는 저도 나름대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야 저희는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혹시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아주 조금이지만요. 우선 좀 더 알아보고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휙 등을 돌렸다.
“우선,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협회장이 민주를 불렀다고 하니, 그쪽 일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테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제휘가 크게 곤란해지지는 않겠지.
“아.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준환은 퍼뜩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은 낯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유라…… 아니, 은하 씨.”
그 말에 은하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미하게 눈언저리를 접으며 말했다.
“네, 또 봬요.”
* * *
컨벤션 센터 뒤편, 인적이 드문 공터.
근처에 관계자들의 흡연 장소가 있는지 미미한 담배 냄새가 머무르는 공간이었다. 주변에는 창고로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고, 그 외에 보이는 것은 나무와 울타리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은하의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다.
“…….”
에단은 발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희미한 불쾌감이 스친다.
대기실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도중 기분 나쁘고도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눈을 뜨자 은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에단은 바로 대기실을 벗어나 컨벤션 센터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은하를 찾아 헤매길 몇십 분. 그러나 이 주변을 가득 메운 기분 나쁜 기척 탓에 은하를 추적하기가 도저히 힘들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래서 이 기척을 연막탄처럼 이토록 짙게 깔아 놨다거나.
그렇게 한참을 발밑 돌멩이와 눈싸움을 하고 있던 도중, 문득 에단의 등 뒤로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선 인물은 은하가 아니다.
에단은 여전히 바닥의 돌멩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나한테 볼일 있어?”
“잠시 실례합니다.”
검은 천을 눈에 두른 남자.
글로벌 랭킹 12위, 심안 은유엘이었다.
낯선 목소리에 에단이 힐끔 눈만 돌려 뒤를 확인했다. 체구가 작은 유엘은 장신인 에단의 가슴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스르륵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에단이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휙 눈을 돌려 버렸다. 그대로 그곳을 벗어나려는 에단을 향해 유엘이 말했다.
“기다리세요.”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 유엘은 에단의 앞을 막아서지도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에단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 녀석.’
에단의 붉은 눈이 다시금 유엘에게로 향한다.
보아하니 숨긴다고 숨긴 것 같으나 에단의 민감하고 날카로운 감각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방금 피부를 스친 그 느낌. 그것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공격성,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살기의 한 종류였다.
“뭔데.”
비로소 유엘을 향해 몸을 돌려 선 에단이 무심한 눈빛을 던졌다. 말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턱을 드는 그에게서는 오만함마저 느껴졌다.
당연했다. 유엘을 상대로 주눅 들 이유 따위 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에단은 지금 은하를 찾아야 한다는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어디 소속의 애송이인지도 모르는 그를 상대하고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당신…….”
그 순간, 상대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입니까?”
이 정도로 직설적인 질문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걸까. 에단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정말 한순간일 뿐이었다. 에단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소 껄렁하게 물었다.
“그건 왜?”
맞다면 어쩔 거고 아니라면 어쩔 거지?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오히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에단 쪽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엘은 여유로운 에단의 태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홀에서 느낀 기분 나쁜 기척. 그리고 본관 근처 건물에서 일어난 괴상한 사건.’
유엘이 뛰어갔을 때, 이미 그 건물에서의 일은 일단락된 이후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날개 달린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가 현장을 확인해 본 결과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선명한 보랏빛 핏자국뿐이었다.
보라색 피는 몬스터의 상징. 그것을 발견한 이들 대부분은 여기에 몬스터가 등장한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유엘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시력을 잃은 뒤, 유엘은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생명 그 자체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기운, 개개인의 마력, 그런 것을 부감각이나 형태로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엘은 그 건물에 남아 있던 핏자국에서 분명 느꼈다. 인류 최초의 탑 봉쇄자인 유엘이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네뷸러의 냄새였다.’
단순히 근처에 게이트가 열려 흘러나온 몬스터가 침입한 것이 아니란 소리였다.
이후 해당 건물에서 빠져나온 유엘은 중앙 홀로 돌아가지 않고 ‘네뷸러의 냄새’를 쫓았다.
그리고 이윽고 발견한 것이다.
이 분홍색 머리카락의, 인간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기운을 가진 남자를 말이다.
“묻는 말에 대답하십시오. 당신, 인간입니까?”
유엘은 다시 한번 에단을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유엘을 응시하던 에단은 곧 흥미를 잃고 휙 등을 돌렸다.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에게 그런 것을 대답할 이유는 없었다. 저 인간의 정체가 궁금하지도 않았으며, 그다지 재밌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나려는데─
슈우욱, 팟!
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날카로운 물건이 에단의 뺨을 스쳤다. 다음 순간, 에단의 식은 시선이 또르륵 떨어져 발아래에 닿았다.
오른쪽 발 바로 앞에 박힌 기다랗고 예리한 그 물건은…… 푸른 날의 검이었다.
엄지를 들어 오른쪽 뺨을 가볍게 닦자 손가락 표면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단이 붉은 시선을 들어 유엘을 응시했다.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에단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검은 천 아래로 보이는 유엘의 입술이 삐딱해졌다.
“뭐가 재밌습니까?”
“그냥, 재밌잖아. 이 상황이.”
짧은 대꾸, 그리고─.
슈욱!
제자리에서 에단이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
기척이 사라진 것을 감지한 유엘이 주춤, 한 걸음 물러서 검을 부르듯 손바닥을 펼쳤다.
파앗!
바닥에 박혀 있던 그의 푸른 검이 마치 자석처럼 유엘에게 되돌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유엘은 그것을 에단에게 겨누었다. 잘 벼려진 칼날은 스치기만 하여도 깊게 베여 버릴 듯 매섭고 예리했다.
바로 앞에서 키득,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유엘은 에단이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텔레포트?’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유엘의 감각은 평범한 각성자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에단은 빠른 속도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일순 기척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났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너,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가까운 거리에서 에단이 물었다. 유엘은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은 채, 높낮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저벅─
에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유엘은 검을 그에게 겨눈 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검의 칼날은 그대로 에단의 옷에 닿았다.
날카로운 칼날에 에단의 상의가 베이며 그의 살갗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에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푸욱.
이윽고 유엘의 검이 에단의 옷을 뚫고 그의 가슴을 찔렀다. 하얀 티셔츠 위로 붉은 핏자국이 물감처럼 번진다.
유엘의 손가락 끝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방금 제 검이 그의 옷뿐만이 아니라 피부마저 뚫었다는 것을.
그러나 에단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기는커녕 여전히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저벅─
가슴팍에 검을 꽂은 채 에단이 유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다.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곳에서 에단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한참 위에서 유엘을 내려다보는 붉은 홍채.
그 가운데 위치한 동공이 맹수의 그것처럼 길게 찢어졌다.
“…….”
유엘은 소리 없이 검을 바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