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8)화 (178/306)


#178. 내 이름은
2023.01.25.


“이상한 기척?”

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면서 대기실을 뛰쳐나가시더니 지금까지 돌아오시지 않은 겁니다.”

제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수여식이 기대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는 단시간에 10년은 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혹시 괴도께서는 우리 헌터님을 못 보셨습니까?”

“못 봤어요. 저는 언니가 오늘 안 온 건가 했는데…….”

“하아, 정말 미치겠습니다.”

제휘가 마른세수를 하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는데,

“저기 있다! 흑염의 프린세스 매니저님!”

제휘를 찾고 있던 협회 관계자들이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제휘는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매니저님? 매니저님!”

“매니저님, 잠시 이야기 좀……!”

“저, 저는 지금 좀 바빠서!”

은하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들이 제휘를 잡고 ‘흑염의 프린세스가 어디로 갔냐’라고 물어보아도, 제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각성자가 아닌 제휘는 체력의 한계치가 뚜렷했던 데다, 이렇듯 한정된 공간에서 다수의 술래를 한꺼번에 따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사실은…….”

궁지에 몰려 버린 제휘는 복도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하나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중,

“응?”

“……?”

제휘는 물론 그를 둘러싸고 있던 관계자들도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모니터는 수여식이 열리는 중앙 홀을 비추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피커를 통해 소란스러운 소리가 복도 전체를 울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것이다.

모니터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제휘가 번쩍 눈을 떴다.

“헉! 헌터님!”

오른쪽 아래 자그맣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건 우리 헌터님이 틀림없었다.

“매니저님?!”

세상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휘는 환희에 찬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중앙 홀을 향해 뛰어갔다.

* * *

수여식이 열리는 중앙 홀에 도착하니 객석이 절반쯤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도록 흑염의 프린세스가 등장하지 않자, 그에 실망한 초청객들이나 일정이 바쁜 일부 기자들이 앞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왼쪽 건물의 상황을 알아챈 주최 측이 뒤늦게 그쪽으로 인원을 배치한 까닭도 있었다.

‘매니저님은…….’

홀에 입장한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며 제휘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 홀이 아니라 우선은 대기실로 돌아갈 것을 그랬나,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흑염의 프린세스다!”

은하를 발견한 누군가가 외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황급히 다가와 은하를 안내했다.

찰칵, 찰칵……. 어디선가 시작된 카메라 셔터음은 끊일 생각이 없었다. 은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남자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객석을 지나쳐 무대에 도착하는 동안 무수한 시선이 그녀를 따랐다. 일부에서는 숙덕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지금 대중에게 알려진 드레스 차림이 아닌 평범한 일상복 차림이었고, 심지어는 옷 군데군데에 선명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으니 말이다.

더러워진 옷, 전투를 하고 왔다는 것을 알리듯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직도 조금씩 피가 떨어지는 양산. 그런 몰골을 하고서 은하는, 흑염의 프린세스는 비로소 무대 위에 섰다.

“…….”

결코 끊이지 않을 것 같았던 카메라 셔터음이 멎었다. 은하를 향해 수군대던 사람들도 입을 닫고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적막.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다가온 것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년의 남성, 세계 헌터 기구 총장 오스틴 맥 클루니였다.

그는 은하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마이크를 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은 들리지 않았으나,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메달 형태의 훈장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진짜인가……?”

누군가 중얼거렸다.

“드레스 차림이 아니잖아.”

“피는 왜 묻은 거래……?”

“내가 봤던 모습이랑 너무 다른데.”

“저 사람이 글로벌 랭킹 1위라고?”

객석에 앉은 이들의 일부는 아직도 눈앞의 그녀가 진짜 흑염의 프린세스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찰칵, 찰칵…….

은하가 훈장을 건네받는 순간 몇 번의 셔터음이 이어지고 다시 멎었다.

무대 뒤쪽에서 나타난 정장의 여인이 은하에게 마이크를 전달했다. 은하는 조금은 어정쩡하게 마이크를 건네받고, 다른 한 손으로는 훈장을 쥐었다.

그리고 비로소 무대 정면의 객석을 향해 똑바로 섰다.

“…….”

“…….”

다시금 이어지는 적막. 그 속으로 삐이이이─ 하고 마이크 볼륨을 바로잡는 소리가 희미하게 스피커를 울렸다.

은하에게 마이크를 건넸던 정장의 여인도, 훈장을 전달했던 세계 헌터 기구 총장도, 모두가 무대에서 물러났다.

그곳에 남은 것은 오로지 차은하, 흑염의 프린세스뿐이었다.

은하는 그곳에서 천천히 객석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 그리고 그곳에 담긴 기대, 불신, 희망, 동경, 시기……. 하나로 압축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이 피부에 부딪혀 오는 듯했다.

은하는 보라색 피가 눌어붙은 손으로 천천히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계속 이것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은하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홀에 배치된 스피커를 통해 고요히, 그러나 확실하게 울려 퍼졌다. 정신없이 수첩 위로 펜을 움직이던 기자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취재진도, 다시금 숙덕이고 있던 초빙객도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로프티’는 많은 이들을 구한, 영웅급 업적을 이룬 헌터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호칭이라고 들었습니다.”

은하는 제 손바닥 속, 반짝이는 훈장을 향해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훈장은 반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어째서입니까?!”

한 기자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그에 은하의 입술이 주저 없이 열렸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고, 제게는 그들을 도울 만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왔습니다. 단지 그 정도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은하의 대답에 중앙 홀이 술렁였다.

객석에 앉은 이들은 서로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무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닥댔다.

이번에는 다른 기자가 목소리를 냈다.

“혹시 훈장을 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은하의 새까만 눈이 힐끗 그에게로 향했다. 기자는 조금 주춤한 듯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흑염의 프린세스의 진위를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는데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뒤를 이어 초빙객 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진짜 ‘흑염의 프린세스’입니까?”

찰칵, 찰칵…….

한동안 멎었던 카메라 셔터음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은하가 곳곳에서 터지는 플래시의 반짝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때, 객석 가장 뒤쪽 문이 열리며 누군가 홀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잔뜩 흐트러트린 채 숨을 헉헉대며 뛰어든 남자. 넥타이가 삐뚤어진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달려온 그녀의 매니저, 박제휘였다.

무대 위에 선 은하를 발견한 제휘의 눈이 일순 흐릿하게 번진다. 감정을 억누르듯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이다.

‘이때까지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오늘 그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마치 은하보다 몇 배는 더 고생한 얼굴로, 제휘는 그런 말을 했다.

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제휘의 얼굴에 은하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화르륵!

“……!”

“저, 저건…….”

돌연 작고 붉은 불꽃이 홀 군데군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은 결코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어두컴컴하던 객석이 환하게 물들며,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던 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밝혀졌다.

은하의 눈에 뒤늦게 홀에 입장한 두 그림자가 보였다. 수호자 칼스와 그의 딸이었다. 작은 소녀는 무대 위 은하를 향해 “공주님!” 하며 붕붕 손을 흔들었다.

휘리릭…….

그에 반응하듯 작은 요정처럼 반짝이던 불꽃들이 마치 춤을 추는 양 공중을 날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대중이 알고 있는 것처럼 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나비처럼 공중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불꽃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 따위 없었다.

헌터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라면 모두 알았다. 애초에 자연 계열 헌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희귀하다는 것을. 그중에서도 이렇듯 뚜렷한 화염의 주인은 지금껏 오직 한 명이었다.

그것은 한국 헌터 역사 저편에 고이 잠들어 있던 자.

그래서 지금까지는 알려진 적이 없었던 자.

“제 이름은 차은하.”

오늘 수여식에 참여한 이유는 이 훈장을 손에 거머쥐기 위해서도, 정식으로 호칭을 부여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늘 여기서 헌터님이 누구인지, 비로소 모두의 앞에서 알릴 기회가 온 거라고요.’

따스하고 밝은 불꽃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은하가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이명 흑염의 프린세스로 활동하고 있는─”

F급도, 컨셉도, 로프티도,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

“헌터입니다.”
 

167464973519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