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7)화 (177/306)


#177. 나비 여인의 전언
2023.01.24.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긴 적발을 가진 여인이었다. 긴 속눈썹을 가진 눈은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으며 이마에는 길고 가느다란 더듬이가 돋아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저 날개.’

팔랑─

여인의 등 뒤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보랏빛 거대한 날개.

게이트 내부에서처럼 몬스터의 명칭이나 레벨을 알리는 시스템창이 따로 뜨지는 않았으나, 은하는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늦었네.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여인이 은하를 향해 생긋 웃는 순간,

“……!”

은하의 눈이 커졌다.

나비 날개를 가진 여인의 뒤편으로, 고치처럼 몸이 칭칭 감긴 사람들이 보인 까닭이었다.

사람들의 몸을 감싼 고치는 천장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나란히 진열된 모습이 마치 정육점에 진열된 고기를 연상시켰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아, 이거?”

여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등 분자를 고르는 중이야. 마냥 기다리고 있으려니 지루해서 말이야.”

“……뭐?”

“어디 보자, 얘는 좀 그렇고…… 이 남자는 너무 부실해. 이쪽은 좀 괜찮아 보이기는 한데, 흐음.”

그녀가 작게 손짓하자 손끝으로부터 작은 나비가 생성되었다.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한 남자의 어깨에 앉은 나비가 마치 꽃의 꿀을 빨 듯 주둥이를 쭈욱 내밀었다.

“크으윽……!”

고치에 칭칭 감긴 남자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리고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쯧,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해서야.”

나비 여인이 혀를 차는 순간,

화르륵!

은하의 어깨 위로 불꽃이 위협스레 떠올랐다.

“그만둬.”

“어머, 무섭게 왜 그래.”

은하의 경고에 나비 여인이 지레 놀란 얼굴을 했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고치 중 하나가 마치 방패처럼 그녀 앞으로 스윽 이동되었다.

은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반인들이 있는 이상 그녀를 쉽게 공격할 수는 없었다.

불꽃을 만들었을 뿐 저를 공격하지도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 버린 은하를 보며, 여인이 재밌다는 듯 키득댔다.

“말했잖아? 지루해서 그랬다고. 애초에 이건 내 본업이 아니야. 난 단지 그분의 말씀을 네게 전달하러 온 거란다.”

“말씀?”

“우선 불부터 끄고 이야기할까?”

나비 여인이 생긋 웃었다. 고치에 칭칭 감긴 남자가 시계추처럼 보란 듯이 눈앞에서 흔들린다.

‘……하는 수 없어.’

슈우욱.

은하는 일단 불꽃을 거둬들였다.

“잘했어.”

나비 여인은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날갯짓을 멈추고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앞으로 한 달 뒤, 네뷸러로 오렴.”

──네뷸러.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전언’을 마저 전했다.

“주인님께서 널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단다.”

“주인님?”

“그래. 나의, 그리고 탑의 주인이시지.”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거지?”

은하의 물음에 나비 여인이 입을 닫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살랑살랑……. 몇 번 부드럽게 날갯짓을 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쩔 거야? 약속하겠니?”

“…….”

이번에는 은하가 입을 닫았다.

여전히 손에 양산을 쥔 채 시선만을 움직여 여인 뒤쪽으로 보이는 일반인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고치를 잘라 낸다고 해도 의식이 없는 상태이니 전원을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아까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나비 여인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입한 것처럼 보였다. 독인지 환각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안에서 보았던 제정신이 아니었던 사람들. 만일 그들도 이자에게 무언가를 주입당한 것이라면…….

‘방법이 없어.’

은하는 해제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의 상태 이상을 풀기 위해서는 시전자가 직접 해제하지 않으면 안 됐다.

시간을 많이 소비할 수도 없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인질로 잡힌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이 갈지 알 수 없는 일인 데다, 지금쯤 컨벤션 센터에서는 수여식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스르륵.

은하는 양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한국에 있는 탑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어디든.”

나비 여인이 만족스럽게 눈을 휘었다.

“네가 오기만 하면 길이야 열릴 테니까.”

은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우선 그 ‘주인님’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고 어째서 자신을 정확히 지목하여 네뷸러에 초대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방법까지 써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은하는 다시 한번 그녀 뒤로 보이는 일반인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약속하면 이들을 다 풀어 줄 건가?”

“물론.”

“아니, 다르게 묻지. 넌 이들을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나?”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은하가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

나비 여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곤충처럼 커다랗고 징그러운 그녀의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털썩!

바닥에 달려 있던 고치들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이 퍼뜩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 여긴 도대체…….”

“이게 뭐야! 거미줄?”

“어, 엄마아……!”

보아하니 정신도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아까 은하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자도, 벽에 쿵쿵 머리를 박아 대던 자도, 주변에서 좀비처럼 어슬렁대던 이들도 하나둘씩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들 모두가 나비 여인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상황 파악은 둘째 치고 비명을 지르며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좋아, 약속하지.”

그러자 나비 여인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살랑살랑 부드럽게 날개를 흔들며 은하에게 다가왔다.

“잘 생각했구나.”

툭툭.

손을 들어 은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그녀가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좋은 일이 있을 거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볍게 은하를 지나쳤다.

사르륵, 눈앞에 반짝이는 보랏빛 가루가 흩날린다. 나비 여인의 긴 적발이 눈앞을 스치는 순간, 은하가 입을 열었다.

“잠깐.”

은하는 손에 쥔 양산에 불끈 힘을 주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

부웅, 둥근 선이 그려짐과 동시에,

빠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비 여인의 목이 각목처럼 꺾인다.

비명조차 지를 새가 없었다.

눈을 뜬 채로 데굴데굴 눈앞으로 굴러오는 그녀의 목.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채지 못한 거대한 눈이 끔뻑끔뻑 움직인다. 몸과 목이 분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은하는 양산을 드높게 들었다. 새까만 눈이 서늘한 빛을 머금은 직후, 양산이 직선으로 내리꽂힌다.

푸욱!

보랏빛 혈흔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얼굴에 튀었다. 뺨을 가로질러 턱 끝으로 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낸 은하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널 그냥 보내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어.”

* * *

수여식이 열리는 컨벤션 센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흑염의 프린세스 님께서 사라지셨다니요?”

세계 헌터 기구 측은 비상사태였다. 수여식이 시작된 지 약 30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흑염의 프린세스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찾아보겠다고 나선 박제휘 매니저 역시 자취를 감춘 상태.

“이대로 수여식을 종료하는 수밖에…….”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럼 어떡합니까? 훈장을 받을 주인공이 자리에 없는데. 지금 객석 좀 보세요. 이대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특종을 위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자리에 참석한 기자들의 불만도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본래 수여식 이후로 준비되어 있던 축하 공연을 급하게 앞으로 당겨서 시간을 때웠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불가했다.

수호자 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더 기다려 보았자 흑염의 프린세스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짜였던 거야.’

그래,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그녀가 몇 년 전 남해안 게이트에서 전사했고, 랭킹 1위라고 표기된 것이 단순한 오류였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이제야 돌아온 그녀를 인류를 구할 영웅으로 추앙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많은 동료가 탑에서 죽었고, 그 역시 다리를 잃었다.

이제 와서 랭킹 1위가 돌아왔다 한들,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후였으니까.

다만 공주님을 만나고 싶다던 딸에게는 무슨 말을 하며 기분을 풀어 줄지가 걱정이었다.

‘우선 돌아가자.’

홀에서 빠져나온 수호자 칼스는 딸 연우가 기다리고 있을, 컨벤션 센터 왼쪽 건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에서 건물을 지키고 있어야 할 보안 헌터들이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건물 안 대기실에서 수여식 종료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이들이 다급히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건물 전체가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불이 꺼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숨 가쁘게 도망치듯 뛰쳐나오는 남자를 향해 수호자 칼스가 물었다.

“아, 안에 괴물이 있어요!”

“괴물…… 이요?”

“빠,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남자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후다닥 뛰어갔다. 수호자 칼스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이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연우!’

딸이 건물 안에 있었다.

수호자 칼스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건물 안에 괴물이 있든 귀신이 있든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단지 그것만을 바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부서지거나 망가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 출현을 알리는 균열도 없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도 그러했듯 모든 불이 꺼져 있어 주변이 온통 깜깜할 뿐이었다.

저벅─

어둠 사이로, 고요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곳은 헌터계의 주요 인사가 모인 자리였다. 만일 방금 전 남자의 말대로 이곳에 ‘괴물’이 나타난 것이 맞다면, 그리고 그 괴물이 이 건물 전체를 어둠으로 뒤덮어 버린 것이라면, 그동안 누구 하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그자의 말이 거짓이거나, 그 정도로 ‘괴물’이 엄청난 레벨이라거나.

헌터로서의 촉이 말해 주기를, 아마도 정답은 후자.

저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수호자 칼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도 헌터다. 그는 곧 결연한 얼굴로 자신의 고유 능력인 ‘강철 방패’를 소환했다.

저벅─

발걸음 소리는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수호자 칼스는 방패를 쥔 손에 꾹 힘을 주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아빠……?”

문득 들려온 것은 어린아이의, 연우의 목소리였다. 방패를 올리고 있던 수호자 칼스가 그것을 아래로 홱 내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검고 긴 머리카락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긴 조그마한 여자아이. 그의 딸, 연우였다.

“연우야!”

“아빠아!”

여자의 품에서 뛰어내린 연우가 다다다, 하고 달려와 그에게 쏙 안겼다.

“연우야, 괜찮니, 응? 다친 곳은 없고?”

“응, 아빠! 나 아무렇지도 않아. 공주님이 구해 줬어!”

“공주, 님……?”

수호자 칼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응! 저기!”

연우가 오동통한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검지 끝에는, 방금 전까지 연우를 안고 있던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오른손에 쥔 새까만 양산에서는 보라색의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산뿐만이 아니었다. 말라붙은 물감처럼 선명한 핏자국이 얼굴과 옷 곳곳에 묻은 게 보였다.

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았던 탓에 단숨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다시 보니 확실했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가 중얼거렸다.

수호자 칼스를 힐끗 쳐다본 은하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손을 꼭 맞잡은 소녀를 눈에 담은 후에야 은하는 부녀를 지나쳐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 잠깐만!”

은하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수호자 칼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스르륵 뒤돌아보았다.

막상 그 까만 눈과 마주하자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듯 한참 동안 허공을 유영하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은하에게 조심스레 닿았다.

“……고맙습니다.”

아주 작고 흐릿한 목소리.

그러나 분명 은하에게 닿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따님이 참 예쁘네요.”

단지 그 한마디만을 내뱉은 은하는, 흑염의 프린세스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유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안녀엉! 연우는 은하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다가 배시시 웃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

수호자 칼스는 고사리 같은 딸의 손을 꼭 쥔 채, 그 방향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저 멀리 뒤늦게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보안 헌터들이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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