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6)화 (176/306)


#176. 위화감
2023.01.23.


대한민국 ‘태극’ 길드 소속 A급 헌터 ‘수호자 칼스’는 수여식을 앞두고 붐비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아빠, 나도 들어가면 안 돼?”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소녀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을 만나겠다고 기어코 그를 따라 나온 어린 딸, 연우였다.

“아빠가 말했지? 연우는 저 홀에는 못 들어가. 여기 아저씨 따라서 저쪽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금방 나올게.”

“나도 공주님 보고 싶은데에…….”

연우는 속상한 듯 울먹였다.

최근 너튜브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영상이 다시 확산되며, 연우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흑염의 프린세스 붐이 일었다고 했다.

‘레이스가 달린 검은 우산을 사 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원래는 고집 한 번 부리지 않던 착한 딸이 오늘따라 완강했다. 그렇게나 흑염의 프린세스를 만나고 싶은 걸까.

수호자 칼스는 곤란한 듯 딸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굽혀 딸과 시선을 맞추었다.

“연우야, 아빠 말 들어야지?”

“그럼 수여식이 끝나면 공주님을 만날 수 있어?”

“……말 잘 듣고 있으면.”

“정말? 알았어!”

연우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아빠, 다녀와! 공주님 사인 받아 와야 해!”

수호자 칼스는 마지막까지 공주님, 공주님, 노래를 부르는 딸을 센터 측 직원에게 맡기고는 수여식이 열리는 홀 안으로 향했다.

컨벤션 센터 중앙 홀은 마치 오페라 극장과 같은 형태였다. 넓고 높은 무대가 있고, 그 앞으로 수많은 객석이 깔려 있었다. 벽면에 붙은, 발코니 형태로 이루어진 박스석에는 특별히 초빙된 VIP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 이곳에는 얼굴이 널리 알려진 헌터계의 큰손들뿐만 아니라 신문에서나 보았던 S급 헌터 괴도까지 자리해 있었다. 저 멀리 녹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작은 소년은 분명 트릭스터일 것이다. 그 외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을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외국어가 들리는 것으로 추측하건대 국외 헌터계의 유명 인사들도 참여한 것 같았다.

그러한 거물급 인물들에 비교하자면 수호자 칼스는 A급이라 하여도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다리까지 다친 바람에 껍데기만 A급일 뿐, 다시는 게이트에 진입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 그가 버젓이 훈장 수여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지난 탑 4차 탐색 때의 공적이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수여식이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 부탁드립니다.」

벽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미리 배부받은 초대장에서 자신의 좌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수호자 칼스는 일반 객석, 그중에서도 꽤 뒤쪽에 앉았다.

“그런데 말이야, 진짜일까?”

문득 누군가가 수군댔다. 소리의 근원지는 수호자 칼스가 앉은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객석이었다. 젊은 두 헌터는 아직 막이 올라가지 않은 무대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짜겠지. 아까 못 봤어? 괴도랑 트릭스터는 물론이고 심안까지 참석했다니까. 정말로 흑염의 프린세스가 돌아온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 양반들이 이렇게 한곳에 우르르 몰려올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상하잖아.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나타난 걸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호자 칼스가 그곳을 향해 휙 목을 돌렸다.

“……가짜인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대화에 참여한 그를 향해, 두 헌터 역시 시선을 옮겼다.

수호자 칼스는 지난 탑 4차 탐색 때 헌터의 자가 치유력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왼쪽 다리의 감각을 잃게 되었다.

지금까지 시도한 수술 횟수만 세 번에, 재활 치료에 돈과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안 됐다. 현재는 국내 최고 제작 길드라고 칭송받는 망치 길드에서 주문 제작한 전투용 목발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게 없으면 이제 헌터 활동도 이어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게 흑염의 프린세스 탓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만일…… 만에 하나 랭킹 1위인 그녀가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다리를 잃지 않아도 됐을 텐데. 동료를 잃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신문에서 그녀의 귀환 기사를 목격한 순간, 그의 마음속 뭉게뭉게 떠오르던 검은 감정은 확실한 원망으로 자리 잡았다.

어차피 돌아올 거였다면 조금 더 빨리 돌아오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야 뒤늦게 귀환했다는 흑염의 프린세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오늘은 그녀의 진위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의 마음도 모르고 딸 연우는 공주님을 만날 수 있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떠올리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터 수여식이 시작됩니다. 회장에 계신 여러분 모두 자리에 바로 착석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무대를 드리우고 있던 붉은 막이 서서히 걷혀 갔다. 수호자 칼스는 굳은 얼굴로 무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훈장 수여식이 시작되고 가장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년의 남성, 바로 세계 헌터 기구 총장 오스틴이었다.

“우선 자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부터 전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지난 2031년 대한민국 남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초대규모 언노운…….”

그의 왼쪽 가슴에 달린 통역 배지 덕분에 이곳에 모인 수많은 헌터들과 관계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그의 연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자리의 저, 오스틴 맥 클루니는 오늘 세계 헌터 기구를 대표하여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정식으로 ‘로프티’ 칭호를 부여하고 훈장을 수여하고자 합니다. 그럼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흑염의 프린세스입니다.”

짝짝짝…….

박수갈채 소리가 이어졌다. 상단 조명이 움직여 무대 오른쪽을 비췄다.

그러나 박수가 멎을 때까지 그곳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

오스틴의 표정이 의문을 담았다. 박스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연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엥, 언니, 오늘 온 거 아니었나?’

이상하다. 분명 오늘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아까 언니의 매니저가 통로에 서 있는 것도 보았는데 말이다.

객석에서 흑염의 프린세스의 등장을 기다리던 다른 이들도 의문을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안 온 거야?”

“설마 펑크……?”

그럴 리가. 누군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수호자 칼스가 대화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뭐라 했습니까. 흑염의 프린세스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가짜였던 거죠.”

웅성웅성…….

수호자 칼스의 발언에 객석 여기저기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수여식을 여는데, 이 모든 게 짜고 치는 연극일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요……?”

“아주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어차피 랭킹 1위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이후에는 매스컴과 적당히 말을 맞춰서 그녀가 탑 공략에 참여했다고 기사만 띄우면 될 일이니까. 어차피 일반인들은 누가 탑에 참여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방법도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흑염의 프린세스는 랭킹 1위야. 해외 헌터계까지 주목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한국이 되지도 않는 연극을 꾸민다고? 차라리 그녀가 돈을 받고 국적을 옮겼을 거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 있겠는데.”

“다들 멋대로 떠들어 대는군. 만일 흑염의 프린세스가 복귀한 게 맞다면 너희들은 지금 영웅께 아주 무례한 발언을 퍼붓고 있는 거다.”

그로부터 일부 헌터들은 벌떡 일어나 누구 말이 맞느니 삿대질을 해 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 헌터 기구 측 사람들뿐만 아니라 컨벤션 센터 진행 요원들까지 투입되었지만 한번 시작된 언쟁을 잠재우기는 여간 쉽지 않았다.

‘헌터님…….’

한편, 무대 구석에서 제휘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던 은하는 수여식이 시작할 때까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협회 측 인사가 제휘에게 다가와 물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는 핑계도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음,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휘는 홀을 벗어나 후다닥 대기실로 향했다.

이후로도 객석에서의 갑론을박은 이어졌다. 진짜인 척하던 가짜 흑염의 프린세스가 수여식을 앞두고 도망쳤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심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객석에 앉아 있던 또 다른 헌터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심안. 객석 첫 번째 줄에 앉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사내를 향해서였다.

그는 인류 최초로 탑을 봉쇄한 자로,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글로벌 랭킹에 드는 헌터였다.

“…….”

분명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심안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스르륵.

말을 아끼고 있던 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기척…… 틀림없어.’

회장을 벗어나려는 듯 어디론가 향하는 심안. 그의 곁을 지키던 두 사내 역시 황급히 따라붙었다.

“수령님? 왜 그러십니까?”

“잠시 확인해 볼 게 있다. 너희는 여기 있어.”

그들을 떼어 낸 심안은 굳은 얼굴로 그곳에서 벗어났다.

이 센터 근처를 감싼 불쾌하고 매스꺼운 기척. 일반 헌터라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한 낌새였으나 인류 최초로 탑을 봉쇄하고 ‘그것’과 직접 겨뤄 본 심안만은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무언가 있다.’

심안은 걸음을 서둘렀다.

* * *

타다닷─!

날렵한 발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지다 한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걸음을 세운 은하는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했다.

‘여기야.’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컨벤션 센터 왼쪽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 입구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건물과 가까워질수록 희미하던 불쾌한 낌새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위화감…….’

컨벤션 센터 본관이 저토록 붐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쪽은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고 있지 않았다.

<3F 초빙객 및 관계자 대기실 →>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있었다.

은하는 저벅저벅 걸어가 유리문을 밀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스윽…….

은하가 다가서자 유리문은 그녀를 반기듯 스스로 열렸다. 자동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인? 아니면 함정?’

문 앞에서 잠시 고민도 해 보았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은하는 서서히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층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내 데스크나 복도, 모든 곳의 형광등이 꺼져 있고 건물 전체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유령의 집과 같은 모습이었다.

전기가 차단되었는지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은하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저벅, 저벅…….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은하의 발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2층에 도착하고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텅 빈 복도. 양쪽에 위치한 문들은 하나같이 꼭꼭 닫혀 있다. 1층에 비하여 불쾌하고 음침한 기운이 확연히 짙어진 것이 느껴졌다.

양산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은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 주님…….”

멈칫.

어린아이의 목소리다. 저 앞으로 보이는 모퉁이 너머였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휘익─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공격?’

눈앞에 휘둘러지는 커다란 주먹.

은하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움직여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주, 죽어…….”

처음 보는 남자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분명 몬스터가 아닌, 은하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은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걸까. 아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쿵, 쿵, 쿵!

이번에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은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남자 너머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벽에 세게 머리를 박아 대는 여자가 보였다.

그 밖에도 하나둘씩 어딘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잔뜩 겁을 먹은 듯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는 이, 목을 놓아 울고 있는 이, 화가 난 듯 고래고래 소리치는 이.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서 은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사라락─

그때 은하의 눈앞에 미세한 가루가 흩날렸다. 눈? 아니다. 손을 뻗자 손바닥 위로 가루가 내려앉았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이것은…….

“어서 와.”

홱!

갑작스럽게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1674471477415.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