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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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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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훈장 수여식
2023.01.22.
훈장 수여식을 위해 집에서 나오기 직전.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한 제휘는 다급하게 은하를 재촉했다.
“헌터님, 얼른요, 얼른!”
“아직 수여식이 시작하기까지 꽤 많이 남지 않았나요?”
“1분이라도 늦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의 헌터 생활이 바뀔 정도로 중요한 자리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집을 나서려는데 손님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에단이 어느새 일어나 뒤따랐다.
“은하? 어디 가?”
하암, 크게 하품을 한 에단이 졸린 눈을 비볐다.
단잠을 잤던 걸까, 그렇지 않아도 곱슬기가 있는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욱 헝클어져 마치 정돈되지 않은 양털 같았다.
잠결에 멍하던 붉은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 뒤, 에단은 은하가 목에 두른 빨간 목도리를 발견했다.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희미하게 말려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가 은하의 앞에 떡하니 섰다.
“응? 목도리까지 하고 어디 가는데. 나도 갈래.”
은하와 제휘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세상모르게 자더니, 막상 현관을 열고 나가려니 벌떡 일어나 이 말썽이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아니고.’
정작 은하의 신수 고양이도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에단의 성격상 누가 나가거나 말거나 별 관심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왜 이렇게 집사 챙기는 고양이처럼 따라붙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유 따위는 없고 그저 단순한 변덕일지도 몰랐다.
“어, 음…….”
한편 신발장에서 은하가 신을 신발을 꺼내 주고 있던 제휘는 예상치 못한 에단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내가 가면 안 될 것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에단이 제휘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인상이 한층 더 차갑게 보였다.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제휘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은하를 향해 휙 시선을 돌렸다. 도, 도와줘요, 헌터님! 그런 눈빛이었다.
“에단,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냐.”
은하가 에단 앞을 막아서자 제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 뒤로 쏙 숨어 버렸다. 그래요, 잘한다, 우리 헌터님!
그러나 에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삐딱하게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응,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집에서 기다려.”
가요, 매니저님. 은하는 제휘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에단이 아니었다.
“은하, 나도 데려가.”
에단은 은하의 빨간 목도리 끄트머리를 잡고 늘어졌다. 말투나 하는 행동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
은하는 사뭇 곤란한 눈빛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빨아 당길 듯 똑바로 은하를 향해 있었다.
에단의 콧잔등 위로 찡긋하고 미세한 주름이 지는 것이 보였다. 선이 얇은 입술이 묘하게 삐딱한 것이, 자신만 두고 외출하려는 은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은하는 그 순간, 불멸 길드 앞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과 퍽 비슷한 상황이었다. 혼자 다녀오겠다며 저쪽 벤치에서 앉아서 기다리라는 은하 말에, 그는 곧장 그 벤치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집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겠지.’
그런 웃지 못할 상상을 하며, 은하는 짧게 고민했다. 그냥 두고 가자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최근에 가출 아닌 가출까지 감행했던 에단이었다.
고민을 마친 은하는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약속해. 거기서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은하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알았어.”
혼자서 집을 지키는 것이 정말 싫었는지, 에단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어, 약속할게.”
“…….”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단 알겠다고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뭐 잘 알아들었겠지.
“매니저님.”
에단과 이야기를 마친 은하가 제휘에게로 휙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제휘는 ‘설마’ 하는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라고 했다. 결국 은하와 제휘는 에단까지 함께, 훈장 수여식이 열릴 컨벤션 센터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내색을 풀풀 풍기던 제휘였으나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불만과 껄끄러움은 흥분과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마! 우리 헌터님이 누군지 아냐! 팍 씨!”
앞쪽으로 빠르게 끼어드는 차가 있을 때마다 제휘는 되지도 않는 상황극을 해 댔다. 적잖게 신이 난 것이다.
“정말 이런 날이 오긴 오네요. 헌터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냥……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아무렇지도 않다니요!”
빠앙!
제휘가 핸들을 내리치자 크게 경적이 울렸다.
“오늘이 얼마나 역사적인 날인데요. 오늘 수여식이 끝나면 비로소 사람들이 헌터님을 ‘F급 컨셉 헌터 흑염의 프린세스’가 아니라 ‘글로벌 랭킹 1위 흑염의 프린세스’로 보게 될 거라고요. 그러면 몸값도…… 아니, 어쨌든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부와 명예를─.”
어쩌고저쩌고.
제휘의 열변은 그로부터 약 10분간 이어졌다.
이 수여식이 뭐라고 매니저님은 저렇게도 기뻐하는 걸까. 조수석에서 한껏 들뜬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은하는 불쑥 고양이에 대해 떠올렸다.
‘고양이가 있었더라면 아마 매니저님만큼 좋아했겠지?’
F급으로 판정받았을 때에도, 게이트 토벌에 참여할 때마다 타 헌터들에게 무시받아도 정작 은하 본인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럴 때마다 발톱을 세우며 역정을 내곤 했었다.
하지만 현재 흑염의 프린세스는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일로 영웅이 되었고 유명해졌다. 세계 헌터 기구 총장이 그녀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직접 방한할 정도였으니까.
고양이가 지금 곁에 있었고, 그래서 이 상황을 함께 겪고 있었더라면 덩실덩실 엉덩이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둥 아주 난리 법석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지금쯤 눈앞에는 노란 메시지창이 뒤덮여 앞을 보기 힘들 정도였으리라.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문득 은하는 깨달았다. 고양이가 없는 이 순간이 허전하다고 느끼고 있는 자신을.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양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고양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세 사람은 강남구에 위치한 초호화 컨벤션 센터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지만, 뒤쪽에 준비된 관계자 출입구로 쉽게 입장할 수 있었다.
오늘 은하는 망가진 드레스를 집에 두고 일상복 차림으로 이곳에 왔다. 사람들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만일 대중에게 알려진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면 입장부터가 난관이었을 테다.
“우와, 사람 좀 보세요. 이게 다 몇 명이야. 할리우드 스타가 방한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제휘는 저 멀리 인파를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도 그를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북적이는 사람들. 그 속의 작은 소녀에게 눈길이 갔다. 개미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조그만 몸으로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고 있는 모습이다.
“……어린아이도 와 있네요.”
“구경하러 온 거겠죠. 수여식에 참석하는 누군가의 친지일 수도 있고요. 아, 헌터님. 이쪽입니다.”
관계자 출입 통로를 지키고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와 몇 마디 나눈 제휘는 은하와 에단을 데리고 미리 준비된 대기실로 향했다.
“음, 우선 도착을 알리고 식순을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헌터님은 어쩌시겠어요? 내키지 않으신다면 이쪽에 계셔도 되고요.”
“여기 있을게요.”
제휘는 은하를 대신하여 협회장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을 만나러 대기실을 비웠다. 원래라면 흑염의 프린세스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나 은하가 사람이 많은 것을 불편해하는 데다 말주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 결정한 것이었다. 이렇듯 눈치 빠르고 센스 있는 점을 보면 제휘는 정말 천생 매니저였다.
한편 에단은 대기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 위에서 곯아떨어졌다. 그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기절하듯 잠드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저럴 거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지 궁금하기는 했다.
제휘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을 둘러보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
대기실에 비치된 생수병을 따던 은하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피부를 스치는 기이하고도 날카로운 감각.
은하는 저도 모르게 대기실 문을 향해 휙 시선을 돌렸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하고 한참 문을 노려보다, 저벅저벅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헌터님?”
그러자 마침 대기실로 들어오던 제휘와 딱 마주쳤다.
“어디 가십니까? 화장실이라면 대기실 안쪽에 개인 화장실이 있다고 합니다만…….”
“센터 주변에 이상한 기척이 있어요.”
“예?”
은하의 말에 제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뒤를 벅벅 긁었다.
“이상한 기척이라뇨? 저는 모르겠는데요.”
비각성자인 제휘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각성자라고 하여도 이처럼 미미한 수준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은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었다. 피부 위에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기분 나쁜 이 감각을.
“잠시 확인하고 올게요. 기분 탓일지도 모르니까.”
은하는 결연한 얼굴로 제휘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안 됩니다, 헌터님. 이제 5분 후면 올라가야 해요.”
제휘가 냉큼 그녀를 붙잡았다. 은하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읽을 수 없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우고자 한다는 것만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게이트가 출현한 걸지도 몰라요.”
“그런 거라면 단말기가 울릴 겁니다.”
“언노운 게이트라면요?”
“그건…….”
제휘가 입을 다물었다. 선뜻 다음 말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시선을 떨구었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은하를 쳐다보았다.
“헌터님, 이미 말씀드린 이야기지만 헌터님께서는 오늘 정식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로프티 헌터가 되실 겁니다. 로프티 헌터는 역사상 3명밖에 없었죠. 그 정도로 특별하고 고귀한 칭호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드려도 헌터님께서는 실감이 나지 않으실지도 모르죠. 이해합니다. 하지만 헌터님.”
제휘가 붉어진 눈시울을 들었다.
“이때까지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감정이 북받친 걸까, 제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은하는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제휘는 목 안에서 뜨겁게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꾹 억누르며,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기서 헌터님이 누구인지, 비로소 모두의 앞에서 알릴 기회가 온 거라고요.”
“…….”
“헌터님께서도 수여식에 참여하실 거라고 제게 말씀하셨잖습니까.”
“……하지만.”
“아뇨, 헌터님. 들어 주세요. 오늘 이 자리에는 헌터계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어요. 그만큼 방범도 보안도 확실하고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굳이 헌터님이 나서지 않으셔도, 큰일은 나지 않을 거예요.”
제휘는 매달리기라도 하듯, 애원하는 목소리로 은하의 앞을 가로막은 채였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면서요. 확실하지 않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런 거라면…… 그냥 오늘 한 번만 눈 딱 감고, 이대로 수여식에 참여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의 말이 옳았다. 오감에 예민한 은하조차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워낙 미미한 낌새였다.
‘그런데 만일, 이게 기분 탓이 아니라면?’
내 예감이 적중한 거라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래서 그때의 나처럼, 가족을 잃고 홀로 남는 이가 생긴다면?
은하는 주먹을 쥐었다. 컨벤션 센터 입구에 우글우글 몰려 있던 일반인들, 그리고 스쳐 가듯 보았던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고 있잖아.’
──저울대에 올릴 가치도 없는 문제란 걸.
대중에게 나를 알리고, 그로써 전투력과는 또 다른 ‘힘’을 생각할 시점이란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무력하게 떠나보냈고,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소장님을 잃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은하는 대기실 입구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은 양산을 손에 쥐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