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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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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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러브콜 쇄도
2023.01.21.
은하의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한 제휘가 차에서 내리려다 충전 중인 휴대전화를 챙겼다.
잠에서 깨자마자 방전된 것을 쥐고 나와 차에서 충전을 한 참이었다.
제휘는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울리는 여러 알림을 무시하고 베른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실버문 매니지먼트의 윤 과장이었다.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베른의 탑 17층 공략을 완료하셨다고요. 아, 당연하죠. 한국에서도 그걸로 뉴스 나고 난리인걸요.”
수화기 너머로 윤 과장의 들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휘의 입꼬리 역시 흐뭇하게 올라간다.
“그럼요. 간밤에 우리 대표님 속보들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살피느라 고생 좀 했어요.”
덕분에 오랜만에 늦잠을 자서 식겁했습니다. 제휘는 머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국의 S급 헌터 백랑 신시우. 어젯밤 그는 스위스 베른의 탑 17층 공략에 성공했다. 뉴스를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상자 수는 0명.
글로벌 랭킹 2위 엘리멘탈 마스터가 미국 몬태나주의 탑을 공략했던 때, 17층 공략 완료 시점에서의 사상자 수는 5명 남짓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탑의 위치는 달라도 17층이라는 난이도를 고려하였을 때, 시우는 이례적일 만큼의 성공을 기록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스위스뿐만 아니라 온 유럽과 전 세계가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번 임무로 아마 백랑의 몸값은 적어도 수십 억, 아니 수백 억은 뛰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 한국은 다른 일로 더 난리지 않아?」
“다른 일이요? 이제 막 일어나서 바로 출근하느라 확인하지 못했는데……. 대표님의 일보다 더 큰 뉴스라도 떴나 봐요?”
「조금 이따 확인해 봐요. 아마 깜짝 놀랄걸.」
윤 과장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대표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기 바로 직전, 제휘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대답에 바짝 굳어 버렸다.
“……네? 3일 후에 입국이요?”
윤 과장이 공유한 백랑의 귀국 일정이 제휘의 예상보다 늦어진 탓이었다.
“대표님께서는 오늘 오후에라도 당장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 하실 텐데요.”
「응, 그런데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서. 현지 인터뷰도 웬만한 건 다 취소했는데…… 중요한 일정만 간추려도 3일 후 비행기가 제일 빠를 것 같더라고요.」
윤 과장의 말에 제휘는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리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시우라고 하더라도 임무를 마치자마자 땡! 하고 한국으로 날아오는 일은 무리가 있으리라.
이런 기록적인 성취를 해냈으니 백랑을 취재하고 또 대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에게 임무를 의뢰한 유럽 중부 연합은 물론, 현지 길드나 방송국, 대사관까지 아주 떼로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을 무시한다고 해도, 정치적 소통과 교류가 얽혀 있는 집단의 경우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최소 3일간은 묶여 계시겠구나.’
제휘는 시우를 떠올리며 트렁크에서 짐을 꺼냈다.
“대표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기압이지, 뭐. 호텔 로비까지 한기가 퍼져서 아주 살얼음판이 따로 없어요.」
“하하하…….”
역시 예상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우선은 알겠습니다. 이쪽에도 그리 전달해 두겠습니다. 또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윤 과장님께서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마친 제휘는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현재 시간은 오전 9시 반. 헌터님은 일찍 일어나는 편이시니 지금쯤 배가 많이 고프실 것이다.
‘대표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숨겨야지.’
이미 TV나 휴대전화를 통해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기왕이면 서프라이즈가 좋을 테니까. 제휘는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참 사랑했다.
17층에 도착한 제휘는 곧장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려고 했다. 그런데.
“응?”
은하의 오피스텔 현관문 앞에 웬 등기 우편과 택배 상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도저히 문을 열 수 없을 정도의 높이였다.
제휘는 발에 치이는 수많은 봉투 중 적당한 것을 주워 들어 발송인을 확인해 보았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헌터 협회에서 왜……?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 곁에 있던 다른 봉투를 집었다.
“세, 세, 세계 헌터 기구?!”
이번에는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제휘는 은하의 식사를 준비하려던 계획도 잊고 현관문을 부수다시피 하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로부터 약 30분 후.
“세상에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랍니까.”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제휘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헌터님, 이거 진짜 헌터님 맞아요?”
불쑥 눈앞에 내밀어지는 그것을 확인한 은하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입에는 쌀밥 대신 간단한 토스트가 물려 있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은하는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답했다.
그녀의 대답이 제휘의 목소리에 비해 비교적 건조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었다. 헌터님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이러한 대화를 벌써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제휘는 두 번 정도 더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이게 일이 이렇게 된다고?’
대표님의 17층 공략 성공 건에 정신이 쏠려 있다 보니 확인이 늦어졌지만…… 아무래도 흑염의 프린세스 귀환에 대해 세계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다른 일로 더 난리지 않아?」
윤 차장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그는 바로 이걸 두고 이야기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현 세계 랭킹 1위 귀환의 파급력은 실로 엄청났다. 대한민국 협회는 물론 세계 헌터 기구까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
은하의 허가를 받은 제휘는 현관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택배와 우편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협회 측은 은하의 거주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헌터 등록증을 발급받을 당시 프로필에 입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정보를 설마 세계 헌터 기구에까지 넘겼을 줄이야. 아무리 은하가 랭킹 1위고 세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큰 인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엄연한 개인 정보 유출이 아닌가!’
이 건에 대해서는 추후 협회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해야겠다. 제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택배 박스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첫 번째 우편 내용물은 협회 출두 요청서였다. 여기 이쪽 택배는 1++ 등급 한우 세트, 커다란 꽃바구니, 그리고 이건…….
“포, 포션?!”
까무러치게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박스째 손에서 떨어트릴 뻔한 것을 간신히 잡아챘다. 제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포션. 체력이나 마나를 회복시켜 주거나 일정 시간 내에 획득 경험치를 배증시켜 주는 신비한 약물이었다. 특별한 제조 능력을 가진 헌터가 희귀한 드랍 아이템을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까닭에 한 병 구하는 것도 하늘에 별 따기.
헌터 옥션에서도 매년 10병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포션이 지금 이 박스 안에는 자그마치 20병이나 담겨 있었다.
‘이, 이 정도면 개인 정보 유출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기도…….’
아, 아니지! 제휘는 제 뺨을 철썩 때렸다.
그 외 다른 박스에도, 흑염의 프린세스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서와 함께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부터 벨이 끊임없이 울리더니…… 이런 게 와 있었네요.”
언제부터였는지 제휘의 곁에 다가와 있던 은하는 그를 도와 박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언론 플레이를 경계한 제휘는 평소에 은하에게 모르는 사람이 벨을 누르면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었다. 은하가 오늘 아침부터 현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헌터님. 그냥 편하게 식사하시라니까요.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다 먹었어요.”
“하지만…….”
“도와드릴게요.”
은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휘는 늑대의 자회사인 실버문 매니지먼트 소속이었다. 하지만 은하가 시우와 계약을 파기하며 흑염의 프린세스는 더 이상 늑대의 계약 용병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은하의 매니저를 자처하고 있었다. 은하가 언노운 게이트에서 돌아오지 않았던 3년 동안도 꾸준히 말이다.
물론 회사 측에서 분명 임금을 지급받고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버문의 대표 시우의 돈이지 은하가 지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여 가사뿐만 아니라 쓰레기 정리까지 도맡는 그를 보고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제휘는 자신과 여동생의 생명의 은인인 은하에게 평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은하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제휘가 생각하는 은하의 장점 중 하나였다.
“매니저님, 이건 여기에 두면 되나요?”
“아, 네. 감사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힘을 합쳐 포장재들을 단시간 안에 정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후 제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지금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흑염의 프린세스의 귀환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아주 혼돈 그 자체였다.
아까 윤 과장과 통화할 당시에는 배터리가 부족했던 데다 겨를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부재중 전화가 무려 98건이나 쌓여 있었다. 메시지 착신함 역시 폭발 직전.
발신인은 대부분은 모르는 번호였고 일부는 협회로 추측되는 번호, 또 일부는 수년간 연락 한 번 나눈 적 없던 다른 유명 길드의 운영부로부터였다.
간간이 국제 전화도 보인다. 시우와 윤 과장이 있는 스위스에서 걸려 온 것은 아니었다.
제휘는 우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휴대전화를 닫았다.
──바야흐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집 앞의 택배 박스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는 둘 곳이 따로 없어서 엘리베이터 코앞까지 침범할 수준이었다.
제휘는 오늘도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택배 박스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일에만 자그마치 2시간이 걸렸다.
“지금 인터넷이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흑프가 돌아왔다고 다들 확신하고 있어요. 오늘만 해도 제가 받은 전화가 몇 통인 줄 아십니까? 한국 협회는 당연하고 심지어 미국 협회에서까지 연락이 왔다니까요.”
다다닥 따발총을 쏘듯 빠른 어조로 오늘 있었던 일을 토로하는 제휘. 그 와중에도 손은 바쁘게 택배 상자를 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모습이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마치…….
“매니저님, 기분 좋아 보여요.”
“당연하죠.”
제휘는 물어봐서 뭐 하냐는 듯 즉각 답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헌터님의 귀환이 더욱 빨리 알려졌다. 많이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시기도 과정도 제휘의 계획과는 달랐고, 그 탓에 급하게 준비할 것들이 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휘의 휴대전화는 불이 난 듯 울려 대고 있었다. 덕분에 제휘는 최근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낮없이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하지만 즐거웠다. 기쁘고 뿌듯했다.
“이제야 우리 헌터님께서 빛을 보시게 되지 않았습니까.”
“…….”
은하의 까만 눈이 휙 제휘를 향했다.
제휘의 옆모습, 슬쩍 비치는 눈가가 촉촉했다. 제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는 척 그것을 닦아 냈다.
“세계 헌터 기구 총장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장 내일 오후에 말입니다.”
“세계 헌터 기구 총장?”
물론 은하는 금시초문일 것이다.
협회와 세계 헌터 기구를 포함한 관련 인사들이 그녀 본인이 아니라, 흑염의 프린세스의 대외적 소통 창구이자 그녀의 매니저인 제휘에게 연락을 취했던 까닭이다. 그것이 현대 헌터계의 암묵적인 질서였다.
헌터는 고유 능력을 바탕으로 전투를 하는 자. 그리고 매니저란 자신이 담당하는 헌터가 그 밖의 일을 신경 쓰지 않도록 보조하는 자였다.
길드가 있는 헌터라면 해당 길드의 마스터나 관리부가 길드원들의 일정을 조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길드가 없는 흑염의 프린세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제휘뿐이었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전화와 메일, 메시지가 그에게로 쏠린 실정이었다.
“네. 무려 세계 헌터 기구 총장이, 오로지 헌터님께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는 겁니다.”
제휘는 다시 한번 은하에게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은하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무슨 훈장이요?”
“모르셨어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헌터님은 한국 최초의 로프티 헌터시잖아요.”
“로프…….”
아, 그러고 보니 인터넷에 ‘흑염의 프린세스’를 검색했을 당시 프로필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뭔데요?”
은하는 정작 ‘로프티’라는 칭호에 대해 몰랐다.
“…….”
제휘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길어질 듯했다. 우선 로프티 헌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헌터님, 우선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어떤 걸 말이죠?”
“헌터님께서는 수여식에 참여할 의사가 있으십니까? 그곳에 참여하게 되면 현대에 살아가는 헌터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칭호와 훈장을 받게 되실 겁니다. 비로소 헌터님을, 흑염의 프린세스를 정식으로 세계에 알리는 첫 발자국이 될 테죠. 즉 다시 말씀드리자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휘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게 물들었다.
“이제 ‘이유라’로는 살 수 없게 될 겁니다.”
“…….”
“혹시라도 부담을 느끼지는 마십시오, 헌터님. 저는 지금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약속드립니다. 어떠한 결과이든 헌터님의 선택에 따르겠다는 것을요. 헌터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나요?”
내가 원하는 것.
은하는 그 순간 생각했다.
고양이, 민주의 이상 증세,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네뷸러.
오래전 잃어버렸던 가족, 꿈, 평화.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
그 힘은 비단 전투력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고 있다.
F급으로서의 자신,
‘거기 너, 까만 드레스. F급은 뒷줄에 서야지. 뭘 당당하게 첫 번째 줄에 서 있는 거야?’
이전에 보았던 신문 기사들이 뇌리를 스쳤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S급? 협회 직원 ‘그저 컨셉충’ 일침>
<네티즌 반응 싸늘, ‘흑염의 프린세스’ 어그로 실패한 듯해…>
과거와는 달리 현대의 헌터에게는 전투력만큼 평판과 유명세, 그리고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현대의 헌터들은 길드를 만들었고, 일부는 방송을 하며 팬을 거느리는 것이다. 그것이 ‘랭크’와는 다른, 또 하나의 ‘힘’이 되기에.
적어도 F급 컨셉 헌터 흑염의 프린세스 이유라로서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는 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제야 우리 헌터님께서 빛을 보시게 되지 않았습니까.’
눈앞의 제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가겠습니다.”
“……!”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제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예, 헌터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이제부터 바빠질 것이다.
‘우선은…….’
흑염의 프린세스가 수여식에 참여한다는 것을 협회를 통해 세계 헌터 기구에 알려야 하겠고, 밀어닥치는 인터뷰 요청들을 가지 치듯 정리하여 중요한 알맹이만 남겨야 하는 등 오랜만에 진짜 매니저다운 일들을 하게 되겠다.
은하는 비록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늘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제휘에게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나 정작 제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설렜다.
‘가만있어 봐. 대표님의 귀국도 내일이잖아.’
시간상 아마 수여식 회장으로 바로 오시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 윤 과장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좋겠다. 제휘는 휴대전화를 잡았다.
* * *
다음 날.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초호화 컨벤션 센터.
오늘 이곳에서 ‘흑염의 프린세스 로프티 헌터 훈장 수여식’이 있다는 소식은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예상대로 각 방송국의 기자, 소문을 듣고 온 시민, 인터넷 방송 BJ, 현직 헌터들이 센터 앞에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했다. 그중 센터 안까지 공식적으로 입장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였고, 따라서 센터 입구는 한 걸음 떼기도 힘들 정도로 구경꾼과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 이곳에서 현 글로벌 랭킹 1위이자 남해안 게이트의 영웅, 흑염의 프린세스가 정식으로 로프티 헌터 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인데요──.”
“지난 3년간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던 흑염의 프린세스가 과연 오늘 이 자리에 정말 나타날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아, 좀 비켜 봐요! 안 보이잖아!”
“관계자 외 출입은 금지입니다! 금지예요! 어이, 학생! 거기 안 멈춰?!”
입구를 지키고 있던 덩치 좋은 남성은 북적이는 인파를 틈타 센터로 진입하려던 한 소년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여기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
험상궂은 얼굴로 소년에게 경고하던 남자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목을 잡힌 소년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것을 보았던 것이다.
단순히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소년이 연하늘색 머리카락에 개량 한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비슷한 한복 차림새를 한 두 사내가 곁에 없었더라면 말이다.
“당신은…….”
소년을 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소년 뒤에 서 있던 개량 한복 차림의 두 사내가 찌릿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남자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가란, 의영.”
그런데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현장이 보이는 걸까? 두 사람이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소년이 그들을 저지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는 꾸욱 잡고 있던 소년의 팔목을 황급히 손에서 놓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눈을 가린 탓에 소년의 표정을 깊이 살필 수는 없었으나, 선이 얇은 입술이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괜찮아.”
짧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자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가느다랬다.
얇은 한복 자락을 휘날리며 소년이 멀어졌다. 한동안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남자는, 뒤늦게 소년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
그러나 이미 소년은 센터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세상에…….”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의 동료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야, 석경아. 나 방금 ‘심안’을 봤어.”
“뭐?”
어디, 어디? 동료가 주변을 휙휙 살폈지만 ‘심안’으로 추정되는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분명 보았다. 눈을 가린 검은 천. 연하늘색 머리카락. 푸른 개량 한복. 게다가 늘 거느리고 다니는 두 사내까지.
그건 분명히 글로벌 랭킹 12위이자 인류 최초로 탑을 닫은 ‘심안’이었다.
‘그가 직접 참석하다니.’
꿀꺽.
남자의 목젖이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진짜 흑염의 프린세스가 귀환한 게 맞나 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