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3)화 (173/306)


#173. 목격담
2023.01.20.


실내에서 목도리를 하고 있어서인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은하는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를 스르륵 풀었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단 쪽이었다.

“안 물어봐?”

살짝 숙이고 있던 시선을 들자, 묘한 눈빛을 한 에단이 보였다. 물어보다니, 무엇을? 은하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턱을 괴고 있던 에단이 이번에는 의자에 느슨히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디서 돈이 났는지 궁금할 거 아니야.”

“응, 궁금해.”

“그런데 왜 안 물어?”

“사과가 먼저니까.”

은하의 말에 에단이 입을 닫았다. 그렇게 몇 번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기 오니까 뭐라더라, 시스템창? 그런 게 눈앞에 뜨더라고.”

에단은 자신이 ‘돈’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 순순히 설명해 주었다.

방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중 에단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팝업되었고, 심심한 나머지 이것저것 눌러 보았다고. 은하는 스마트폰을 처음 접했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상점에 팔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상점?”

“어. 시스템 상점. 몰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은하 역시 각성자였기 때문에 몇 번이고 시스템창을 본 적이 있었다.

시스템창은 조우한 몬스터의 레벨이나 녀석이 사용하는 스킬명 등을 알려 주는 안내 역이며, 비전투 시에도 자신의 능력치를 확인하거나 열어 볼 수 있는 등 여러 기능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상점 같은 건 없었는데.’

은하는 허공을 두드려 시스템창을 열어 보았다. 그녀가 아는 익숙한 푸른 창이 주르륵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다가 문득, 오른쪽 상단 구석에 박힌 호주머니 모양의 아이콘을 발견했다.

‘설마 이건가?’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톡, 그것을 터치하자 <시스템 마켓>이라는 문장이 크게 떠올랐다. 그 아래로 은하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잡동사니 아이템 목록이 주르륵 펼쳐졌다. 또한 각각 아이템 옆에는 판매 버튼이 노랗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렇지?”

에단이 보란 듯이 씩 웃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과는 별개로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현대에 탑이 등장하면서 헌터들의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제휘를 통해 이미 들은 일이었으나, 시스템의 기능까지 업데이트되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휘는 헌터계에 종사하고는 있지만 각성자가 아니니 시스템창에 대한 설명은 깊게 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한편,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기서 아이템을 팔고 얻는 코인을 네가 말한 ‘돈’으로 바꿀 수도 있더라고.”

이렇게 편리한 건 ‘저쪽’에도 없었는데. 그리 중얼거리는 에단 역시 은하처럼 시스템창을 확인하는지 허공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코인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적어도 은하가 언노운 게이트에 갇히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기능은 없었다. 만일 그런 기능이 있었더라면 은하는 진즉에 부자가 됐을 거다. 시우에게 굳이 오피스텔을 제공받을 필요도 없었을 거고.

‘하지만 그런 기능은 확실하게 없었어.’

은하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전개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맞은편에 앉은 에단은 제 인벤토리를 확인하는지 계속하여 허공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가 가진 게 많거든. 내 인벤토리, 너한테는 못 보여 주나? 흠, 그런 기능은 없으려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하는 번쩍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깨달았다. 그동안 에단이 평범한 인간이 아닐 거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도 여느 각성자처럼 시스템창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에단도 각성자라는 건가?’

은하는 눈앞에서 인벤토리를 열람하는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또 갖고 싶은 거 없어?”

문득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에단이 빙긋 웃었다.

“말해. 사 줄 테니까.”

* * *

서울, 한국 헌터 협회 본부.

“혀, 협회장님─!”

문이 기세 좋게 벌컥 열리면서 정장의 남성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삐뚜름한 넥타이에 바람 가는 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범벅이 된 콧잔등을 따라 안경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김광현. 39세. 한국 헌터 협회 소속. 올해로 입사 12년 차, 현재 각성자 관리부 팀장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어허, 또! 내가 문을 열기 전에는 노크를 하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는 폼이 아니라니까.”

커피 잔을 든 채 서류를 확인하던 협회장, 고대윤이 인상을 와륵 찌푸렸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광현 탓에 하마터면 커피를 다 쏟을 뻔했던 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급히 보여 드릴 것이 있어서요.”

“또 뭔가.”

“인터넷에 흑염의 프린──.”

“괴담 이야기라면 듣고 싶지 않네.”

대윤은 광현의 말꼬리를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렇지 않아도 잊을 만하면 난리인 그놈의 괴담 탓에 지난 3년 내내 시달린 것은 다름 아닌 헌터 협회였다.

목격자들의 제보나 신고로 전화는 3년 동안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말이 좋아 제보나 신고지 반은 장난 전화였고, 나머지 반은 ‘저런 괴물이 심심찮게 목격이 되는데 협회는 무얼 하냐?’라는, 대충 그런 내용의 클레임이었다.

‘괴담이 괜히 괴담이겠나.’

쫓아가서 확인하고 처리할 수 있다면 괴담이 아니었겠지. 대윤은 골치가 아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격 장소에 인원을 배치해 보기도 했고, 관련 정보를 닥치는 대로 모아 보기도 했다. 괴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차은하의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진짜 ‘흑염의 프린세스’ 역시 괴담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날 늑대의 아들이자 얼굴 없는 S급 헌터가 갑작스레 데리고 나타난 F급 헌터. 그녀가 사실은,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30년 전의 1세대 헌터라니…….

워낙 혼돈의 시기였던 탓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보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대윤은 한국 헌터 협회의 총장이라는 지위와 ‘차은하’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관련 서류를 이 잡듯이 뒤졌고, 그 결과 그녀가 정말 1세대 헌터가 맞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3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사망 판정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니 말이다. 들려오는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련한 이야기는 죄다 뻔한 괴담들이었다.

대윤은 이제 흑염의 프린세스의 ‘흑염’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했다. 랭킹 1위 보유국이면 뭐 하나. 정작 당사자가 죽고 없는 데다 그를 닮은 귀신에 시달리고 있는 마당에 그런 허울뿐인 명예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이 있으면 내려가서 일이나 보게. 그렇지 않아도 탑 공략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해야 할 거야.”

“아, 아뇨. 협회장님. 잠시만요.”

“얼른!”

쾅!

가차 없이 광현을 쫓아낸 대윤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전부터 괴담 괴담 노래를 부르더니 아직도.’

일은 참 잘하는 직원인데 말이지. 끄응, 침음을 흘린 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인천항에서 목격된 일상복 차림의 ‘흑염의 프린세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진 한 장. 이번에는 정말?>

다음 날, 온 신문 전면에 그러한 기사가 뜨게 될 줄은 말이다.

* * *

[제목] [BEST!] 만약에 흑염의 프린세스가 살아 있는게 맞다면 어떻게 되려나

[작성자]□□(121.233)│2035.2.4 AM 11:11│[조회] 53,688│[추천] 213

[내용] [사진.jpg]

지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 흑프 옆모습 사진 그대로 퍼온거임. 이거 보니까 괴담에 나오는 그 귀신이 아니라 진짜 1위 흑프 맞는 것 같던데 님들 어케 생각함?

만약에 흑프 돌아오면 한국이 전세계 최초로 최상층 도달하는 것도 꿈은 아닐 거 같은데;

[댓글]

┖>□□: 제일 처음 탑 봉쇄한거는 심안이고, 이번에 미국 탑도 닫혔으니까 최초는 아님

┖>□□: 윗댓 먼솔? 미국은 누가 닫은지도 모르니까 패스하고, 심안도 따지고 보면 자력으로 최상층에 도달해서 탑 닫은 건 아니지 ㅋㅋ 히든퀘 클리어해서 최상층까지 갈 수 있었던 거라고 오피셜로 말했잔슴;

┖>□□: 난 솔직히 좀 어이없어 처음에 탑 나타나고 난리났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거ㅋ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뭐 이런건가

┖>□□: 와ㅋㅋ 살아 있음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말하는 꼬락서니 실화냐 ㄹㅇ 진짜 수준 역겹다;;

┖>□□: 수준 ㅇㅈㄹㅋㅋㅋㅋㅋㅋㅋ 니네 흑프가 F급 판정받고 컨셉질 한다고 욕박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영웅인것처럼 추앙하는 척하는게 더 역겨운데?

┖>□□: [해당 댓글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 근데 흑프가 살아 있고 직접 탑 공략 시작하면 다른 나라들 기록 갈아치우는 건 시간문제일듯ㅇㅇ 거기에 따라오는 경험치랑 부가적인 자원들 생각하면 한국이 진짜 헌터 강대국되는거. 말뿐이 아니고 진짜 랭킹 1위 보유국다워지는 거지ㅋㅋ 생각만 해도 국뽕 ㅈㄴ차오르는데ㅋㅋㅋ

┖>□□: 언니 난 믿고 있었어!! ⁽⁽◝(˙꒳˙)◜⁾⁾

┖>□□: 딴건 모르겠고 난 지금까지 글로벌 1위 노릇하던 엘리멘탈 마스터가 멘붕오는거 볼 생각에 개흥분되네ㅎㅎㅎ

┖>□□: 근데 저 사진 합성 아닌거 확실함? 확대해보면 픽셀 다 깨져있는데;

┖>□□: 밤에 찍힌 사진은 원래 좀 그럼

┖>□□: 내가 저번에 쇼핑센터에서 저사람 봤다고 했을 땐 개소리라고 아무도 안믿더니 ㅋㅋㅋㅋ난 그때 보고 바로 알았찌ㅋㅋ

┖>□□: 와; 방금 뉴스 봄? 세계 헌터 기구 총장이 로프티 헌터 훈장 수여하겠다고 한국 방문한다는데 ㄷㄷㄷㄷㄷ

┖>□□: 헐;; ㄹㅇ임?

┖>□□: 진짜 살아있는거 맞나본데???

┖>□□: 와 ㅁㅊ 저 사진 찍은 사람은 그럼 진짜 랭킹 1위를 코앞에서 직관한거네;;;;;

[제목] [BEST!] (펌) 랭킹 1위 흑염의 프린세스의 숨겨진 선행ㅠㅠ

[작성자]□□(121.676)│2035.2.4 AM 11:50│[조회] 158,968│[추천] 2569

[내용] 인터넷에서 퍼온 건데 출처는 하단에 남기겠음!

https://www.khunter.net/?sca=흑프/13899

https://kin.never.com/qna/detail.dlid=6&

https://hunterforest.com/freeboard/4428

이거 다 옛날에 흑프 만났던 사람이 직접 쓴 글이래ㅠㅠㅠㅠㅠㅠ 보면 알겠지만 흑프는 실력만큼 인성까지 겸비한 헌터였음ㅠㅠ

이거보고 진짜 흑프한테 미안해지더라…… 외모랑 공식 랭크만 오해했던 과거의 나 진짜 개패버리고시픔ㅠㅠㅠㅠㅠ

첫번째 링크는 흑프가 출연했던 방송국 관련 스탭이 쓴거고 두번째는 흑프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다는 사람이 쓴거임(이건 확실ㄴㄴ)

근데 특히 세번째 링크……. 거기 드가보면 거기 글쓴사람이 애엄마인데, 몇년전에 서울 아쿠아리움 B급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다른헌터들 다 안 구하러 오는데 흑프가 혼자 나타나서 애기랑 엄마랑 구출해줬다더라ㅠㅠㅠㅠ 그때 애기 생일이라 기념촬영하려고 카메라도 들고 있었는데 거기 영상에 잠깐 흑프 찍혀 있음

그때 일 이후로 애기가 흑프 팬되서 검은 드레스 입고 다닌다는데 진짜 너무귀엽고 이쁘고 따듯하잔아…… 그거입고 사인회도 갔다왔다는데 진짜미쳣냐고ㅜㅜ (그때 받았던 사인 인증사진도 위에 링크에 첨부되어있음)

ㅎㅏ이럴줄알았으면 나도 진작 흑프언니보러 가는거였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휴대전화 표면을 주르륵 쓸어내리던 긴 손가락이 멈추었다. 액정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시선이 소리 없이 올라가 달리는 차량 밖을 향했다.

지이이잉.

버튼을 누르자 닫혀 있던 창문이 주욱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고스란히 차량 내부로 흘러들어오며, 반쯤 눈을 덮고 있던 검푸른 머리카락이 나부끼듯 흩날렸다.

그리고 드러난 남자의 얼굴. 3년이 지나며 20대 중반으로 접어든 신시우였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시린 호수를 담은 듯 푸르렀다. 그 곁에 깎아지른 듯 솟은 콧날과 미려한 입술 선은 마치 붓으로 그린 듯했다.

시우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를 헌터가 아닌 모델로 여길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그러나 그는 글로벌 랭킹 3위이자 현 늑대의 주인, 백랑이었다.


시우의 시선이 근처 녹색 표지판에 닿았다. 지금 당장 공항으로 가고 싶지만,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하며.

“……일정을 더 서두르지.”

닿아야 할 곳. 그것을 확인한 시우는 수행인을 향해 짧게 명했다.

1674236796646.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