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72)화 (172/306)


#172. 돌아온 에단
2023.01.19.


민주가 제조실에서 만지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저것은 분명 수류탄이 확실했다.

“아연아!”

은하가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냈다.

삐, 삐, 삐─

수류탄에 그려진 토끼의 눈이 빨갛게 빛났다. 아차 하는 얼굴로 은하가 아연을 향해 재빨리 다가가려는데,

“아, X발, 놀래라. 터지는 줄 알았네.”

무섭게 욕설을 뱉은 아연이 은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언니, 다친 곳은 없어요?”

“난 괜찮은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은하가 멍하니 답하자 아연이 문제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걱정 마요. 수류탄은 내 인벤토리에 안전하게 들어갔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발밑에서 번쩍이던 수류탄이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사라졌다.

스틸(Steal). 상대의 아이템을 빼앗는 아연의 고유 스킬이었다. 재사용 시간은 10분. 사실상 한 전투에서 두 번 쓰기는 힘든 스킬이었다.

“야.”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난 듯, 아연이 싸늘하게 식은 시선을 들었다.

방심한 사이에 수류탄처럼 위험한 물건을 던지다니. ‘스틸’이 아니었다면 아마 팔 하나쯤은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민주는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탓에 아연에게는 제대로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은하에게는 정확히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초점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민주를 바라보던 은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싱글싱글 웃으며 이쪽을 주시하는 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눈을 뜨고 자고 있는 듯한, 그런 멍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은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민주의 목 부근에 있는 작은 흉터였다.

‘……빛나고 있어?’

은하의 기억이 맞다면 저건 민주가 언노운 게이트에 진입하고 반 시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생긴 바로 그 흉터였다.

은하는 단 한 번도 민주의 흉터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민주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흉터라면 보통 빛을 내지 않았다.

그런데.

“…….”

민주의 목 부근 흉터를 응시하는 은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분명 저렇듯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것을 최근에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 보아도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을 듯 모호했다.

철컥.

다시 한번 장전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묵직한 소리였다.

“……!”

퍼뜩 정신을 차린 은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민주는 평소 애용하는 바주카포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격할 것 같은 자세였다.

언노운 게이트 전투 당시 민주가 저것을 쏘는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것이 터지는 순간, 주변 일대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은하는 고민했다.

‘몸을 던져서 막아?’

……아니,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다못해 드레스라도 입고 있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은하는 평범한 일상복 차림이었다.

불을 다루는 만큼 은하의 화(火) 속성 저항치는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이토록 근접한 거리에서 맨몸으로 바주카포를 받아 낼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치명상, 어쩌면 즉사일 테다.

‘어떡하지?’

은하의 턱선을 타고 주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언니, 튀어요!”

아연이 옆에서 외쳤다. 그러나 은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은하는 물론이거니와 S급 헌터인 아연 역시 마음만 먹는다면 포탄을 피할 정도의 신체 능력이 되었다.

하지만 회피한다면 포탄은 두 사람을 지나쳐 그대로 오피스텔 입구에 직격할 것이다. 위력에 따라서는 오피스텔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명 피해가 생길 것이다.

“언니, 뭐 해요! 빨리!”

아연이 외치는 것과 딸깍, 하는 버튼 소리가 동시에 양 귀를 때렸다. “젠장!” 하는 욕설과 함께 아연이 은하의 팔을 잡아채는 순간이었다.

털썩─

돌연, 민주가 고꾸라지듯 제자리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은하와 아연은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없는 민주의 뒤통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엥…… 죽은 거?”

불길한 소리를 뱉은 아연이 겁도 없이 민주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쿡쿡 그를 찔렀다. 은하 역시 아연을 뒤따라 민주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민주를 살피던 은하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떨어져 그의 목 부근에 닿았다. 은은하게 빛나던 흉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은하가 기억하는 것보다 그 흉터 부위가 조금 커져 있었다.

묘한 눈빛으로 흉터를 응시하고 있던 중.

차라랑─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연의 체인 로프였다.

“그건 왜?”

갑작스럽게 체인 로프를 꺼내 든 아연에게 은하가 물었다.

“혹시 모르잖아요. 만약에 잠깐 정신을 잃은 거라면 이 틈을 타서 속박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체인 로프를 쥔 아연이 그것으로 민주를 칭칭 묶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속박을 완료할 때까지도 민주는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뭐야, 진짜 죽은 거야?”

숨은 쉬고 있는 거 맞지? 아연이 민주의 코 아래로 손가락을 대는데,

“걱정하지 마. 그냥 재운 거니까.”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는 연막 사이로 낯선 발소리가 다가왔다. 민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연이 홱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경계 어린 눈초리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아연. 그 반면 은하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쪽을 응시했다.

‘이 목소리는…….’

이윽고 연막이 완전히 걷히고 나타난 것은 루비처럼 새빨간 눈동자,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던 에단이었다.

* * *

은하는 정신을 잃은 민주를 데리고 오피스텔로 올라왔다. 물론 그곳에 불쑥 나타난 에단도 함께였다.

은하는 자연스럽게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려던 아연에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직 파티 안 끝났는데…….’

아연은 돌아가기 싫은 듯 우물쭈물 엉덩이를 뒤로 뺐다.

정신을 잃은 민주가 걱정되어서? 아니, 그럴 리가. 마지막 발걸음을 떼던 순간까지도 에단을 힐끗힐끗 살피는 것을 보아하니, 이 분홍색 머리의 잘생긴 미청년이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 죽을 것 같은 눈치였다.

어떻게든 아연을 구슬려 돌려보내는 것에 성공한 은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 침대에 민주를 눕혔다. 표정과 숨소리가 편안한 것을 보아하니 에단의 말대로 잠든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무슨 수로 민주를 단숨에 재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은하는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잠든 민주를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군단 소속의 운전기사가 지하 주차장에서 민주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민주가 정신을 차린 뒤에 보내는 것이 낫겠지. 은하는 민주에게 이불을 덮어 준 다음 방에서 나왔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문은 닫지 않았다.

거실로 나오자 식탁 의자에 앉아 휴지 조각을 만지작대는 에단이 보였다. 은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구경?”

에단이 짧게 답했다. 무심하지만 딱히 퉁명스럽지는 않은 딱 그 정도의 목소리였다.

아직도 마음이 상해 있는 걸까. 보여지는 바로는 알 수 없었다. 유난히 재미난 일이 없는 이상, 에단은 기본적으로 저렇듯 무표정이었으니까.

이후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은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에단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휴지를 쭉쭉 찢어 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아까 그거.”

살짝 숙이고 있던 시선을 들자, 은하 방 쪽을 향해 턱짓하는 에단이 보였다.

“아는 사이?”

눈치를 보아 판단하건대 에단이 말하는 ‘그것’이란 아마도 민주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친해?”

“그렇지.”

“흐응.”

에단이 싱거운 반응을 보였다.

단순히 가까운 사이인지가 궁금했던 거였나? 은하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티슈를 찢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전갈한테 물린 모양이던데.”

문득 에단이 입을 열었다. 손은 다시 티슈를 찢기 시작했다.

“전갈?”

“어.”

은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따라갈 수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원래 전갈한테 물리면 다 그래. 독에 ‘감염’된 거지. 뭐 정확한 건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만.”

“…….”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걸. 한동안은.”

에단의 답은 몹시 두루뭉술했다.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저쪽’에서 왔으니까.”

에단은 태연하게 답했다.

“‘저쪽’에서는 흔한 일이야.”

그가 말하는 ‘저쪽’이란 아마도 네뷸러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은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에단이 ‘이쪽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그를 자신이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데리고 와 놓고서 오해하고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은하는 불과 몇십 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민주를 재운 것도 너야?”

“어.”

“어떻게?”

“그냥, 이렇게.”

에단이 검지를 들어 톡, 하고 허공을 두드렸다. 민주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는 걸까. 어쩌면 그것이 에단의 특수한 능력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에단이 민주를 재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은하와 아연 그리고 민주 세 사람 중 하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어쩌면 세 사람 모두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주변 피해도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 분명했다.

에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또 한 번 그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힐끔.

은하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식탁 가장자리에 곱게 개어진 빨간 목도리를 향해서였다.

“……미안.”

긴 정적 끝에 은하가 입을 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휴지를 응시하던 붉은 눈이 스르륵 은하를 향했다.

“뭐가?”

“목도리 말이야. 내 오해였어.”

그제야 에단의 눈길이 은하의 시선을 따라 식탁 구석 빨간 목도리에 닿았다.

“잘 쓸게. 고마워.”

“…….”

목도리에 고정되어 있던 붉은 시선이 다시금 흘긋 은하를 향했다.

“진짜 미안하다고 생각해?”

“응.”

“그럼 보여 줘.”

“뭘?”

“목도리 하고 있는 거.”

은하의 눈에 옅은 당황의 기색이 서렸다. 에단이 뜬금없이 그러한 요구를 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은하는 식탁 위에 고이 접혀 있던 목도리를 들어, 그것을 목에 감았다.

“역시.”

나지막이 중얼거린 에단이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눈매가 사르르 휘었다.

“예쁘네.”

“…….”

그 앞에서, 은하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도리를 매만졌다.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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