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9)화 (169/306)


#169. 괴담 속 주인공 (2)
2023.01.16.


저녁 시간.

오늘도 역시 은하의 식사를 챙겨 주기 위해 오피스텔로 향하고 있던 제휘는 근처 상가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난번에 사다 드린 귤을 참 맛있게 드시던데, 조금 더 사 가야겠다.’

늘 들리던 과일 가게가 마침 가까웠다.

가게에 들어서자 제휘를 알아본 과일 가게 사장님이 “어머, 어서 와요.”라며 반겨 주었다. 제휘는 귤 한 바구니와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골랐다. 그 두 가지가 헌터님이 가장 잘 드시는 과일이었다.

‘좋아하시겠지?’

새빨간 사과를 집어 든 제휘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총각, 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흑염의 프린세스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

사장님은 봉지에 귤과 사과를 담으며 말했다.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말에 미세하게 어깨가 움찔거리긴 했지만 표정 관리만큼은 베테랑인 제휘가 천연덕스레 답했다.

“아, 그런 이야기야 이전부터 많았죠.”

“아니, 울 아들내미가 그러는데 글쎄, 최근에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이 잦은 게 그것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다나 봐. 실제로 우리 아들도 학원 갔다 오는 길에 완전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다더라고요.”

“아하…….”

사람들은 미스터리나 괴담뿐만 아니라 소문도 참 좋아한다. 실버문 매니지먼트 본사에만 가더라도 동료들은 제휘에게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해 질릴 만큼 물어 왔다.

그녀가 1세대 헌터인 것을 알고 있었냐는 둥,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게 진짜냐는 둥, 괴담과는 어떤 관련이 있냐는 둥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나라가 정말 랭킹 1위 헌터 보유국이 되는 거 아니야.”

“그렇죠.”

“내 생각에는 아주 있을 수 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아. 그…… 뭐였더라? 왜, 미국에 탑 있잖아요.”

“몬태나주요.”

“그래, 맞아요. 몬태나주. 거기 나타난 몬스터를 한 방에 해치운 헌터가 있었는데, 세상에 그게 흑염의 프린세스랑 똑같이 생겼더래. 총각도 그 영상 봤어요?”

이후에도 사장님은 주절주절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휘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총각, 저번에 헌터계 쪽에서 일한다고 했죠? 어떻게 생각해? 살아 있을까, 그 사람?”

사장님은 과일이 두둑이 담긴 봉지를 내밀며 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제휘는 “글쎄요.” 하며 입을 열었다.

“워낙 강한 헌터시니 살아 계시지 않을까요?”

──아마 지금쯤 집에서 캔 맥주를 마시며 TV 보고 계실걸요? 제휘는 빙긋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이후 가게를 나와 오피스텔까지 오는 도중에도 종종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단어가 귀에 닿았다.

아직까지는 흑염의 프린세스의 귀환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정보 공유가 매우 활발하고 빠른 현 LTE 시대에서 언제까지고 숨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휘는 그녀의 귀환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다. 은하가 자신의 귀환이 세상에 밝혀지길 원하는지도 확인하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언젠가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아주 화려하고 대대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렴. 랭킹 1위이신데.’

어중간한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세계 헌터 기구의 총장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서 훈장을 수여하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흑염의 프린세스가 한국 최초의 로프티 헌터가 되었다고는 한들, 아직 칭호만 부여받았을 뿐 직접 수여식에 참여해 훈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자(死者)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도 표면상으로는 그러하니까.

어쨌든 제휘의 결론은 이러했다. 헌터님의 귀환 이벤트는 최대한 호화롭고 거룩하게 열려야만 한다. 이건 무조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우가 귀국한 후 그와 진지하게 상의를 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비밀에 부쳐 둘 생각이었다.

“헌터님, 저 왔습니다!”

두 손은 무겁게, 두 발은 가볍게 은하의 오피스텔을 찾은 제휘는 현관을 열자마자 밝게 인사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다. 외출하신 걸까?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제휘는 신발을 벗고 저벅저벅 집 안으로 들어섰다.

“헌터님?”

그러나 은하는 어디에도 없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은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동안 도착한 메시지도 0통.

그냥 근처에 잠시 볼일이 있으신 거겠지. 제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비운 것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겠는가.

‘헌터님은 언노운 게이트에서도 버젓이 살아 돌아오신 분이시니까.’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제휘는 짐을 풀기 시작했다. 헌터님이 집을 비우셨으니 이 틈을 타서 대청소를 하는 것이 좋겠다. 오는 길에 구매한 식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쌀을 씻어 밥솥에 올린 뒤 청소기를 집고 본격적인 대청소에 돌입했다.

신발장, 현관 통로, 창고, 거실…… 집 안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던 제휘는 한곳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라.”

살짝 열린 입술 새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손님방의 문이 웬일인지 활짝 열려 있었다.

이곳에는 헌터님의 개인 손님이 머무르고 있을 텐데……. 제휘는 주춤주춤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없잖아?’

텅 빈 방을 확인한 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순간, 제휘의 두뇌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그리고 한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같이 외출하신 거야?!

쿠구궁. 마치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기분이었다.

대표님은 아직 일 때문에 스위스에 계신데 솜사탕 당신이 우리 헌터님과 외출을 했다고?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제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은하는 이전에도 길에서 개를 주워 온 적이 있었다. 물론 그 개는 우리 대표님이었으니 제외하고…… 이번에는 다 큰 성인 남성을 주워 왔다는 점이 문제였다.

‘어쩐지 처음부터 의심스럽더라니!’

아니, 없는 사람처럼 방에 박혀서 조용히 지내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까 싶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서 헌터님을 데리고 나가?!

제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제자리에서 씩씩댔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떡해, 우리 대표님…….’

제휘는 반사적으로 품속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시우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조급하게 액정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도중에 멈추었다.

‘아니다, 관두자.’

그리고 도로 품속에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대표님은 한시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제휘가 은하의 귀환 사실을 알렸으니 말이다.

괜히 지금 연락해 봤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일 테다. 제휘가 아는 시우라면 다소 강압적이고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일정을 앞당길 것이다.

이번 스위스 탑 토벌 계약에 도대체 얼마를 받았는데…… 그러면 안 되지.

‘응, 절대 안 돼.’

의뢰비가 상당했던 만큼 위약금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아마 제휘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헌터님, 빨리 돌아오세요…….’

잠시 손에서 놓쳤던 청소기를 바로 쥐며, 제휘는 힐끗 벽시계를 확인했다.

* * *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항간에는 도플갱어를 만나면 세상의 어떤 귀신을 만나는 것보다 더 공포감을 느낀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은하는 지금─

“……너, 뭐야.”

공포라기보다는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는 자신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얼굴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닮은 것은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저 드레스.’

여자를 응시하는 은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반투명한 망사 한 겹, 흑색 비단 한 겹으로 이루어진 드레스. 가슴 부근의 흑장미 코르사주에 페티코트 없이도 둥글게 부푼 치맛자락.

저것은 평소에 은하가 입고 다니는 ‘칠흑 비단 드레스’와 디자인이 매우 흡사했다. 심지어는 레이스가 달린 저 새까만 양산까지도 말이다.

은하는 눈앞에 선 ‘저것’이야말로 괴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흑염의 프린세스 드레스와 양산을 간편히 살 수 있는 시대인걸요. 분명 누군가가 장난친 걸 겁니다. 뭐 팬심일 수도 있겠지만요.’

제휘는 그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은하 역시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의 이 여자를 마주하니, 도저히 장난이라거나 팬심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등 뒤에는 겁에 질린 채 벌벌 떠는 일반인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희미한 피 냄새가 전해져 온다. 인간의 것이다. ‘저것’이 그를 공격한 걸까?

“……”

은하가 주먹을 쥐었다. 양산은 들고 오지 않았다. 드레스 차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물건 따위 없었던 시절에도, 자신은 충분히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들을 상대해 왔다. 그러니까,

‘문제없어.’

은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뒤에 숨은 일반인을 향해서였다.

“도망가세요.”

“……!”

남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란 것이리라. 왜냐하면 눈앞의 ‘저것’과 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또 하나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송두리째 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저것’에 닿았다가 다시 은하에게 닿았다.

‘어떻게라니.’

‘저것’과 자신의 얼굴이 닮은 이유 따위 은하 본인도 몰랐다. 만일 알더라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찌 되든, 그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은하는 다시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가세요.”

은하의 말에 일반인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은하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히힛, 하고 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들린 듯하더니…….

[──찾았, 다.]

바로 코앞에서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는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황금빛으로 물든 ‘그것’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은하가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 거리를 벌렸다.

‘방금…….’

은하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까지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저것’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했다. 은하는 이 기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스트의 사슬을 붙잡혔을 때에도, 그리고 가끔 에단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 때에도, 은하는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의 감각이 둔해진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히히…… 히히히히.]

‘흑염의 프린세스’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닌, 마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 오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났는지, 희미하게 시작된 웃음은 곧 까르륵 자지러질 듯 이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배를 잡고 허리를 젖혀 웃던 ‘저것’은 곧 허리가 가능하지 않을 만큼 기괴하게 꺾였다. 마치 무척추동물처럼 말이다.

[찾았, 다. 찾았, 어. 히히, 히히히…….]

그러다가 한순간 뚝, 웃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그곳에 불어오던 바닷바람조차 뚝 멎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은하의 뒤편에서 화르륵! 불씨가 생겨났다.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은하는 망설이고 있었다. 공격해야 할지, 우선 대화를 시도해야 할지 말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것’은 분명 ‘말’을 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

방금 전 그녀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은하는 한 발짝 늦게 그것을 눈치채고 거리를 벌렸다. 즉 은하를 공격하려 했더라면 그때가 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은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웃을 뿐 공격까지는 하지 않았다.

은하는 어깨 쪽 불꽃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 정체가─.”

──뭐지? 그렇게 물으려던 참이었다.

[노올, 자.]

‘그것’이 은하의 말꼬리를 자르더니 또각또각 걸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노, 자, 나, 랑 노올자…….]

‘그것’은 생글생글 웃으며 점차 거리를 좁혀 왔다. 은하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러나 선뜻 다가가지도 않았다.

팟! 은하의 어깨 위로 또 하나의 불꽃이 위협을 내포하며 떠올랐다.

[노…….]

이윽고 바로 앞까지 ‘그것’이 다가왔을 때였다.

“은하야, 위험해!”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 눈치채기도 전, 밤하늘 아래 선명하게 빛나던 녀석의 황금색 눈동자가 돌연 초점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풀렸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서서히 다홍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눈동자가 완연한 진홍색으로 뒤덮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이 관절이 꺾인 마리오네트처럼 온몸을 기괴하게 비틀기 시작했다.

“……?”

은하는 의문을 담은 얼굴로 ‘그것’의 양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찌걱, 찌거걱─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것’의 인체가 스프링처럼 뒤틀리고 꺾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그것’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노, 올자…… 나, 랑…… 놀…… 자…….]

오히려 아까와 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곧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그것’이 땅에 철퍼덕 엎어졌다. 은하는 잔뜩 굳은 채 시선을 내리깔아 ‘그것’을 응시했다.

저와 똑같이 생긴 존재가 우두둑우두둑 관절을 꺾으며 망가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불쾌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했고, 영화보다 잔인한 상황을 겪어 온 은하조차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은하는 뒤늦게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의 발목에 찍혀 있는…….

‘뱀에 물린 듯한 자국.’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싣고 낯선 듯 익숙한 향기가 다가온다. 진한 향수 냄새를 닮은 그 향기를 인지한 순간부터 후각이 점차 둔해지며 들뜬 듯 황홀하고 아득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사람을 홀릴 듯한 이 묘한 향기를, 은하는 알고 있었다. 땅에 쓰러져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그것’으로부터, 은하가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옅은 금발.

급히 뛰어온 듯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은회색 눈동자.

은하는 읊조리듯 고요히 입을 열었다.

“……백이준?”

마에스트로 백이준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