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8)화 (168/306)


#168. 괴담 속 주인공 (1)
2023.01.15.


스위스 베른.

지구에 나타난 11개의 탑 중 하나가 있는 곳.

베른의 탑 17층을 클리어 하기 위해 이번에 투입된 공략대의 인원은 약 60명이었다.

이전 층, 그러니까 16층을 클리어 하는 데에 소요된 시일이 자그마치 세 달. 일반적인 경우 한 번의 탑 공략 일정을 30일로 잡으니, 16층을 클리어 하기 위해 한 공략대가 최소 세 번은 탑을 들락날락했다는 소리였다.

이번 17층의 경우 첫 번째 투입 당시 60명 중 7명이 전사했다. 유럽 중부 연합은 이대로라면 원활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해당 층이 수 속성 취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글로벌 랭킹 12인 중 하나이자 한국의 S급 헌터인 ‘백랑’ 신시우에게 공략대 참여를 부탁했다.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17층의 주된 배경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말 그대로 ‘불바다’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공략대에 참여한 대부분의 헌터들은 평소 자신이 입던 전투복을 모두 포기하고 디자인이 같은 방화복을 착용했다. 미국의 유명 제작 길드 ‘블랙 스미스’에 거금을 주고 대량 의뢰한 장비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것을 입지 않고 이곳에 참여한 헌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랑이었다.

‘저런 차림으로 저기 서 있는 것조차 믿기지 않는군.’

한 헌터는 넘실거리는 불바다 가운데 우두커니 선 청년, 시우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문득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이곳을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헌터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챙기라고 한 건?”

시우가 물었다.

탑 내부에서는 국적과 언어 따위 상관없었다. 시스템의 배려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동 번역이 되었으니 말이다.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꺼내.”

시우가 짧게 명령했다.

“오늘 하루 만에 이 층을 클리어 하겠다.”

시우 앞의 남자는 그가 시키는 대로 인벤토리를 열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루 만에 클리어라고?’

아무리 백랑이 헤드 헌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 속성 헌터라고 하더라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게다가 이해가 안 가는 점은 또 있었다.

자신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은 바로 호흡기의 한 종류였다. 레귤레이터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나 쓰이는 장비였다.

소방모도 아니고, 불바다인 이곳에서 이런 도구를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일단 챙겨 오라고 했으니 그러긴 했지만.

“뭐, 이곳 필드 전체를 바다로 바꾸기라도 할 셈인가?”

마찬가지로 인벤토리에서 호흡기를 꺼낸 다른 헌터가 빈정대듯 말했다. 물론 시우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해?”

“저 사람, 헤드 헌터 중에서도 3위야.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데. 물론 쉽진 않을 테지만.”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돼? 몸에 무리가 올 거야. 인간이라면 말이지.”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나둘씩 인벤토리를 열어 호흡기를 꺼냈다. 그곳의 대부분의 헌터들은 ‘백랑’의 속뜻을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일정을 앞당긴 거지?”

한 헌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곁에서 인벤토리를 닫고 있던 다른 헌터가 답했다.

“듣기로는 한국에 돌아가려고 하나 봐. 뭐 급한 일이 있다던데?”

“급한 일?”

“나도 들은 이야기야. 어제 백랑이 한국에서 연락을 받은 뒤로 갑자기 일정을 당겼잖아.”

“도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젠장, 그것만 아니었어도 일주일은 쉬었다가 들어오는 건데…….”

그때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시선이 무리 지어 수군거리던 헌터들을 향해 휙 옮겨 왔다.

“안 쓸 건가?”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냉기를 품은 것이 있다면 바로 저 목소리였다. 그 싸늘함에 너도나도 다들 입을 다물고 호흡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모두의 눈빛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는 채였다. 백랑은 이 호흡기 하나로 도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그러나 그 의심은 다음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스르륵, 쓰고 있던 후드를 벗은 시우가 천천히 손바닥을 들었다. 그리고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는 불바다를 향해서 그것을 뻗었다. 그러자,

촤아아아아악─!

불길보다 더욱 크고 거센 해일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작은 손짓으로 일어난 결과였다. 시우는 손을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거대한 해일을 지휘했고, 해일은 주인의 명령대로 밀어닥치고, 뒤덮고, 휩쓸었다.

그렇게 백랑은 10초도 되지 않아 ‘스테이지’를 변경했다. 어떠한 장비도 없이 오롯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모두가 경악의 물든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우의 주변에서 흔들흔들 움직이는 물줄기는 살아 있는 동물처럼 보였다. 시우가 아래로 손을 떨구자 그 물줄기는 비로소 생명을 잃은 듯 촤아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쥐약인 물 공격을 받은 몬스터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쓰러진 광경이 여기저기 보였다.

“【이제 그거 벗고, 바로 시작하지.】”

후드를 쓴 시우가 툭 던지듯 말했다. 듣고 있자면 마치 눈앞의 성냥불을 입김을 불어 훅 꺼 버린 것으로 착각할 만한 말투였다.

정신을 차린 헌터들이 하나둘씩 방화복을 벗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거면 거금을 들여 방화복을 준비한 이유가 없잖아……. 몇몇은 그런 생각도 했다.

성큼성큼. 시우가 앞장섰다.

그럼에도 그를 쫓는 이는 몇 없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눈으로 보고도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멀거니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우물쭈물 뭘 하자는 거지?】 ”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난 시간이 없어.】”

주머니 속 숨겨진 그의 주먹에 부서질 듯 힘이 들어갔다.

[대표님, 박제휘입니다. 언제 이 메시지를 보게 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 * *

다음 날, 은하는 다시 손님방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밤사이 에단이 돌아왔을까 했지만 여전히 방은 비어 있었다.

창문에 걸린 하얀 커튼이 구름처럼 두둥실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창문을 닫은 은하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웠다가 일어나면서 구겨졌는지 이불에 살짝 주름이 잡혀 있었다.

부지런히 오피스텔에 들러 집 안 곳곳을 청소해 주는 제휘 덕분에, 은하의 침실에는 이불 주름은커녕 창틀에 먼지 하나 앉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에단이 머무는 이 방에는 제휘가 얼씬도 하지 않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은하는 구겨진 이불을 손으로 대충 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문득 베개 옆에 쌓인 하얀 물체가 보였다. 은하는 그것이 곧 티슈 조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티슈를 돌돌 말거나 접어 만든 듯한 꽃이나 동물 등의 모형이었다.

종이접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을 보고 있자니 침대에 누워 티슈를 뽑아 이것을 만들고 있었을 에단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은하는 에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었지만, 에단에게 그런 아기자기한 취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단은 왜 티슈를 한 장 한 장 뽑아 저런 것을 만들었을까.

이유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방에는 TV나 컴퓨터 따위는 없었으니까. 책이라도 한 권 갖다 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적당히 시간을 때울 만한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은하는 손을 뻗어 엉성한 티슈 모형을 하나 집어 들었다. 강아지? 아니다, 자세히 보니 양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그것을 빤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든가.’

마지막에 그가 뱉었던 말이, 그리고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에단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은하도 알았다.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할까. 다만 그는 이곳의 상식이 부족했다. 과거의 은하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에단이라면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붙잡혔을지도. 혹여나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지나가던 행인을 그때 그 벤치처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거나…….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자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문제는 에단이 어디로 갔는지는 고사하고 언제부터 없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연과 민주와 눈싸움을 하느라, 목도리를 돌려주러 가느라, 괴담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동안 에단을 반쯤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 건 나야.’

은하는 티슈 모형을 그대로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곱게 접어 두었던 빨간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 잠시 손끝으로 목도리를 만지작대던 은하는 이내 결심한 듯 그것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우선은 집 주변을 중심으로 에단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단에게 휴대전화라도 있었더라면.’

어째서 시우가 은하에게 가장 먼저 선물한 물건이 휴대전화였는지 이제야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은하는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상의 안에 숨겨져 있던 그것은 펜던트였다.

펜던트를 손에 감싸 쥔 은하가 주문을 외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추적.”

[Cast Spell ‘위치 추적’ 감지]

[당신은 ‘위치 추적’을 요청하셨습니다. 유물 ‘검은 장미 펜던트’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지난번 게이트 내에서 유환을 찾기 위해 펜던트를 사용했을 때, 죽은 자에게는 추적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은하였다.

다행히 펜던트의 추적 기능이 먹히는 것 같았다. 은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중얼거렸다.

“활성화.”

[추적 개체 파악 중.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 - - - Loading - - - ]

[추적 개체를 발견했습니다. 좌표 364, 157. 즉시 안내를 요청하시겠습니까?]

‘찾았다.’

이후 은하는 펜던트가 안내하는 좌표로 이동했다. 그러나 펜던트가 있다고 한들, 그것은 말처럼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남은 거리 11.8km]

은하가 생각했던 것보다 에단이 꽤 멀리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

펜던트는 대상이 있는 곳의 방향과 남은 거리를 알려 줄 뿐, 목표 지점을 정확하게 콕 집어 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기에도 애매했다.

[남은 거리 12.2km]

……심지어 지금처럼 대상이 움직이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물론 은하의 신체 능력이라면 웬만큼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건물 옥상을 누비며 뛰어다닌다면 속력은 배가 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주변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즉 사람이 많은 대로는 이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은하는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움직이면서도 최대한의 속력으로 에단을 쫓았다.

‘이 방향은…… 인천인가.’

도중에 은하는 에단이 서울을 벗어나 인천, 혹은 그 인근까지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남은 거리 3.1km]

[안내를 종료합니다.]

“……?”

좌표를 쫓아가던 은하가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쫓아가면 멀어지고 또다시 쫓으면 멀어지는 에단 탓에, 이미 하늘에는 해가 지고 달이 걸려 있을 무렵이었다.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은하는 다시 한번 추적 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추적.”

[추적 개체 파악 중.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 - - - Loading - - - ]

[추적 개체를 발견했습니다. 좌표 577, 964. 즉시 안내를 요청하시겠습니까?]

[남은 거리 3.1km]

[안내를 종료합니다.]

이후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고장이라도 난 걸까? 따로 안내 메시지가 뜨지 않는 것을 보면 에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원인은 모르겠으나 추적 기능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는 건 확실했다.

‘3km 정도라면 그렇게 멀지는 않아.’

더 늦기 전에 에단을 찾아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오랜만에 이렇게 맨몸으로 먼 거리를 이동했더니 꽤 지치기도 했다. 펜던트를 상의 밑으로 집어넣은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스팔트 위 세워진 뾰족뾰족한 철탑 곁에서 어둠에 까맣게 잠든 바다. 해안에 들러붙은 듯 멈춰 있는 커다란 배들과 저 너머로 넘실거리는 건물 조명들이 희끄무레했다.

‘인천항 근처군.’

시간이 늦기도 한 데다 은하가 있는 곳이 인천항 중에서도 워낙 외진 곳이라 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먼 곳에서 간간이 뱃고동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은하는 레고처럼 바싹 붙어 있는 컨테이너 박스 사이를 누벼 가며 에단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아악─!”

돌연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에 걸음을 멈칫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에단?’

워낙 순식간이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 비명은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에단이 그런 식의 비명을 지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깨달았을 때 이미 은하는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뛰고 있었다.

“으, 으아아……!”

이번에 들려온 것은 비명이라기보다는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였다. 은하는 확신했다. 저 목소리는 에단의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달리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 살려 줘……!”

끊길 듯 말 듯 한 목소리. 가깝다.

그다음 순간, 은하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오늘따라 유독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이었다. 이어서 보이는 건 해안가에 쓸쓸히 멈춰 선 낡은 배. 달빛을 흡수한 아스팔트 표면은 모래사장처럼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한 남자.

“괜찮으세요?”

은하가 남자를 향해 물었으나 그는 “으…… 으어…….”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앓을 뿐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은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다. 달빛에 물든 낡은 배를 등지고 선, 검고 호리호리한 그림자를.

또각.

청명한 구두 소리가 정적 위를 걸었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부드러이 흩날린다. 새까만 그림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드는 순간 또각, 다시 구두 소리가 이어진다.

즈즈즈즈…….

마치 칠판 위를 손톱으로 긁듯 새까만 양산 끝이 거친 아스팔트 표면 위로 질질 끌렸다. 그에 따라 철을 긋는 듯한 불편한 금속음이 이어진다.

휘릭!

은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남자를 두 팔로 들어 안고 ‘그것’으로부터 재빨리 거리를 넓혔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제 등 뒤에 남자를 내려 둔 은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만 밤. 반쯤 그늘진 은하의 얼굴선을 따라 희미한 땀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

“너는─.”

맞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친다.

“흑염의…… 프린세스.”

은하의 얼굴과 똑 닮은, 괴담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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