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6)화 (166/306)


#166. 환불 원정대
2023.01.13.


집 근처 쇼핑센터.

오늘 은하는 에단과 함께 들렀던 옷 가게를 찾아 다시 한번 이곳을 방문했다.

“감사합니다.”

기사에게 돈을 건네고 택시에서 내린 은하는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내용물은 에단이 은하에게 주었던 약 20만 원짜리 빨간 목도리였다.

은하는 아직까지도 그가 이 목도리를 훔친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옷 가게에 이것을 돌려주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사실 에단도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에단은 그날의 작은 다툼 이후 방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노크를 해도 답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둘 중 하나였다. 자거나, 단단히 토라졌거나.

그곳은 은하의 오피스텔이니 억지로 문을 열려면 열 수야 있었다. 하지만 은하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나오겠지.’

의도가 좋았다고는 한들 물건을 훔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에단에게 사과할 이유도, 그를 달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우선은 더 늦기 전에 가게 측에 이 목도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분명 이 근처였는데…….’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수증도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 그날 들렀던 가게가 한두 곳이어야지. 최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쇼핑센터를 활보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어? 언니!”

누군가 손을 붕붕 흔들며 다가왔다.

비록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은하는 단숨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분홍색 야구 모자, 귀 뒤로 넘긴 단발. 어제 늦게까지 집 앞에서 함께 눈싸움을 했던 아연이었다.

헐레벌떡 은하에게 다가온 아연은 살짝 마스크를 아래로 내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저기 지하철역 근처에 있지 않았어요?”

“아니, 택시 타고 방금 내렸는데.”

“엥? 진짜요? 이상하다. 분명 언니였는데.”

“잘못 봤겠지.”

“…….”

무언가 생각하는 듯 아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래?”

“아, 노노. 암것도 아님. 그것보다, 언니도 쇼핑하러 온 거예요? 나도 같이 다녀도 돼요?”

아연은 방실방실 웃으며 은하의 팔짱을 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은하는 아연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어젠 잘 들어갔고?”

“당연하죠. 아니, 그것보다 들어 봐요, 언니. 내가 어제 잠들기 전에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니까!”

“왜?”

“아쉽잖아요! 어제 그 꼬맹이를 아주 그냥 조져 놨어야 하는데! 꼴에 S급이라고 쥐새끼처럼 얼마나 재빠른지. 아, 쥐새끼는 난가. 암튼암튼!”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는 길에서 파는 솜사탕이 들려 있었고,

“그래서 언니 영상 댓글에다가 내가 뭐라고 달았게요?”

또 정신을 차려 보니 아연과 함께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있었다.

‘뭐, 가게 문이 닫기 전에만 가면 되는 거니까.’

아연 탓에 계획에 다소 차질이 생긴 것은 사실이었으나, 은하는 이렇듯 아연과 함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학창 시절 때 친구와 함께 방과 후 거리를 돌아다니던 추억이 떠올랐으니까. 다시는 이런 시간이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3년 동안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쪼르륵. 빨대를 빨며 아연이 물었다.

은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고민했다. 이야기가 굉장히 길어질 것은 둘째 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어떻게든.”

……너무 둘러댔나. 은하가 시선을 들어 힐끗 아연을 바라봤다. 뭔가 설명을 더 덧붙이는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역시 울 언냐 대박.”

─아무래도 필요 없었던 듯했다.

이후 아연과 은하는 30분 정도 더 대화를 나눈 뒤에야 카페를 나왔다.

아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득을 본 점도 있었다. 평소 쇼핑을 즐기는 아연은 이곳의 지리에 대해 빠삭했고 그 덕분에 은하는 목적지였던 옷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딸랑─

“어서 오세요, 손님!”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은하는 아연에게 “잠깐 구경하고 있어.”라고 말한 뒤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쇼핑백을 점원에게 건넸다.

“환불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손님?”

“아뇨. 제 친…… 구가 이걸 여기서 훔친 것 같아서요. 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네? 훔치셨다고요……?”

점원이 당황한 듯했다.

“언니, 친구가 누군데 도둑질을 해요?”

심지어 저쪽에서 선글라스를 구경하던 아연마저 여기로 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가 설명을 고민하던 은하는 시우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친구가 조금 아파서.”

“아파요?”

“응.”

졸지에 아픈 사람으로 만든 것은 미안하지만, 이것 말고는 적당한 말이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그때의 시우를 이해하게 되는 은하였다.

은하는 점원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같이 오지는 못했지만 반성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아…….”

점원의 시선이 또르륵 떨어져 쇼핑백 안 빨간 목도리에 닿았다. 훔친 것이 사실이라면 신고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렇게 돌려주러 왔으니 상관없나?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소영 씨, 무슨 일이야?”

신입의 일 처리를 지켜보던 다른 베테랑 점원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에 큼지막하게 ‘직영 매니저’라고 쓰여 있었다.

은하는 그녀가 에단을 보고 얼굴을 붉혔던 바로 그 점원인 것을 기억해 냈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제 같이 오셨던 남성분은 오늘 안 보이시네요?”

그녀 역시 은하를 알아보는 듯했다. 워낙 에단의 인상이 강렬한 탓도 있겠다.

“여기 이 손님의 친구분께서 이걸 훔치셨다고…….”

신입 점원은 매니저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 목도리…… 분명 계산하셨을 텐데요?”

“계산을, 했다고요?”

그 곁에 가만히 서 있던 은하가 불쑥 입을 열자, 목도리를 살펴보던 매니저가 은하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네, 확실해요. 왜냐면 잘생…… 아니, 목도리 한 장 사는데 100만 원짜리 수표를 건네는 손님은 잘 안 계시니까요.”

에단이 100만 원짜리 수표를? 은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선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삑, 삐빅.

포스기를 두드리던 매니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네. 계산하셨어요.”

그녀는 포스기를 돌려 어제의 판매 내역을 은하에게 직접 보여 주었다. 화면을 확인한 은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수표가 아직 남아 있을 텐데. 보여 드릴까요?”

“……아, 아뇨.”

은하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 * *

아연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피스텔 근처까지 도착한 은하였지만 어쩐지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이거, 훔친 거잖아.’

‘아니야.’

‘너 돈 없잖아.’

‘있어.’

에단의 표정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에단은 눈썹을 찡그린 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

쇼핑백 손잡이를 잡은 손에 꼬옥 힘이 들어갔다. 결국 돌려주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와 버렸다. 이것은 정당하게 ‘구매’한 물건이니 가게 측에 돌려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에단은 도대체 어디서 돈이 난 것일까? 그런 의문에 앞서 은하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바로 ‘에단에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까’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도둑 취급을 했으니 에단이 마음이 크게 상한 게 당연했다. 게다가 에단이 목도리를 구매한 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은하를 위해서였다.

미안한 마음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뱅글뱅글 집 주변을 맴돌고 있던 와중이었다.

“누나아!”

오피스텔 앞에서 민주와 마주쳤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민주는 마치 은하가 어디에 들렀다 오는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누나 아까 종로에 있었잖아요. 누나는 헬기 같은 거 안 타고 다니니까 나보다 훨씬 늦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종로?

은하는 오늘 집 근처 쇼핑센터에 목도리를 돌려주러 갔을 뿐, 다른 곳은 들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종로라니. 그곳에는 용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근처에 버스트 게이트가 출현해서 가는 길에 누나를 봤거든요. 상황이 급해서 인사 못 한 게 마음에 걸려서,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잘했죠? 민주가 배시시 웃었다. 원래라면 ‘그래, 잘했어.’ 하고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은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까 저기 지하철역 근처에 있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쇼핑센터에서 마주친 아연도 그런 이상한 소리를 했었지. 민주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던 은하의 입술이,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살짝 벌어졌다.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이 또다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목격자는 평택시 K 은행에 근무하는 30대 청년으로…….」

──설마.

“혹시 종로에서, 내가 뭘 입고 있었어?”

“그거요. 누나가 입고 다니는 그 드레…….”

어라. 말을 하다 말고 민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은하는 드레스가 아닌 일상복 차림이라는 것을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민주의 눈빛 역시 변했다.

“……뭐야.”

민주가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민주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헌터였다. 그러니 흑염의 프린세스 괴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그저 ‘겁 많은 어른들이 만들어 낸 미신’인 줄로만 알았을 뿐.

──지금까지는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