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5)화 (165/306)


#165.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어 (2)
2023.01.12.


이준은 S급 헌터였다. 그러니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것’을 쓰러트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준은 결국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이길 자신은커녕 공격할 자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것’의 정체가 한국 헌터 괴담에 나오는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괴담 속 존재를 실제로 보았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은하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몬스터의 종류일까? 하지만 이준이 ‘그것’을 만난 곳은 게이트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인근에서 게이트가 폭주했다거나 그래서 몬스터가 쏟아졌다는 정보도 없었다.

‘혹시…… 정말 은하였을까?’

미친 생각일지는 몰라도, 당시의 이준은 ‘그것’과 은하를 겹쳐 볼 정도로 은하의 생존을 바라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어딘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괴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꽤 많았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정말 ‘괴담’이었기 때문이다.

이준은 수소문 끝에 흑염의 프린세스를 보았다는 목격자를 여럿 찾았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또다시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흑염의 프린세스를 조우했다는 장소를 찾아 실제로 ‘그것’과 다시 한번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은하야, 나야, 백이준……! 모르겠어? 제발.”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은하가 아니었고, 이준은 결국 ‘그것’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은하의 탈을 쓴 그 역겨운 몬스터를 이 두 손으로 해치워 버리겠다는 다짐은, 그 애와 똑 닮은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매번 연기처럼 쉽게 지워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이윽고 이준은 ‘그것’을 쫓는 대신 진짜 은하의 흔적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10년, 20년,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마침내 이준은 마음속 마침표를 찍었다. 그 애는 정말 죽은 것이라고.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그 애는 없다고.

그런데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마침표를 찍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포효’ 길드, C급 게이트에서 고레벨 몬스터를 조우하다.>

<또다시 불거진 늑대 길드 인맥 논란, 검은 불씨로 잠재우다>

<흑염의 프린세스, 유명 헌터 BJ 킹갓수 게이트 방송에 출연! F급 헌터가 일격에 보스를 처리? 말도 안 돼>

“최근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헌터랍니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 우스꽝스럽고 기묘한 이명을 가진 F급 컨셉 헌터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준은 휴대전화 액정 속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쩌면’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닐 거야. 이번에도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은하라면?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한국의 유명 길드와 계약까지 했다잖아.

이준은 오래도록 고민했다. 희망 그리고 실망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는 분명 인간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또한 이준에게 있어 은하의 얼굴을 한 ‘그것’만큼 역겹고 혐오스러운 몬스터는 달리 없었다.

만일 액정 속 이 여자가 괴담 속 ‘그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비행기 예약해. 한국행으로.”

이 두 손으로 해치워 버리고 말리라.

그렇게 이준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30년, 사실상 10년 만의 방문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준은 우선 캐서린을 시켜 늑대의 계약 헌터,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또한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유심히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차은하’라는 이름이 아닌 ‘이유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출생지도, 생년월일도 은하와는 달랐다.

협회와 계약한 이준은 여의나루 역에 발생한 버스트 게이트에 ‘흑염의 프린세스’를 불렀다.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S급 헌터인 중학생 꼬마를 구출하기 위해 수색조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정말 은하다운 행동이었으나 이준은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흑염의 프린세스’가 말했다.

“실망이네.”

──라고.

이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 그 애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아서.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 저 애가 진짜 은하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정신을 차려 보면 이준은 늘 ‘흑염의 프린세스’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준은 ‘흑염의 프린세스’를 은하와 겹쳐 보고 있었다. 그만큼 닮은 점이 많았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진짜일지도 몰라.’

그 확신은 부산 언노운 게이트 사건 이후 병원에 입원한 그녀를 찾아갔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입원 소식을 듣고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준은 약을 먹고 잠이 든 듯한 그 애를, 그리고 왼쪽 손목의 낡고 해진 소원 팔찌를 보았다.

정말 은하 네가 맞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오랜 방황 끝에 이윽고 은하라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그녀를 대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에 들떠 있던 와중이었다.

“【요한, 나 오늘 그녀를 봤어.】”

GIA의 동료, 안드레아가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아침 현안이 개방하였고, 거기서 12개의 탑을 보았다고. 그리고 곧 그 탑들을 중심으로 한 검은 구름이 전 세계를 뒤덮었다고. 그것이 안드레아가 본 ‘예정된 미래’였다.

“곧 진짜 재앙이 시작될 거야. 그때 그녀가 꼭 있어야 해.”

“……그 애가?”

“그래. 그녀가 네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는 아직 몰라.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인류에게는 그녀가 필요해.”

──필요.

그놈의 필요. 이준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세월을 겪고 나서도, 아직도 타인을 위해 그 애가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애를 헌터계에서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 돌아온 그 애가, 이번에는 또 어떤 희생을 하게 될지 몰랐다.

‘은하에게 말해야 해.’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첫 재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녀에게 달려가 줄곧 널 그리워해 왔다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면…… 과연 그 애가 믿어 줄까? 자신이라면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은하라면.’

은하라면 믿어 줄지도 몰라.

이준은 결심했다. 그 애를 찾아가기로. 모든 것을 다 전하기로. 하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백 헌터님, 체이서의 ‘소드마스터’가 방한했다고 합니다. 추적 결과 그가 한국의 정보 길드를 찾았다고 하는데…….】”

말끝을 흐린 캐서린이 A4 용지 사이즈의 자료를 건넸다.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해 물었다고 하더군요.】”

자료 상단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 애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순간 이준은 벼락처럼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은 높은 자리에 앉은 만큼 많은 적이 있다는 것을. 더군다나 아무런 협상도 언질도 없이 한국에 돌아가 협회와 계약까지 해 버린 마에스트로를 기껍게 여기지 않는 자는 수두룩했다.

“【제시된 일자까지 귀국하지 않는다면 체이서 길드 소유의 일부 시설을 국유화(國有化)하는 것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미국 협회가…….】”

“【체이서 길드의 ‘샐러맨더’가 이번에 밀리어네어 길드로 소속을 옮길 예정이라고 합니다. 마에스트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핵심 인물들을 빼 가고 있는 것일 테죠. 돌아가서 그를 회유하는 것이…….】”

“【백 헌터님, 말씀하신 대로 플로리다주(州)의 S급 게이트 입찰에 성공했습니다만, 이터니티의 길드 마스터가 인정할 수 없다며 미팅을 요구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워 버린 탓에 그 공백을 메꾸는 일조차 버거웠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이준의 ‘약점’이었다.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협박이나 거래를 제안해 올 것이 분명했다. 미국 랭킹 3위 마에스트로와 연을 만들기 위해서, 혹은 장기짝으로 쓰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걱정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준에게 약점 따위 없었으니까. 그 애를 잃은 그날 이후로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멀리해야 해.’

은하가 자신의 약점인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사방에선 그녀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 애가 또다시 ‘필요’에 의해 내몰릴 것이다.

이준은 고민했다. 그리고 선택했다.

은하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애를 밀어내기를.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이 헌터계로부터.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665/666) │ 보상 : ???]

남해안에 발생한 언노운 게이트. 그곳에서 상황이, 시스템이, 아이템이 그녀를 몬스터라 가리킨 것이었다. 단순히 오류라고 치부하기에는 납득 가지 않는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이번에도 아니었나.’

그 순간 이준이 느낀 감정은 슬픔도 허탈함도 아니었다. 냉정. 오히려 심해에 가라앉은 듯 차가워졌다.

아, 그렇구나.

그 애는 죽었잖아.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바보같이.

우스웠다. 단단한 무언가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냉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분노였다. 스스로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분노.

“감히, 몬스터 주제에.”

그래, 소원 팔찌 따위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했다. 그 팔찌 하나만으로 확신했으면 안 됐는데. 조금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끝까지 경계했어야 했는데.

이준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는지에 대해 상기했다. 그것은 저 역겹고 끔찍한 ‘흑염의 프린세스’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것’을 공격했다. 비록 그 애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충격적인 전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모두를 구출하기 위해 게이트에 남겨지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몬스터 주제에, 끝까지 은하인 척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뜨거울 거야.”

‘흑염의 프린세스’는 모두를 게이트로부터 내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눈이 마주쳤다. 은하가 웃었다. 그때처럼.

“흉터는 안 질걸.”

그 목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수많은 주마등이 이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주마등 끝에 비로소 떠오른 것은─

‘왜?’

수없이 떠오르는 의문들이었다.

왜 너인 거야?

왜 몬스터가 아니었던 거야?

그럼 난 왜 너를 공격한 거지?

그럼 넌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왜? 은하야, 왜……?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처럼 그 애는 검은 균열에 잠식되듯 서서히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죽어 가듯, 하염없이 까맣게, 까맣게.

──그리고 그것은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 * *

“이 미친……! 야! 거기 안 서?!”

“잡아 보든가.”

아연을 향해 놀리듯이 혀를 쭉 내민 민주가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아연은 눈에 불을 켜고 그런 민주를 무섭게 쫓았다.

새하얀 눈길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겹치듯 찍혀 나간다.

아연과 민주 사이로 폭탄 같은 눈덩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은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새하얗고 굵은 눈이 하늘에서 설탕처럼 펑펑 쏟아졌다. 코끝이 빨개질 정도로 낮은 기온이었으나 은하는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이 하나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허공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맨손바닥 위에 앉은 눈송이가 사르륵 녹아내리는 감촉이 간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실감했다. ‘아, 정말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손바닥 위에 솜사탕처럼 녹은 눈송이를 바라보던 은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

까만 밤하늘 아래 우두커니 세워진 가로등. 따듯한 빛깔의 주홍빛 가로등 아래, 방금 누군가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혹시…….

‘고양이?’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누나! 살려 줘요!”

아연에게 헤드록으로 제압당한 민주가 빽 소리를 질렀다.

가로등 아래를 빤히 응시하던 은하는 이내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민주와 아연의 곁으로 사박사박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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