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2)화
(162/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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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어긋나는 이해
2023.01.09.
다음 날.
“어서 오세요, 손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집 근처 쇼핑센터. 즐비한 가게 중 적당한 곳으로 들어온 은하는 산뜻한 미소가 인상적인 점원과 마주했다.
“아, 겨울옷을 좀 보려고요.”
“본인이 입으실 옷 말씀이신가요?”
“아뇨, 이쪽.”
은하는 자신의 뒤를 휙 가리켰다.
‘어머.’
점원은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기.”
넋을 놓은 듯한 점원 앞에서 은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점원은 화들짝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여기 남성분이 입으실 옷 말씀이시죠?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황급히 그들을 안내하면서도 점원은 힐끗힐끗 은하 쪽을, 정확히는 그녀를 뒤따라오는 분홍색 곱슬머리 사내를 훔쳐보았다.
‘사람 맞아?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사내는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조금은 서늘하게 뻗은 긴 눈매, 새빨간 핏빛 눈동자에 날렵한 콧날. 피가 흐르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새하얀 피부까지.
남자는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끝이 동그랗게 말린 분홍색 머리카락이 마치 양털 같아서 그 차가운 인상이 오묘하게 중화됐다.
남자는 이런 가게가 처음인지 낯선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돌 덕질 십수 년 차인 그녀였으나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저런 외모를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남돌 여돌을 통틀어서 말이다.
워낙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탓일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점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드는 순간, 에단이 입을 열었다.
“뭘 쳐다봐.”
“…….”
“…….”
점원은 물론이거니와 곁을 걷던 은하, 이쪽을 힐끗힐끗 살피고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도 얼어붙었다. 그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에단.”
은하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아, 아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손님.”
점원은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지만 입꼬리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에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짧게 답했다.
“뭐, 됐어.”
오늘은 은하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일상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은하는 에단에 대한 처우를 고민해야 했다.
에단의 정체는 여전히 불확실했지만, 은하는 그가 현대 상식에 무지하고 가진 것이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전의 은하처럼, 혹은 그보다 훨씬 말이다.
은하는 그런 그를 ‘이쪽’으로 데리고 온 장본인이었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은하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의식주였다.
따라서 은하는 그에게 의식주부터 제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전에 시우가 은하에게 그리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은하의 오피스텔은 둘이 살아도 차고 넘칠 만큼 넓은 고급 오피스텔이었고, 빈방이야 많았다. 당분간 생활 공간은 그걸로 충분할 테고, 밥이야 은하가 먹을 때 같이 챙겨 주면 될 일.
남은 것은 의식주 중 ‘의(衣)’. 옷이었다.
그리하여 이곳 옷 가게까지 찾아오긴 했는데.
“나한테 볼일이라도?”
“아, 아, 아뇨……. 죄, 죄송해욧!”
자꾸만 문제가 발생했다.
에단이 쓸데없이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살기 섞인 태도로 응했던 것이다.
“에단, 그만해.”
“뭘?”
“겁주지 말라는 소리야.”
은하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에단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저놈들이 날 자꾸 쳐다보잖아.”
“잘생겼으니까 그렇겠지.”
“잘…… 뭐?”
한껏 좁아졌던 그의 미간이 스르륵 펴졌다. 날카롭게 솟아 있던 눈매 역시 동그랗게 변했다.
“내가 잘생겼어?”
“그런가 보지.”
“대답이 그게 뭐야.”
“됐고 빨리 따라와. 옷 사야 할 것 아니야.”
은하는 그만 대화를 단절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게 내쉰 한숨은 덤이었다.
‘괜히 데리고 나왔나.’
앞으로는 살 것이 있으면 혼자 나오거나 제휘를 시키는 편이 낫겠다. 은하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래도 기왕 나온 거, 필요한 물건은 사서 돌아가야겠지. 은하는 쇼핑을 서둘렀다. 그렇게 대충 걸칠 만한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은 뒤, 계산대로 향하려는데.
“……?”
에단은 저쪽 진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은하는 그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곧, 그가 진열대에 나열된 빨간 목도리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갖고 싶은 건가?’
가격은 192,900원. 목도리 가격치고는 매우 비쌌다. 은하는 펭귄 지갑을 꺼내 내부를 확인했다.
오는 길에 ATM기에 들러 돈을 인출한 덕분에 오랜만에 펭귄이 통통했지만…… 목도리 한 장에 그만한 거금을 투자하는 일은 고민이 됐다.
“다 샀어?”
문득 에단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펭귄 부리를 닫은 은하는 짧게 답했다.
“또 오세요, 손님!”
이후, 계산을 마친 은하는 도망치듯 가게를 벗어났다.
“얼른 돌아──.”
가자. 그렇게 말하려는데, 뒤따라오던 에단이 그곳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두리번대고 있으니, 조금 지난 후에야 에단이 옷 가게에서 나왔다.
“뭐 했어?”
“그냥.”
에단은 어깨를 으쓱했다.
은하는 그런 그를 힐끔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걸칠 옷가지 몇 벌을 사는 데에 자그마치 3시간이나 걸렸다. 벌써 해가 뚝 떨어지고 달이 머리 위까지 오른 시간. 우선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귀가를 서두르던 중이었다.
스르륵─
무언가 따듯하고 포근한 것이 목에 걸렸다.
“……?”
은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 주변을 매만졌다. 목도리. 제 목에 걸린 그것은 빨간 목도리였다.
“줄게.”
뒤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은하는 제 목에 걸린 그것이, 아까 옷가게에서 에단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그 목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은하는 그것을 도로 풀고 에단에게 내밀었다.
“지금 당장 가서 돌려주고 와.”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은하는 평소와 비슷한,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에단. 그는 현대 지식에 대해 무지하다. 당연했다. 그는 ‘다른 곳’의 인간이니까.
그런 에단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게다가 은하는 분명 미궁에서도, 네뷸러에서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없었으면 무사 탈출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은하는 에단을 이해하려고 했다. 노점상이 파는 빵을 무전취식했을 때에도, 길가의 벤치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을 때에도, 불멸 길드원을 공격하려 들었을 때에도 말이다.
하지만.
“이거, 훔친 거잖아.”
은하가 에단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은하는 에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너 돈 없잖아.”
그가 ‘현대 화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이 목도리의 가격은 약 20만 원이었다. 그만한 돈을 에단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에단은 말했다.
“있어.”
“거짓말하지 마. 넌 돈이 뭔지도 몰랐잖아.”
은하의 말에 에단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은하는 동요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돈이 있었다면 그때 왜 노점상의 빵을 먹고도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돈이 없었으니까.”
“……그럼 영수증 좀 보여 줘.”
“영수증?”
“그래. 계산하면 그 증거로 주는 종이. 네가 이걸 훔친 게 아니라면, 영수증을 받았을 테니까.”
“아, 그거?”
에단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버리라고 했는데.”
“…….”
그 앞에서, 은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든가.”
에단 역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여차여차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귀가하자마자 손님방으로 직행해 버린 에단은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던 은하는 식탁 위에 올려 둔 빨간 목도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후 은하는 옷 가게로 돌아가 목도리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이미 그곳은 문을 닫은 후였다. 다음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우선은 집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든가.’
그 말을 뱉던 에단의 표정이 어쩐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분명 상처를 받은 것일 테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둑질을 한 건 맞지만, 어쨌거나 의도는 은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걸 테니까.
좋게 말을 하며 타이를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은하는 그런 쪽으로 그다지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피곤하다.’
쇼핑도 그렇고, 에단과의 관계도 그렇고.
차라리 연속으로 고레벨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 덜 피곤할 수준이었다.
“…….”
은하는 한참 고민하다가 에단이 있는 손님방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노크를 할까 말까, 손을 올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든 찰나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매니저님?’
이상했다. 오늘은 분명 늦게까지 일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딩동─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은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딩동─ 딩동─
딩딩디리딩딩동─
처음에는 간격을 두고 울리던 초인종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속도. 은하는 초인종이 고장 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꺄악!”
“헉!”
작은 두 개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언니이이이─!”
“누우나아아─!”
트릭스터 송민주와 괴도 강아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