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61)화 (161/306)


#161. 초청하지 않은 식객
2023.01.08.


약 1시간 전.

불멸 길드 본부에 다녀온 은하는 우선 자신이 살던 오피스텔로 향하기로 했다. 3년이 흘렀으니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피스텔로 들어선 은하는 깜짝 놀랐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현관은 물론이거니와 이부자리는 바로 어제까지 사람이 살기라도 했다는 듯 깨끗하고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기가 네 집이야? 꽤 넓네.”

에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집 내부를 구경했다. 신기한가 보다. 현대의 ‘집’이란 곳을 방문한 적이 없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이 각진 건 뭐야?”

“냉장고.”

“그러니까 그게 뭔데?”

“……냉장고.”

은하는 냉장고를 확인해 보았다. 그 속에 진열된 반찬통 가운데 익숙한 어묵 볶음을 발견한 순간, 이 우렁각시의 주인공이 제휘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히끅…….”

은하는 맞은편에 앉은 제휘에게 티슈 한 장을 건넸다.

“이제 좀 진정되셨어요?”

“네, 네에…… 감사, 크흥, 죄송합니, 흐끅.”

은하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 콧물 쏟아 내기 시작한 제휘는 장장 40분을 넘도록 대성통곡을 하고서야 이제 겨우 진정이 된 듯했다.

“저는…… 흑, 저는요, 저, 정말 헌터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오오…….”

아니, 정정한다. 아직까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은하는 새로운 티슈 한 장을 뽑아 다시 그에게 건네며 그를 달랬다. 달랬다기보다는 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럼 이 영상 속 흑염의 프린세스는 정말 헌터님 본인이 맞았던 거네요.”

1시간 후, 이제는 정말 진정이 된 제휘는 미국에서 찍힌 ‘몬태나주 흑염의 프린세스 영상’을 보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미국에서 헌터님을 기다리고 있을 걸……. 아니, 잠깐. 그럼 어떻게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던 거예요?”

“도움을 좀 받았어요.”

“누구에게요?”

은하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데이빗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에게?”

데이빗이 자신을 이준의 수행인이라 소개했으니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란 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빗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문득 그가 했던 부탁에 대해 떠올랐다. 한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줄 테니 이준을 만나 달라고 했던가.

물론 은하는 그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데이빗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은하를 한국으로 보내 주었다.

딱히 약속을 한 것이 아니니, 이준을 만나 달라는 그의 부탁을 굳이 은하가 들어 줄 의리는 없다. 하지만…….

‘서울시 반하동 287-14번지. 그 묘비를 돌봐 달라. 그것이 제 상사가 제게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따듯한 코코아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이 만일 진실이라면, 나는…….

“헌터님?”

“아, 네.”

제휘의 목소리가 퍼뜩 정신을 차린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우선 이준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루자. 지금 당장 생각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이후 그들은 그동안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헌터님께서는 게이트 안에 1년도 계시지 않으셨다고요?”

“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요. 아무래도 게이트 내부와 현대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 같아요.”

이전에도 그랬고. 은하는 그 말을 삼켰다.

“그렇군요.”

은하의 말을 들은 제휘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뇨, 그냥…… 그렇게 쉽게 제 이야길 믿어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언노운 게이트에서 이렇듯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도 놀라울 텐데, 3년이 아닌 1년만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사실까지도 제휘는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고 믿어 주었다. 은하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제휘가 은하의 말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지금 이 자리로 우리를 탈출시킨 사람은 1세대 헌터, 차은하입니다.’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를 닫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시우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그 이후로 인터넷에 자신의 졸업 사진이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마…… 좋아하시진 않겠지.

“믿고 자시고, 언노운 게이트니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상하지 않잖아요.”

제휘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만 답했다.

다행히 은하는 그에 대해 깊게 캐물어 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지는 않아서 안심이에요.”

“헌터님, 상당히 긍정적이신 분이셨군요.”

“3년이면 세상이 그렇게 크게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이번에도 30년이 흘러 있으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으니 3년 정도야 우스운 수준이었다.

은하는 제휘가 내어 준 따듯한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고는 말했다.

“……밖으로 나갔을 때, 기존에 알던 모든 사람이 날 잊었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난번처럼 내가 있을 곳이 사라져 있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 말이다. 두 번은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은하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겪었다. 그것에는 꽤 익숙해진 은하였지만 사실 그건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 세상에 헌터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네?”

은하는 코코아 잔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제휘를 바라보았다. 제휘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능청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헌터님, 헤드 헌터 1위가 누구인지 아세요?”

“헤드 헌터?”

“아, 헤드 헌터란 시스템 공인 글로벌 랭킹 12인을 칭하는 말이에요.”

그렇구나. 헌터님은 아무것도 모르시겠구나.

제휘는 은하에게 그동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남해안 게이트 사건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 세계 각국에 출현한 정체불명의 탑 이야기, 그리고 시스템이 글로벌 랭킹 12인을 선별한 이야기, 이제는 헌터들의 활동 분야가 게이트뿐만 아니라 탑까지 확장되었다는 것까지.

“가장 처음으로 봉쇄된 건 이집트의 탑. 제9궁 인마궁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전, 미국의 제7궁 천칭궁이 봉쇄되었고요. 두 번째죠. 사람들은 그걸 닫은 것이 헤드 헌터, 그중에서도 랭킹 1위가 아닐까 예상하고 있어요.”

“그게 누구죠?”

은하의 물음에 제휘가 씨익 웃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바로 헌터님이요.”

“…….”

은하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제휘는 은하의 반응을 기대하기라도 하듯 두 눈을 별처럼 반짝였다.

한동안 굳어 있던 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랭킹 1위라고요?”

“네!”

“단 한 번도 순위 변동이 없었다는 그 1위 말인가요?”

“네!”

“왜요?”

“네! ……아니, 네?”

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건 저도 잘……. 하지만 헌터님이 보통 헌터십니까? 저는 우리 헌터님께서 랭킹 1위인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요.”

왜냐면 헌터님은 1세대 헌터시잖아요! 그 말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어쨌든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오셨고…… 시스템도 헌터님의 진가를 알아봤으니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제휘는 그동안 은하가 겪었던 갖은 수모와 역경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컨셉 헌터로 몰리고 F급 헌터로 오해받으며 얼마만큼의 고통을 인내하셨던가. 이렇게 살아 돌아오셨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꽃길만 깔아 드리리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귀환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열광하려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그도 그럴 게, 공석이나 다름없었던 랭킹 1위의 자리가 채워진 거잖아.’

네뷸러 최상층에 도달하는 방법은, 현재 알려진 바로썬 크게 두 가지. 계속해서 탑을 오르거나, 랜덤으로 발생하는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것. 최초의 봉쇄자인 ‘심안’은 두 번째 방법으로 제9궁 인마궁을 닫았다.

‘이후 헌터 업계에서 약소국으로 통하던 대한민국이 급부상, 헌터 강국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지.’

심안의 탑 봉쇄 사건을 계기로 달라진 것은 또 한 가지 있었다.

많은 헌터들이 게이트 토벌 대신 탑 등반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자원과 경험치만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탑을 봉쇄하고 돌아온 심안은 국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탑은, 네뷸러는 인류를 멸망시킬 겁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류의 진화. 그리고 부진한 나머지 인류의 삭제. 즉 리셋(Reset)입니다.’

그 발언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산에 인삼 캐러 가듯 부푼 마음으로 탑을 드나들던 헌터들은 이제 그것을 ‘자원과 경험치의 금고’가 아닌 ‘클리어 해야 하는 거대 게이트’로 보게 되었다.

탑이 나타난 11개국은 특히나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들은 탑의 최상층까지 도달하기 위해 국적 불문 최정예의 공략대를 꾸렸고 정해진 주기, 정해진 날짜에 탑을 공략했다.

다행히 탑에는 저장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다. 즉 한 개의 층을 클리어 할 시, 나갔다 들어오더라도 초기화되지 않는다는 것.

2035년 1월, 미국 공략대의 29층 클리어가 최고 기록이었다. 2위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나타난 탑으로 세이브 포인트는 27층. 한국은 25층으로 세계 3위였다.

하지만 이제 최고 기록을 자랑하던 미국 탑이 닫힌 데다 랭킹 1위마저 귀환했으니 기존의 기록은 앞으로 크게 바뀌게 될 것이다.

“아마 수많은 국가와 연합체가 탑 공략을 위해 헌터님을 스카우트하려고 들겠죠.”

몸값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될 거라는 말씀.

탑의 등장으로 헌터계가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며 달라진 점 중에 한 가지를 꼽자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헌터의 이적이 흔해졌다는 점이었다. 30년 전 국적을 바꾸고 미국 헌터가 되어 버린 마에스트로는 일부 국민들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소리였다. 특히 능력 있고 강한 헌터는 더더욱 말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글로벌 랭킹 8위이자 노르웨이 출신 헌터 ‘백색 마녀’는 러시아 탑 공략대에만 2년간 참여하겠다는 조건으로 받은 계약금이 자그마치 6000만 달러라고 했다. 당시 환율로는 한화로 700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제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약 1시간 전까지 질질 짜고 있던 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크흠. 하지만 우선은─.”

제휘는 금방 표정을 고치고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부터 할까요?”

불어날 몸값을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도 좋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최근 흑염의 프린세스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랭킹을 제외하고서도 또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도시 괴담이었다.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최근 들어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었던 것.

‘그 이야기는 굳이 지금 헌터님에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오늘 같은 날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기분을 찝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귀환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런 시답잖은 괴담 이야기는 알아서 잠잠해질 테니까.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제가 지금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2인분 정도면 지금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도 충분히…….”

“아, 3인분으로 부탁드려요.”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는 제휘를 보며 은하가 말했다.

우리 헌터님……. 배가 많이 고프셨구나……. 측은한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던 제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넉넉하게 준비할게요.”

제휘는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평소에 부지런히 냉장고를 채워 둔 보람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표님한테도 연락드려야 하는데.’

식재료를 차례로 꺼내던 제휘는 문득 시우에 대해 뒤늦게 떠올렸다. 제휘만큼 그녀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을 그였다.

‘헌터님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엄청 좋아하시겠지?’

시우는 현재 유럽 중부 연합의 탑 공략일에 맞춰 스위스의 베른에 방문 중이었다. 그쪽이 공략하고 있는 17층은 수(水) 속성에 취약이라, 헤드 헌터 중 무려 3위이자 물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백랑에게 의뢰가 들어왔던 것.

‘아마 한국에 돌아오실 때까지 앞으로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텐데…….’

탑 공략은 일반적으로 30일, 그러니까 한 달은 잡는다. 한 달 내내 탑 내부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고, 상황에 따라 세이브 포인트를 지정하고 도중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갈 때도 있었다.

지금 당장 연락을 한다고 해서 시우가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내일쯤 메시지 정도는 남겨 두는 편이 낫겠다.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서프라이즈를 해 버릴까?’

그게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국에 돌아오시게 하는 거지. 헌터님을 보자마자 펑펑 우시는 거 아니야?

제휘는 재밌는 상상을 하며 칼로 송송 파를 썰기 시작했다.

“헌터님, 식사 다 됐어요!”

그로부터 약 30분 후.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린 제휘가 소파에서 쉬고 있는 은하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와서 드세요. 넉넉하게 차렸답니다.”

“잠시만요.”

그런데 웬일인지, 은하는 곧장 식탁으로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 방향은 분명…… 평소에는 창고로, 유사시에는 손님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에단, 일어나서 밥 먹어.”

……에단?

뒤집개를 들고 있던 제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단이 뭘까. 누구 이름 같기도 하고?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은하의 뒤통수를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밥……?”

놀랍게도 방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그것도 분홍색 머리카락의 처음 보는 덩치 큰 남자!

바닥에 닿을 듯 턱을 쩍 벌리고 서 있는데, 분홍색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한 그 남자가 이쪽을 쳐다봤다.

졸린 듯 감겨 있던 새빨간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가 이내 가느다랗게 휘어진다.

“어, 안녕. 얘 친구?”

“아…….”

제휘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휴대 전화가 있는 주머니에 스르륵 손을 가져갔다.

대표님, 헌터님이 이상한 걸 주워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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