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9)화 (158/306)


#159. 형님과 아우님
2023.01.06.


“죄송합니다. 대접할 만한 것이 이것밖에는 없군요.”

성윤은 편의점 봉투를 뒤적여 초콜릿 쿠키와 각종 우유, 캔 커피를 테이블 위에 보기 좋게 진열했다. 아까 황급히 길드원을 부르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급한 딴에 겨우 준비한 모양이다.

그동안 은하는 어떻게든 에단을 설득했다. 에단은 끝까지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은하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얌전히 있어야 할 텐데.’

은하는 그런 걱정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성윤을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갑자기 찾아온 건 제 쪽인걸요.”

그리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괴담의 인간형 몬스터는 아니니 걱정 마시고요.”

“아. 실례했습니다.”

“아뇨, 요즘 그 이야기로 많이 떠들썩한 건 이미 저도 알고 있어서.”

“괴담은 괴담일 뿐이죠. 그런 걸 믿는 겁쟁이는, 저희 불멸에는 없습니다. ……커흠, 아까 그놈을 제외하면요.”

성윤이 닫힌 문을 향해 찌릿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불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아까 그 ‘쌍칼’이라는 길드원을 벼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보다…….”

과자 진열을 마친 성윤이 무릎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 두었다. 아마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말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길어지는데,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습니다.”

은하는 지금 상황에 대해 아주 담백하게 설명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왔다니. 실로 그녀다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성윤은 그 이상을 묻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

“그렇군요. 그것참 다행입니다.”

“불멸은…… 많이 바뀐 것 같군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아무리 찬란한 태양도 때가 되면 저물기 마련이죠.”

“또한 때가 되면 다시 뜨기도 하고요.”

다정과는 거리가 먼 억양에, 마주친 두 눈은 여전히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성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건조한 듯 상냥한, 그녀만의 위로였다.

성윤의 눈이 반쯤 접혔다.

“……그렇지요.”

그는 단지 형태의 바나나 우유 위에 콕, 빨대를 꽂아 은하에게 정중히 내밀었다.

언뜻 그의 눈매가 붉게 번진 것 같기도 했다.

“그 ‘남해안 게이트의 영웅’이 귀환한 것을 알면 한국 전체가 떠들썩해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조용한 것이 이상하네요.”

“아. 한국에는 이제 막 귀국한 참이라.”

“귀국이요?”

“네. 네뷸…… 게이트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미국에 뚝 떨어져 있더라고요.”

“미국 말씀이십니까? 고생하셨겠군요. 지금 그쪽은 탑 봉쇄 일로 난리도 아닐 텐데요. 특히 탑이 위치한 몬태나주 쪽에는 봉쇄 여파로 몬스터가 흘러나왔다던데.”

“네. 그랬죠.”

쪼르륵.

빨대를 문 은하가 짧게 답하자 성윤의 눈빛이 휙 바뀌었다.

“……설마.”

“네. 그 몬태나주에 있었어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지구 반대편까지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곳에서 우연히 도움을 받게 됐고, 오늘 오전에 막 한국에 도착한 참이에요.”

오늘 오전이라고?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그렇다면…….

“바로 이곳으로 오신 겁니까?”

“네. 전해 드릴 것이 있었거든요.”

바나나 우유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은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성윤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이것은…….”

“제천대성, 유환의 도복 조각입니다.”

“…….”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는 동안 나름대로 수색해 봤는데 찾아낸 것은 그게 전부였─.”

은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눈앞에 건장한 청년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웃…… 사, 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곧 폭포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은하는 그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죽었을 줄 알았는데 버젓이 살아 돌아온 은하. 그런 그녀를 보고 성윤은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부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 실낱같던 기대를, 갈색 피가 묻은 저 천 조각 한 장이 무참히 깨 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은하는 그것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눈앞에 은하가 앉아 있는 것도 잊었는지, 성윤은 도복 자락을 손에 꼭 쥔 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

은하는 가만히 속눈썹을 아래로 떨구었다.

대한민국의 몇 없는 S급 중 하나, 제천대성.

그는 갈 곳도, 돈도, 기댈 곳도 없이 그저 건강한 몸과 열정만을 가진 이를 그러모아 ‘불멸’을 창립했다. 그곳은 곧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두 길드, 늑대 그리고 장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불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길드였다.

“열정과 패기 그리고 사랑.”

겨우 울음을 그친 성윤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것이 사부께서 늘 우리에게 강조하던 세 가지 사항이었죠. 또 그 세 가지를 의인화한 것이 바로 우리 사부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빨간 눈가를 벅벅 비비며 덧붙였다.

“세상이 사부를 어떻게 평가하든, 제게 사부는 최고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3년 전 언노운 게이트에서 전사한 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사실 너튜브를 통해 처음으로 활약이 제대로 알려진 F급 흑염의 프린세스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S급 중 무려 두 명, 닥터 플랜트 금로제와 제천대성 유환이 전사(戰死)한 일. 바로 그것이었다.

정부와 협회의 잇따른 조사로 닥터 플랜트가 언노운 게이트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게 되었다.

한국 헌터계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며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던 그녀가 사실은 그저 미치광이 게이트 연구자였다는 사실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로제의 연구소와 관련 자료들이 모조리 압수된 것은 당연지사, 장미 길드는 강제 해산되었고 간부들은 그 책임을 물어 헌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지금까지도 헌터 수용소 앞에는 그들을 사형시키라는 시위대가 극성이라고.

그렇다면 불멸은?

불멸의 경우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표면상 유환은 로제의 연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표면상이 아니라 사실도 그러했다. 제천대성은 닥터 플랜트의 연구를 직접적으로 도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윤은, 불멸의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제천대성은 닥터 플랜트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열의를 다해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보고도 못 본 척 방관했다는 것을.

자신이 이끄는 길드나 바깥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민간인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그 모든 책임을 뒤로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저 그녀와 함께 있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그러나 성윤은 제 사부를 욕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단 한 번도 제 사부를 원망하거나 그의 선택을 탓하지는 않았다. 설령 모든 국민이 그럴지언정 자신은, 자신만은 그래선 안 됐다.

갈 곳 없이 죽어 가던 뒷골목 불량배들을 한데 모아 있을 곳을 주고 더없이 커다란 지붕이 되어 주었던 그 찬란했던 이에게.

사랑의 ‘사’ 자도 모르는 불량배들에게 늘 사랑 타령을 늘어놓다가 마지막까지도 그 사랑을 좇아 눈을 감은 그 사람에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은하가 물었다. 불멸의 행보에 관해서였다. 우두머리를 잃은 조직은 힘을 잃기 마련.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길드라는 조직 역시 그럴 것이다.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응접실을 가장한 술 보관실. 유환이 가장 즐겨 찾던 곳으로 사실상 불멸에게 있어서는 ‘길드장실’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성윤은 당연한 듯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은하는 눈치챘다.

“현재 불멸을 이끌고 계신 거죠?”

도성윤. 현재 불멸의 길드장은 그가 틀림없다고.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유환의 순직 이후 불멸을 이끌고 있는 것은 2인자였던 허재민이 아닌 3인자 도성윤이었다. 그것이 유환의 바람이기도 했고, 길드원들 대부분의 의견이기도 했다.

“건물 주변을 둘러보니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혹시 이대로 길드를 해산할 생각이신가요?”

“음, 그건.”

성윤이 조심스레 말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를 내 세상처럼 누벼 가며 두 주먹으로 또 하루를 겁 없이 살아간다♬」

그의 호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큰 소리로 울렸다.

‘아직도 벨 소리가 그대로네.’

은하의 기억이 맞다면 이전에도 저 곡이었다. 취향에 그토록 맞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는 그의 휴대전화를 향해 힐끗 눈짓했다.

“받으세요.”

“아닙니다.”

성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착신 거부 버튼을 꾹 누르더니 다시금 그것을 호주머니에 쑥 넣어 버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부를 잃은 저희 길드에게, 이전처럼 일이 들어오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이런 말씀 드리긴 부끄럽지만 매달이 적자인 데다 이미 길드원 대다수가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났습니다. 남은 건 고작 사십 명 정도뿐이죠. 사실 그냥 이대로 해산을 하는 것이 길드를 위해서도, 남은 녀석들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긴 합니다만…….”

쓰게 웃은 성윤이 고개를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도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노운 게이트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비단 3년 전 남해안 게이트뿐만 아니라 그 전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로제의 잃어버린 딸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그러한 참사를 낳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부가 그런 그녀를 가슴에 품었다는 사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그 집착, 슬픔, 분노, 그리고 원망까지 모조리 다 품고서,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난 것이다.

그 죗값을 치러야 할 장미 길드는 해산되었고 주요 인물들은 모조리 수감되었다.

그러니 이것은 남은 그의, 불멸의 몫이었다.

“그것이 제가 사부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은(報恩)일 테니까요.”

성윤이 나직이 덧붙였다.

이후 그는 어디선가 술병을 하나 가져왔다.

“한잔 어떠십니까?”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값이 대단히 나갈 것 같아 보이는 고급주였다. 솔직히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밖에서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금방 나가 봐야 해요.”

오래 걸리면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군요.”

성윤 역시 아까 은하의 ‘일행’을 두 눈으로 보았다. 길드원을 향해 무섭게 손을 뻗던 그를 말이다.

“그렇다면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네?”

“어차피 이 정도 술을 대접할 만한 손님은, 이제 이곳에 찾아올 일이 없거든요. 그리고 헌터님이라면…… 사부도 용서하실 겁니다.”

“…….”

“이래 봬도 이놈, 허재민 녀석이 계속 눈독 들이고 있던 술이거든요. 하지만 사부께서는 이놈만큼은 아우님과 함께 마실 거라고 한 방울도 나눠 주지 않으셨죠.”

성윤이 술병을 은하에게 슥 내밀며 덧붙였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 * *

불멸 길드 본부를 나온 은하는 에단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를 향해 곧장 걸었다. 아까 없애 버린 벤치 곁의 또 다른 벤치였다.

다행히 에단은 어디 가지 않고 그곳에서 얌전히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다기보다는 단순히 꼴딱 잠에 든 것처럼 보이긴 했다.

비싼 술을 소중히 품에 안은 은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없애려고 했어.’

에단의 말이 뇌리에 깊게 남았나 보다.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대로 에단을 깨워도 괜찮았지만, 은하는 그러지 않고 조용히 그의 옆에 엉덩이를 내리고 앉았다.

아직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지금은…… 조금 더 이곳에 머무르고 싶었으니까.

“…….”

은하는 목이 꺾일 듯 고개를 들어 저 건물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붉은 깃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품속에 안고 있던 술병을 뽁! 하고 땄다.

어쩐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술이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비록 이런 야외 벤치에서, 그것도 곁에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녀석을 두고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한 모금, 딱 한 모금 정도는 괜찮겠지.

은하는 술병을 하늘 아래 펄럭이는 붉은 깃발을 향해 높게 들어 보였다. 그리고 쓸데없이 장황하고 시끄럽기만 한 건배사 대신 조용히 읊조렸다.

“2차전.”

……아니, 3차전인가.

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지만 혼자 그렇게 중얼거린 은하가 이윽고 술병에 입술을 가져갔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향이 입안에 천천히 번져 갔다.

“이게 술맛이지. 안 그래, 형님?”

은하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저 붉은 깃발을 올려다본다. 깃발은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기쁜 것처럼 크게 바람에 펄럭였다.
 

16729892424139.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