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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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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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2023.01.05.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길을 걷는 사람들. 근처 상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최신 가요들. 그 사이에서 은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신호등 건너 높게 솟은 빌딩 꼭대기에는 커다란 LED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지난 13일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이 또다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목격자는 평택시 K 은행에 근무하는 30대 청년으로…….」
모니터 속 앵커의 목소리가 사거리 전체에 울려 퍼진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이끌리듯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 근처에 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두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또야? 벌써 몇 번째야.”
“저 정도면 괴담이 아니라 실화 아닌가? 어그로 수준을 넘은 것 같은데.”
“저 흑프가 진짜 흑프일려나?”
“그럴 리가 있겠어? 그 흑프는 벌써 3년 전에 죽었잖아.”
“그럼 그 원혼이라든가……? 원한을 가지고 죽은 탓에 눈을 감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때였다. 학생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 노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눔 시끼! 영웅님께 그런 말버릇하고는! 하여간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노인은 끌끌 혀를 차며 검지로 우중충한 하늘을 가리켰다.
“세상을 구하고 돌아가신 흑염의 프린세스 님께서 너희 말을 들으면 천국에서 통곡하시것다!”
“…….”
은하는 목을 감싸고 있던 머플러를 슬그머니 콧잔등까지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에단이 “추워?” 하고 물어 왔다. 은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을 뿐 목소리 내어 답하진 않았다.
‘분명 곤란해지실 겁니다.’
……이제야 데이빗이 제게 옷가지를 건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데이빗의 도움으로 은하는 에단과 함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은하가 깨달은 것은, 다름 아닌 데이빗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점.
그렇다. 은하가 모르는 사이 ‘흑염의 프린세스’는 상상 이상으로 유명해져 있었던 것이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은하는 휙 고개를 돌려 근처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확인했다.
푹 눌러쓴 모자. 코까지 가린 머플러. 체형 전체를 가리는 길고 두꺼운 외투까지. 그 모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 듯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초록 불.”
에단이 말했다.
“저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면 건너도 된다고 했지?”
그새 새롭게 배운 ‘현대 상식’이 통한 것이 꽤 기쁜 모양이었다. 은하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힐끔힐끔 주변을 확인하며,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엄마, 엄마! 초록 불! 초록 불이야!”
“희율아, 뛰면 안 돼. 엄마 손 잡고 천천히 걷는 거야. 알았지?”
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모녀가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보였다. 꼬마는 왼손으로는 엄마 손을 꼬옥 잡고, 오른손은 번쩍 들어 귀 옆에 갖다 붙였다.
“선생님이 횡단보도 건널 때는 이렇게 손 들고 건너라고 했어!”
“어머, 우리 희율이가 참 잘 아는구나.”
“에헤헤.”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하가 에단에게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에단 역시 그 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건너자.”
그러자 에단의 붉은 눈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져 은하의 손에 닿았다. 방금 전 모녀의 모습을 보았던 까닭일까. 은하가 손을 내민 이유를 대충 눈치챈 모양이다.
에단은 어린아이가 아니지만 이곳은 차가 많은 도로이기도 하고, 현대 상식이 부족한 그가 혹시나 사고라도 치면 곤란했다.
덥석.
에단은 별말 없이 은하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이곳의 상식이라고 판단한 듯 했다.
그런데 에단은 거기에 더하여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스르륵, 오른손을 들었다.
“손은─.”
들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려던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진지한 얼굴로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의 모습에 은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까지 아직 멀었어?”
길을 걷던 에단이 물어 왔다. 은하는 그제야 자신이 에단에게 목적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지금 난 집으로 가는 게 아니야. 그 전에 되돌려 줄 물건이 있어서.”
“되돌려 줄 물건?”
“이거.”
은하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슥 내밀어 보였다. 꼬깃꼬깃하게 접혀 주름이 진 그것은 낡은 천 조각이었다. 표면에 갈색으로 변한 핏자국이 남아 있는.
“뭐야, 쓰레기잖아.”
그 천 조각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에단이 툭 내뱉듯 심한 말을 했다. 은하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천 조각의 정체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0분 후.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쪽일 텐데…….’
주변을 살피던 은하는 곧 찾고 있던 건물을 발견했다.
“여기?”
“응.”
걸음을 멈춘 은하는 턱을 들어 빌딩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확인했다. 빨간 바탕에 커다랗게 새겨진 주먹 문양.
대한민국 4대 길드 중 하나, 불멸(不滅).
이곳은 불멸의 서울 본부였다.
은하는 이전에도 몇 번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와서 보니 이 빌딩은 기억 속 모습보다는 조금은 낡아 있었다.
빌딩 벽은 거뭇거뭇한 빗물 자국이나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담쟁이덩굴로 엉망인 가운데, 오직 건물 꼭대기에 펄럭이는 빨간 깃발만이 깨끗한 새것이었다.
입구에는 ‘출입 금지(No Entry)’가 인쇄된 노란 테이프를 쳐 놓았고 주변에는 담배꽁초나 찌그러진 캔, 껌 종이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아하니 깃발은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주 버려진 건물은 아닐 테다. 애초에 불멸이 하루 이틀 만에 무너질 만한 규모도 아니고.
‘분명 다른 입구가 있을 거야.’
우선 주변을 좀 둘러볼까. 그리 결심한 은하가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또각.
성큼성큼.
은하의 구두 소리를 따라 에단의 발소리가 겹쳐진다.
“아.”
은하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그의 존재를 상기하고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빨간 눈은 마치 ‘왜?’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은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곳에 위치한 벤치를 찾았다. 그곳을 척, 검지로 가리킨 은하가 말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려.”
그러자 에단의 붉은 눈이 은하의 검지를 또르륵 따라 움직였다. 벤치를 발견한 그가 잠시 침묵했다.
“……왜?”
다시 은하에게로 고개를 돌린 에단이 은하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보았다.
“데리고 다녀 준다며.”
약속, 아니었어? 그가 묻는다.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은하는 차분히 답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어.”
“…….”
“금방 돌아올게.”
“…….”
에단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은하를 응시했다. 마치 그 새빨간 두 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윽고 에단이 터벅터벅 벤치를 향해 걸어가 거기 앉으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슈우우욱!
돌연 벤치가 사라졌다.
은하의 눈이 커졌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방금 에단이 저 벤치를 향해 손을 뻗었고, 벤치가 마치 바스러지듯 먼지가 되어 분해되었다.
“싫어.”
에단이 힐끗 은하를 향해 돌아보았다.
“지루하잖아. 혼자 여기서 뭐 하라고.”
그리고 은하에게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도 같이 가.”
“…….”
은하는 방금 전까지 벤치가 있었던 그곳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옮겨 그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두 눈은 또다시 ‘왜?’라고 묻는 듯했다.
“너─.”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거기! 어이, 거기 너희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돌연 어디선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근처에 누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은하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쪽 벤치를 어떻게 한 거야? 여기 사유지인 거 몰라?”
반삭에 가까울 만큼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이제 막 불을 붙인 듯한 담배를 입에 물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물 파손죄라고 혹시 들어는 봤고?”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공격적인 태도에 에단의 표정이 무섭게 굳는다.
한편 은하는 그가 입고 있는 도복에 주목했다.
‘저 도복.’
유환을 포함한 불멸 길드원들이 입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불멸의 길드원일 터.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스르륵.
은하는 코까지 가리고 있던 머플러를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헉!”
은하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툭,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진다.
“흐, 흐, 흑염…….”
그러더니 고장 난 기계처럼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혹시 이곳의 길드장과─.”
“으, 으아아악! 오지 마! 오지 마아!”
도망치듯 뒷걸음질 치던 그가 그대로 뒤로 철퍼덕 넘어져 버렸다.
‘꽤 세게 머리를 박은 것 같은데…….’
은하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뒤통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은 아닐까.
“그, 그 이상 오지 말라고 했어!”
“아니, 저는.”
“우왁, X발! 오, 오지 말라고오!”
그러나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을 보니, 다행히도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어쩐담.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3년 전 언노운 게이트 사건으로 자신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건 은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과한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때 은하의 뇌리를 벼락처럼 특정 기억이 스쳐 갔다.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이 또다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목격자는 평택시 K 은행에 근무하는 30대 청년으로…….」
은하는 그제야 남자의 반응에 대해 이해했다. 남자는 자신이 ‘죽었다 돌아온 사람’이 아닌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둘 다이거나.
데이빗이 건넨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은하의 얼굴과 손에 든 검은 양산을 보고 그리 판단한 듯했다.
“오해입니다, 전…….”
은하는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관두고 제자리에서 차분히 변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다.
“내, 내가 쫄 것 같아?! 이래 봬도 나, 나는! 어?! 부, 부부, 불멸의 ‘쌍칼’이다 이거야! 어?! 알아들어?!”
“──시끄럽군.”
스으윽.
줄곧 가만히 있던 에단이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벤치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같은 속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에단!”
은하가 답지 않게 큰소리를 냈다. 탁! 그의 손을 내리친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에단의 붉은 눈이 은하를 향한다.
“너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은하가 물었고,
“없애려고 했어.”
에단이 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그런 담백한 대답이었다.
“인간이야.”
“알아.”
또다시 에단이 답했다.
“귀가 아플 만큼 시끄러운 ‘인간’이지.”
그는 다시 한번 스윽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은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너.”
은하의 어깨 위로 팟! 하고 불꽃이 생겨났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헉! 혀, 형님!”
그때, 모퉁이 너머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이어지는 묵직한 발소리.
“혀어엉니임!”
겁에 질려 있던 남자가 그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대립하고 있던 은하와 에단 역시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당신은…….”
새롭게 등장한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제자리서 우뚝 굳었다.
철인 도성윤.
불멸의 3인자이자 이전 자갈치 시장에서 은하에게 목숨을 빚졌던 바로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