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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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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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두 번째 귀환 (2)
2023.01.03.
미국 몬태나주의 탑이 봉쇄되었다는 소식은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 각성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곳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포츈텔러, 안드레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해.’
안드레아는 턱을 괸 채 눈매를 가느다랗게 접었다. 찻잔을 휘젓는 스푼이 빙글빙글 돌다가 우뚝 멈추었다.
‘어째서 현안은 내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던 거지?’
안드레아의 현안은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으나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보고 싶은 미래, 예를 들자면 복권 당첨 번호 따위를 알려 줄 만큼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불시에 개방되는 현안은 수수께끼 같은 단편적인 장면을 보여 주고는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듯 그의 능력은 굉장히 변덕스러웠으며 짓궂었다. 다만 인류에 위협이 될 만한 커다란 재앙에 있어서는 언제나 힌트를 주곤 했다.
‘이를테면, 탑이라든가.’
세상에 11개의 탑이 등장하기 몇 달 전, 안드레아는 그 징조를 현안을 통해 ‘보았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10년 전에 우연히 현안을 통해 보았던 ‘재앙’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약 1년 전 글로벌 랭킹 12위 《심안》이 제9궁, 인마궁(人馬宮)을 봉쇄했을 때도, 현안은 그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갑작스러워.’
현안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제7궁, 천칭궁이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알 수 없는 《???》에 의해서.
“【도대체 누굴까…….】”
안드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그를 응시하던 금발의 여성, 캐서린 허드슨이 조용히 답했다.
“【미국 매스컴에서는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지배적입니다.】”
우연한 계기로 각성은 했으나 공식적인 랭크 측정은커녕 헌터 등록조차 하지 않는 자들. 세간에서는 그런 자들을 미등록자 혹은 무면허 헌터라고 불렀다.
그런 자들은 꽤 많았다.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혹자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겁이 나서, 혹자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본업이 있어서, 혹자는 단순히 귀찮아서 등등.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이기 때문에 시스템창에 물음표로 표기된 것이 아니냐는 거죠.】”
“【너도 그렇게 생각해, 캐서린?】”
안드레아가 묻자,
“【아뇨.】”
캐서린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찻잔 겉을 쓸던 손가락을 멈추고 덧붙여 말했다.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는 탑에 단독으로 진입할 수 없지 않습니까. S급 랭커나 글로벌 랭커가 이끄는 공략대에 ‘참여한’ 상태여야 겨우 입장이 가능하겠죠. 만일 그런 식으로 입장했다고 하더라도, 미등록자는 당연히 수많은 실전을 겪은 정식 헌터들에 비해 전투적인 면에서도 경험적인 면에서도 부족할 수밖에요. 그런 자가 어떻게 그것을 봉쇄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시 그렇지?】”
“【네, 차라리 단순한 시스템 오류라 치부하는 쪽이 더욱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캐서린은 찻잔을 입에 가져가 호로록 마시며 답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탑에 대한 이야기나, 미국 길드 체이서의 근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약 10분간 대화를 이어 간 그 끝에서야 캐서린은 가장 궁금하던 점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저어…… 그분께서는.】”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다.
캐서린은 지금 이준의 안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안드레아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은 않고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미소의 의미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전히 달라진 점이 없는 거구나. 캐서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분께 그토록 특별한 분이었던 걸까요.】”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흑염의 프린세스, 이유라…… 아니, 차은하라는 헌터가 말입니다.】”
캐서린은 직접 은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준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사전에 차단하는 탓에 제대로 물어본 적도, 이준 몰래 그녀를 찾아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궁금했다. 도대체 이준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일지. 어떤 존재이기에 그토록 단단하고 이성적이던 그가 저토록 무너져 내린 것인지.
“【너도 알다시피 요한은, 마에스트로는 강한 헌터야.】”
안드레아가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물 흐르듯 잔잔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세계에 열 명밖에 없는 프라임 헌터이자 미국 랭킹 3위인걸. 만일 그의 고유 능력이 전투계열이었다면 아마 그 이상이었겠지. 실제로 요한은 S급이 된 이후 게이트 토벌에 실패한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어. 한국 최고 헌터라고 칭송받던 백야와도 한 번 겨룬 적이 있는데, 밤새 싸우고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났대. 대단하지?
그런데 있잖아. 딱 한 번, 요한이 패배한 적이 있어. 흑염의 프린세스. 한국 괴담 속에 나오는, 그 몬스터에게 말이야.】”
“【…….】”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지. 그렇게 강한 상대였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요한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듯, 안드레아가 먼 곳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라고 했어.】”
“【어째서…….】”
“【싸우지 않았던 거야. 아니, 그러지 못했던 거지. 왜냐하면─.】”
안드레아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안드레아는 어딘가 속상한 듯, 안쓰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몬스터는 그녀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
“【요한에게 그녀는 그런 존재인 거야. 그림자만 보아도 송두리째 휘둘릴 만큼 거대한 존재. 흔적만 보아도 동요할 수밖에 없는, 뿌리 깊이 박혀 버린 그런 존재 말이야.】”
“【…….】”
“【그런 그녀를, 요한은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해쳤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 거지.
안드레아는 그 말을 덧붙이며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찻잔에 담긴 찻물 속, 요한의 얼굴이 두둥실 떠오른다. 안드레아는 조용히 찻잔을 쥐었다.
“【……데이빗 쪽은 어때?】”
이준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안드레아가 화제를 돌렸다.
미국은 탑 공략에 자국 랭킹 3위였던 헌터 마에스트로의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현재 이준은 도저히 한국을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상황을 전달할 겸 대리인으로 데이빗이 GIA 멤버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7궁이 봉쇄되며 미국 탑이 초기화 단계에 들어선 지금, 그가 더 이상 몬태나주에 머무를 이유는 없어졌을 터. 데이빗이 돌아오면 그에게 미국 탑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이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캐서린이 조용히 답했다. 티스푼으로 차를 젓고 있던 안드레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숙소 체크아웃이라든지 계약 해지 건으로 바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곧 돌아오겠지요. 데이빗도 이제 한국인이 다 되었으니까요.】”
“【그래?】”
“【그만큼 한국에 오래 살았잖습니까. 이번에 미국에 갈 때도 고추장에 라면을 박스째로 싸 들고 가더군요. 지금쯤 불고기가 그리워졌을 겁니다.】”
달칵.
캐서린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을 내려 두었다.
* * *
은하는 놀란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어째서 마을 광장 한복판에 몬스터가……?’
그런 의문을 갖기도 전에, 주변은 쑥대밭이 되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바닥에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저 괴조의 등장으로, 다운타운에 모여들었던 인파가 밀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은하를 연행하려던 경찰도 잠시 그것을 관두고 민간인들을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타앙─! 타앙─!
귀를 때리는 권총 소리. 근처에 있던 경찰이 몬스터에게 총을 겨눈 것이었다.
“바보. 저런 장난감 같은 걸로 죽을 리가 없잖아.”
비명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단이었다. 그는 혼란을 틈타 바닥에 떨어진 빵을 그새 냠냠 입에 넣고 있었다.
은하는 멍한 눈으로 그런 그를 응시했다.
마치 혼자만 다른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혼란 가운데 그만이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안 그래?”
붉은 입술 주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혀로 가볍게 훑은 그가 은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야.”
은하가 짧게 답했다.
몬스터에게 인간의 화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게이트가 등장한 이래 현대의 기본 상식. 각성자든 비각성자이든 당연히 알고 있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몬스터에게 총을 겨누었다. 어째서? 답은 정해져 있다.
‘잠시라도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해.’
탕! 탕, 타앙─!
이어지는 총소리. 몬스터는 기괴한 울음을 내더니, 노점상을 향해 벌렸던 부리를 닫고 삐거덕삐거덕 경찰에게로 목을 돌린다.
히익, 총을 쥔 경찰이 숨을 삼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은하는 양산을 쥐었다.
“어…….”
에단의 붉은 눈이 일순 은하를 향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하는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휘리릭!
뻐어어억!
그리고 양산을 커다랗게 휘둘러 단숨에 몬스터의 목을 꺾어 버렸다.
단 일격.
그것만으로 놈의 목은 마치 샤프심처럼 뚝 부러졌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경찰의 손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던 권총이 뚝 움직임을 멎었다. 그리고.
“【…….】”
툭.
권총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Oh, my god. Thank you. Thank you so much……!”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노점상이 은하의 발목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은하는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당혹스럽게 응시하더니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얼 웰컴.”
그 뒤로 노점상은 생명의 은인인 은하에게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매대 위에 있던 빵을 모조리 쓸어 담아 은하에게 건네기까지 했다.
‘빵 도둑이 될 뻔한 것은 어떻게든 해결됐는데.’
은하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 ──.】”
경찰들과의 거리는 어쩐지 이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들은 은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뭐라 말하고 있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화를 낸다거나 심문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어디선가 뚝 떨어진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일격에 몬스터를 쓰러트렸으니 충분히 궁금하거나 놀랄 수 있었다.
혹시 신원을 묻고 있는 걸까?
은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에단을 힐끔 쳐다보았다. 통역을 해 주면 좋겠지만, 그는 노점상이 건넨 빵을 열심히 씹느라 이곳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음…….”
짧은 영어로 어떻게든 경찰과 의사소통을 시도해 보려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잠깐…….”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던 때였다.
“【잠시만요.】”
누군가 경찰과 은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누구지?’
붉은 기가 섞인 곱슬머리. 에메랄드빛 눈동자. 흰 뺨 위에 소복이 쌓인 주근깨. 마찬가지로 외국인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은하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경례를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 ────.】”
“【───.】”
곱슬머리 남자는 경찰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이윽고 은하를 향해 빙글 등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데이빗 무어라고 합니다.”
굉장히 유창한 한국어에 은하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화를 조금 나누고 싶은데…… 우선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도 괜찮을까요?”
“아.”
은하의 눈이 힐끔 주변을 향했다.
한차례 정리하긴 했지만, 언제 다시 이곳에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경찰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문적인 헌터가 없는 이상, 이들만으로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 내긴 무리가 있을 터.
“이곳이라면 괜찮습니다. 헌터들이 오고 있으니까요.”
은하의 눈빛을 읽은 데이빗이 그리 말했다.
“……왜 이런 도심 한복판에 몬스터가 나타난 거죠?”
“탑이 클리어 되면서 주변에 그 여파가 번진 거죠. 아마 탑 내부에 남아 있던 몬스터의 일부가 유출된 듯합니다.”
“탑이요?”
“네, 저것 말입니다.”
데이빗이 손을 휙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광장에 위치한 웅장한 대성당. 그 뒤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탑. 그것을 응시하고 있던 은하가 물었다.
“……미국은 그 일을 미리 대비하지는 않았나요?”
“탑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봉쇄되는 사건은 미국 정부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애초에 엘리멘탈 마스터의 공략대, 그러니까 미국을 대표하는 공략대의 탑 진입은 며칠 후로 예정되어 있었고요.”
데이빗은 은하의 질문에 친절히 답해 주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은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듯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쨌든 엘리멘탈 마스터의 공략대가 급히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는군요.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은 주변의 헌터들이 이곳을 통제할 거고요. 헌터님 덕분에 작은 사고도 막을 수 있었으니 아무런 인명 피해도 없을 겁니다.”
문득, 주변을 살피던 은하가 우뚝 굳었다.
“……제가 헌터라는 걸 알고 있나요?”
“물론이죠.”
데이빗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듯이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3년 전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순직한 흑염의 프린세스가 버젓이 살아 미국 몬태나주에 나타났다? 그것은 두 눈으로 보고도 금방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한국에서는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련한 괴담이 극성이었다. 이곳 미국에서까지 ‘그것’이 나타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노점상을 보고 망설임 없이 양산을 휘두른 그녀를 보았을 때 데이빗은 깨달았다.
저 여자야말로, 그분께서 말씀하시던 ‘그 애’가 틀림없다고.
데이빗은 은하 앞에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차분한 미소를 머금었다.
“진짜 ‘흑염의 프린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