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4)화 (154/306)


#154. 별의 추락
2023.01.01.


은하의 손이 그의 사슬에 닿는 순간 그것은 눈부신 빛과 함께 너무도 쉽게 바스러졌다. 마치 모래알처럼 말이다.

“아……!”

에단이 처음으로 고기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영문을 파악할 새가 없었다. 쩌저적, 미궁의 내벽 역시 사슬이 그랬던 듯 급격하게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공간 자체가 소멸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어디지?’

은하와 에단은 낯선 숲 어딘가에 뚝 떨어졌다.

은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궁을 빠져나온 건가? 그런데 왜 이런 숲에 덩그러니 떨어진 거지? 그렇게 침착하게 상황 파악을 하려는데,

“……와. 없어졌네.”

에단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돌아보니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손바닥이 보였다. 그곳에 있던 상처는 이곳으로 이동하자마자, 즉 미궁을 벗어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했다.

은하는 그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커다란 못이 그의 손바닥을 관통했던 것을 기억한다. 분명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작은 상처가 아니었다.

의문을 가지는 은하와는 반대로 에단은 시원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바닥을 쥐었다가 펼쳤다.

“바깥으로 나왔으니 더 이상 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은하는 그리 물으려다 말았다.

그의 해방, 탈출 그리고 회복. 모든 것이 말도 안 될 만큼 갑작스럽고 의심스러웠지만 우선은 주변 점검과 앞으로의 일이 급선무였다.

일단 배를 채울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은하의 경우엔 더더욱.

앞으로 또 어떤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급한 대로 신체 회복이 필요했다.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누굴 만나도 고전할 것이 분명했다.

‘미노타우루스와의 전투 때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그런 경위로 두 사람은 잠시 이 숲에 머무르기로 했다.

살랑─

문득 불어온 산들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듯 나부꼈다. 은하는 귀 뒤로 그것을 쓸어 넘기고 나무에 열려 있던 마지막 열매를 땄다.

“이거 정말 먹어도 되는 거 맞지?”

확인 사살이 필요했던 은하는 저편으로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 곤히 잠든 에단이 보였다.

‘……또 잠들었어?’

은하는 다소 질린 얼굴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미궁 안에서도 그랬지만, 이쯤 되니 거의 버릇인 것 같았다. 툭하면 잠드는 점 말이다.

‘깨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관뒀다. 어차피 깨워 봤자 또 잠들 것이 뻔했다.

발소리를 살짝 죽인 은하는 그의 근처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방금 따낸 나무 열매를 아삭아삭 씹었다.

그렇게 은하가 열매를 세 개나 해치울 동안에도 에단은 깨어나지 않았다.

짹짹짹…….

기분 좋은 새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이 숲은 대낮에도 하늘에 하얀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여전히 ‘네뷸러’ 안이라는 소리였다.

비교적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은하는 스르륵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아스트가 있는 신전으로 가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와 다시 조우한다면, 과연 내가 승리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승패를 단언할 수 없었다.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린 것은.

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지금의 은하는 아스트가 정체불명의 금빛 사슬을 부린다는 점, 그리고 적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또한 이곳의 주인처럼 보였던 아스트라면, 은하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은하는 그를 만나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친 것을 앙갚음하기 위해서도,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도 말이다.

생각에 잠겼던 은하는 다시 눈을 떴다. 더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에단을 깨우기 위해 오른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몇 센티미터의 간격을 두고 저를 빠안히 응시하고 있던 에단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도대체 언제 깨어난 거지?

“안녕, 은하.”

에단이 코앞에서 빙긋 웃었다. 살랑,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음, 글쎄. 언제부터더라.”

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그리 덧붙인 에단은 나른한 기지개를 켜며 은하에게서 멀어졌다. 그에 따라 코끝까지 다가왔던 달짝지근한 향기 또한 멀어졌다.

은하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그가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니다. 은하는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감각이 예민한 쪽에 속했다. 상대의 기척을 이렇게까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은하는 곁에서 크게 하품을 하는 에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걸까. 하품으로 찔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에단이 힐끗 이쪽을 바라본다.

“왜?”

“……아냐, 아무것도.”

은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자.”

에단은 또 한 번 느슨하게 하품을 하면서도 앞장서서 길을 알려 주었다.

그를 따라 숲을 지나 언덕을 넘으니 저 멀리 순백색의 신전이 보였다. 신전이 완전히 가까워지기 전,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다 왔네. 저기가 그 녀석의 신전─.”

에단이 힐끔 은하 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은하가 턱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두 개의 하얀 달. 끝도 없이 펼쳐진 형광빛 잔디. 그 위로 발그름히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 그것들과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백색의 신전.

여전히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생각했다.

“……아름다운 곳이네.”

아름답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눈이 부신 곳. 살아생전 외국조차 나가 본 적이 없었던 은하에게는 이러한 이색적인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스트는 곧 지구와의 통로가 열릴 거라고 했어. 그 말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눈앞의 평원을 바라보며, 은하가 중얼거렸다.

“글쎄.”

에단이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녀석의 의중이야 모르는 일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긴 그다지 아름다운 곳이 아니란 거야.”

은하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어째서일까. 그의 눈빛에서는 희미한 혐오를 엿볼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짓는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물며…….

“여긴 네 집이 아니야?”

“재밌는 소리를 하네.”

짧게 웃음을 흘린 에단이 은하를 향해 슥 눈을 돌렸다.

“여기에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밖에 없어. 너는 그게 아름다워?”

“……너는?”

“당연히 역겹지. 그런 세상은 재미없잖아.”

“그게 아니고.”

은하의 새까만 눈이 그를 향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너는 어느 쪽인데?”

휘이잉…….

달큼한 향을 머금은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바람이 몰고 온 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탓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차단되어 에단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당연히 지배하는 쪽이지.”

이윽고 휘날리던 꽃잎이 모조리 스쳐 지나간 후에야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에단은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곳의 왕이야?”

아스트가 아니라? 은하가 물었다.

“왕?”

에단의 웃음이 진해졌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들 주변을 맴돌던 바람이 일순 멎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럼 넌─.”

──도대체 뭔데?

은하가 그리 물으려고 하던 찰나였다.

에단이 힐끗 언덕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은하는 그곳에서 백색의 옷을 걸친 금발의 남성을 발견했다.

‘아스트!’

백색 신전의 주인. 은하를 속이고 사슬로 묶은 다음 미궁에 집어넣었던, 바로 그 남자였다. ‘탈옥수’의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그는 은하가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태양을 머금은 듯한 찬란한 금발도,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의상도, 인간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도, 손등에 새겨진 별 모양의 문신도 말이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부드럽고 선한 미소를 늘 머금고 있던 그가,

“당신…….”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덜덜 떨면서.

은하는 곧바로 눈치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은하가 아니라 정확히 에단을 향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스트.”

또각.

은하가 아스트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잠시 기다려.”

에단이 팔을 뻗어 그녀를 살포시 막아 냈다.

“너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

아스트에서 시선을 거둔 은하가 이번에는 에단을 쳐다보았다. 이자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돌려보내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나도 데려가.”

“어딜?”

“어디든. 네가 궁금해졌거든. 좀 더 구경하고 싶어.”

……구경?

은하의 표정이 묘해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확실히 해 둘 것이 있었다.

“넌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는 건가?”

그에 에단은 이렇게 답했다.

“어.”

그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은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은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지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저 아래에 선 아스트를 붙잡고 협박한다고 해도 그가 자신이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순순히 알려 줄지도 미지수.

“…….”

“…….”

은하는 에단과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생각을 이어 갔다.

“……좋아.”

은하가 답했다.

“네가 정말 날 내보내 준다면, 널 데려갈게.”

은하의 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그의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씩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

그가 휘리릭,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커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은하는 그가 순식간에 언덕 저 아래, 아스트의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 이, 어떻게…….”

아스트는 흠칫 뒷걸음질 치며 에단에게서 멀어졌다. 눈앞에 에단이 서 있는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반면 에단은 싱글싱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잠시 얘기 좀 할까?”

한마디. 그리고.

슈욱……!

두 사람이 은하의 시야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방금 전 에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디로 간 거지?’

은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척을 감지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세워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쫓을까.’

그리 생각한 은하가 뒤꿈치에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띠링.

익숙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푸른 시스템창.

[별의 추락. 《???》에 의해 네뷸러 제7궁, 천칭궁(天秤宮)이 봉쇄됩니다.]

그것을 마주한 은하가 돌처럼 굳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팝업된 시스템창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제7궁? 네뷸러가 봉쇄된다고?

멍하니 시스템창을 응시하고 있던 중, 그 너머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자.”

“…….”

솜사탕처럼 포근한 분홍색 머리카락. 에단이었다. 섬뜩할 정도로 붉은 핏빛 눈동자를 휘며 그가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려가겠다는 약속, 지킬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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