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3)화 (153/306)


#153. 해방
2022.12.31.


에단의 물음에 은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냐고. 그건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은 조류형 몬스터의 고기뿐이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그것을 먹자마자 미약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섭취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틀 뒤 ‘집행자’가 온다는 정보를 들은 이상 식량 섭취를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하는 아주 소량의 고기만을 먹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체력만 유지할 수 있을 딱 그만큼만.

그리고…… 은하가 그 정도의 고기만 먹었던 이유는 알레르기 말고도 또 한 가지 있었다.

“너, 어째서…….”

에단이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폐부가 아릿해졌다. 핑글핑글 도는 시야를 바로잡고, 은하는 놓칠 뻔했던 양산을 다시 쥐었다.

손등 위로 붉은 반점이 오돌토돌 올라온 것이 보였다. 알레르기 반응의 흔적이었다.

눈앞에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미노타우루스가 보였다. 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은하가 분한 듯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야.’

은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평소의 컨디션 그대로였다면, 놈을 상대로 지금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만일 고양이가 곁에 있었더라면 회복을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없는 지금, 은하의 회복은 온전히 식사와 수-면 그리고 자가 치유력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끌─

양산을 쥐고 있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그것을 다시 잡아 냈지만, 그것이 고작이었다.

‘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더 버텨 줘.

은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검은 양산을 지팡이 삼아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이전보다 살짝 높아진 언성으로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냥 도망─.”

“입 닫으라고 했어.”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양산을 쥔 손에 푸른 혈관이 우득 돋아났다.

“혼자는 안 간다고 말했잖아.”

그리 말한 은하가 탓!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미노타우로스가 턱을 치켜들어 그녀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있는 힘껏 창을 던진다.

슈우우우욱─!

놈이 던진 기다란 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공중을 갈랐다.

그러나 은하의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공중에서 고점을 찍은 은하는 발밑을 스치는 창을 디딤대로 사용하여 조금 더 높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놈을 향해 쫙 손바닥을 펼쳤다.

슈와악……!

검은 불꽃이 분산되며 놈을 향해 날아든다. 놈은 불꽃의 일부는 콧김으로, 또 일부는 왼손의 도끼로 물리쳤지만 전부는 무리였다.

미처 물리치지 못한 나머지 흑염의 화살이 놈에게 쏟아진다.

콰과과광─!!!

유효타. 확실했다.

그러나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다.

크르르르…….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놈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들고 놈이 거센 콧김을 뿜었다.

‘온다.’

다음 공격. 은하는 회피 태세를 갖추었다.

파괴력과는 별개로 놈의 공격 패턴은 단순하다. 정신만 단단히 챙긴다면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오나? 아니면 왼쪽? 그게 아니라면…….

‘정면.’

미간을 뚫어 버릴 기세로 날아드는 창 꼭대기. 도약을 위해 은하가 발뒤꿈치에 꾹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멈칫.

은하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찰나의 망설임이었다.

이 방향.

이 속도.

모든 상황이 슬로 모션처럼 느릿하게 변한,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은하는 뒤를 확인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사슬에 묶여 있는, 상처투성이의 남자가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은하는 판단했다.

‘피하면 안 돼.’

콰직─!

“읏…….”

미노타우로스의 창에 의해 은하의 왼쪽 어깨가 뚫려 버린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웬만한 공격에는 결코 뚫릴 일이 없었던 흑단 드레스가, 일반 실크처럼 속수무책이었다.

뚜욱…….

붉은 피가 어깨선을 따라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 너…….”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이 은하를 향한다. 에단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너, 왜, 도대, 체…….”

아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왜 이 여자는 나를 감쌌지?

왜 이 여자는 도망가지 않았지?

왜 이 여자는 자신이 굶어 가면서까지 고기를 나눠 주었지?

왜? 그러니까, 왜?

쿨럭,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따듯하고 붉은 액체가 뺨에 튀는 것이 느껴져서, 에단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서부터 새빨갛고 선명한 선이 주르륵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은하는 어깨에 꽂힌 창끝을 세게 거머쥐었다.

“말했잖아.”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세게 뽑아냈다.

촤아악! 창이 뽑히며 사방으로 붉은 피가 흐드러지듯 튄다. 그 앞에서, 은하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하게 웃는다.

“나, 헌터라고.”

“…….”

그 미소 앞에서, 에단은 비로소 입을 닫았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헌터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 여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쓸모없는 행위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그래, 재미가 없어졌다.

저 여자가 어항 유리에 쿵쿵 머리를 박는 모습이, 이제는 더 이상 재미가 없다.

투둑.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은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릿한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안개가 끼기라도 한 듯, 이제는 시야가 너무도 흐렸다.

그리고 지금 이 기분……. 마치 졸음과도 비슷했다. 체력의 한계였던 걸까. 갑자기 이렇듯 졸음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것이리라.

하지만 시야가 흐려지면 흐려질수록 청각은 반대로 점차 선명해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은하는 분명 들었다.

쿠오오오오─!

등 바로 뒤에서 포효하는 미노타우로스의 울음소리와,

“죽어.”

높낮이 없이, 간결하고 서늘한 그 음성을.

* * *

“은하야.”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피부를 스치는 메마른 바람. 은은하게 코끝에 닿는 흙냄새.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붉은 노을.

그리고 그 아래, 엄격한 얼굴을 한─.

“소장님.”

소장님. 소장님이 보였다.

은하가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분명 가까이에 있는데도, 결코 닿을 수가 없었다.

“헌터 강령에 몬스터를 섬멸하라는 내용이 왜 없는지, 혹시 알겠나?”

소장님이 물어 왔다. 그날처럼 말이다.

은하는 그에게 뻗었던 손을 스르륵 거두었다. 그리고 답했다.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고 있다.

“제가 살리지 못한 사람보다, 제가 앞으로 살릴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소장님은 단단히 굳어 있던 입매를 풀어 인자하게 웃어 주셨다.

마지막 순간, 머리 위에 따듯하고 두툼한 촉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 * *

──눈을 떴다.

“……켈록.”

입안뿐만 아니라 목구멍까지 뻑뻑함이 느껴질 정도로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마른기침을 뱉은 은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삐걱삐걱 돌렸다. 그리고 조금 뒤,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미노타우로스……!’

찌릿.

왼쪽 어깨에 희미한 통증이 스친다. 은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상처가.’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감쪽같이 말이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긴 했으나 육안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멀쩡했다.

꿈이라도 꾼 걸까? 아니다. 그렇다기에는 어깨 쪽 찢어진 드레스는 여전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은하는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것은 분명 헌터의 자가 치유력으로도 완전히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설마 고양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지만 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고양이는 사라졌잖아.

혹시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획득한 그 황금빛 과실을 소모한 걸까? 그리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인벤토리를 확인한 결과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렇듯 말끔히 상처가 아물 수 있었지? 의문을 담은 시선을 드는 순간, 은하는 저 앞에 고꾸라져 있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바닥에 흐드러진 분홍색 머리카락. 에단이었다.

‘설마.’

──죽었어?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러자,

“……안녕.”

에단 특유의 졸린 듯한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일찍 깼네.”

“혹시 나, 잠들었던 건가?”

“그런 것 같더라.”

“…….”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체력이 바닥나 있었던 데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한들, 전투 도중 잠에 들고 말다니 이만큼의 실추가 달리 또 있을까.

“……미노타우로스는?”

“갔어.”

“어디로?”

“모르지.”

“내 상처는 어떻게 나은 거고?”

“아, 그거? 내가 했어.”

“어떻게?”

“알고 싶어?”

에단은 허공에 도르륵 눈을 굴리다가 은하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은하가 그에게 귀를 살며시 가져가자, 그는 은하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핥아 줬지.”

에단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 그대로 눈매만 휘어 빙긋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나. 은하가 살짝 인상을 썼다. 아니, 진짜 핥은 거야……?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너, 손…….”

“아. 이거.”

에단은 은하를 향해 손바닥을 스윽 들어 보였다.

“뺐어. 못. 그냥 힘주니까 떨어지더라고.”

태연한 목소리였다.

은하는 그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바닥 중앙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 그로부터 쏟아지는 핏물들. 출혈이 심각했다.

은하에게 보인 손을 다시 아래로 툭 떨어트린 에단은 여전히 태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죽어.”

“무슨 소리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그 못은 출혈을 막아 주는 역할이었거든. 그게 없으면 출혈을 멈출 방법이 없어.”

“내 상처는 네가 치료해 준 거라며. 네 건 못 하는 거야?”

“응. 못 해.”

“왜?”

은하가 이유를 묻자 그가 또 빙긋 웃었다. 설마 또 농담을 던지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가 이상한 말을 했다.

“그게 벌이거든.”

……벌?

은하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에단은 바닥에 대자로 뻗은 상태 그대로 시선만을 움직여 미궁 천장을 응시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이전보다 조금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잘된 일일지도 몰라. 내가 여기서 죽는 거야말로 ‘그 녀석’을 엿 먹이는 일일 테니까.”

꼴좋지 뭐. 그가 즐겁다는 듯 키득거렸다.

하지만 은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본인이 죽는 것이 잘된 일이라고 하는 그의 사상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맞다.”

한참을 키득대며 웃던 에단이 무언가 생각난 듯 은하를 향해 빙글 시선을 돌렸다.

“어서 나가. 다음 집행자가 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야. 탈출하려면 지금밖에 없어.”

“여기서 탈출하지 못할 거라며.”

“응.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거야.”

자, 어서. 에단은 은하를 향해 구멍 뚫린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러나 은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하기라도 하는 양 새까만 눈동자로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픈 거 잘 참아?”

뜬금없는 은하의 물음에 에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특유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혹시 취향을 묻는 거라면─.”

“지혈해 줄게.”

팟!

에단의 말을 냅다 끊어 버린 은하가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죽을 만큼 아프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야.”

은하는 이전에 언노운 게이트에서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불로 상처 부위를 지져 죽을 위기를 극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물론 정신을 놓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죽음 앞에서 무엇을 못 하겠는가.

“살고 싶지 않아?”

은하가 물었다. 에단은 답이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너한테는 없어?”

또 한 번 물었다. 에단은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다만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을 보았다.

“…….”

“…….”

오랜 정적 속, 은하의 손바닥 위 검은 불꽃이 일렁일렁 춤을 춘다. 그 끝에서 에단이 피식 웃었다.

“있지.”

바깥으로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그에게는 있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에단은 은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소용없어.”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채워진 금빛 사슬을 성가시다는 듯 매만졌다.

“이게 있는 이상, 어차피 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너도 이곳에 왔으니 본 적이 있을 텐데.”

은하는 에단의 목에 채워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지하 미궁에 갇히기 직전, 아스트가 은하를 묶었던 그것이었다. 비록 은하를 묶었던 사슬과는 형태가 조금 다르고, 에단의 것에는 이상한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지만 말이다.

“이건 한 번 채워지면 결코 풀 수 없거든.”

이곳으로 이동된 직후, 은하는 사슬로부터 자연스레 해방되었다. 아스트가 직접 해제한 것인지 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에단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저 사슬에 묶인 채였던 모양이다.

“힘으로도 안 되는 건가?”

“그런 것도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봐? 무리야. 이건 일반적인 사슬이 아니니까.”

에단은 사슬을 매만지던 손을 떼어 낸 후 씩 웃었다.

“어쨌든 이제 알겠어? 난 여기서 나가지 못해. 그러니까 너는…….”

그때였다.

파아아앗─!

돌연 두 사람 사이에 눈부신 빛이 퍼졌다.

정확하게는, 은하의 손이 에단의 금빛 사슬에 닿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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