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52)화 (152/306)


#152. 집행자 미노타우로스
2022.12.30.


쿠구구구─

땅, 벽, 천장 할 것 없이 굵은 빗금이 번지며 쩌적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은하는 눈빛을 바꾸고 주변을 노려보았다.

‘무언가 온다.’

그리 생각한 직후였다.

“……!”

은하는 갈라진 벽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크르르…….

인간의 몸. 거대한 소의 머리. 틀림없었다. 저것은 신화 속에나 나오던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였다.

지금까지 은하가 이곳에서 사냥해 왔던 새 종류의 몬스터와는 형태도, 덩치도 달랐다.

미궁의 특성 때문일까, 이 미노타우로스도 시스템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레벨을 알 수 없다는 소리였다.

“…….”

은하는 소리 없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지금 자신의 손바닥은 흥건히 땀에 젖어 있었다.

천정에 닿을 듯 거대한 덩치. 정신을 어지럽힐 정도로 강한 피비린내. 멧돼지처럼 툭 튀어나온 공격적인 어금니. 바늘처럼 날카롭게 솟은 털 아래로, 웬만한 공격 따위로는 흠집도 나지 않을 정도로 두껍고 단단한 피부.

특히 놈은 왼손에는 도끼, 오른손에는 창을 쥐고 있었는데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저 무기에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무수히 많은 전투를 겪어 온 그녀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저놈은 위험해.’

특히 지금 상태로는 더욱더.

양산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가득 들어간다. 은하는 아주 조심스럽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뭐 해. 빨리 도망치지 않고.”

에단이 다시 한번 그리 말했다.

도망? 지금 내게 도망가라고?

“…….”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선 은하의 표정이 희미하게 변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한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놈은 아직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어.’

은하는 미노타우루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사슬에 묶인 채 은하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에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 모퉁이를 세 번 돌면 거기에 마법진 같은 게 있을 거야.”

“혹시 그게 출구야?”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야. ‘심판일’마다 활성화되는 비밀스러운 장치 같은 건데, 나만 알고 있어.”

네가 처음이다, 이거 알려 주는 거. 상황에 맞지 않게도, 에단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그 마법진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상 녀석에게 공격당해서 죽는 일은 없을걸. 한 시간 정도 둘러보다가 놈은 돌아갈 거야. 그때 다시 나오면 돼.”

쿵.

쿵.

쿵.

등 뒤편으로 놈의 묵직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은하는 짧은 사이 고민했다.

늘 그랬듯 은하는 상대가 누가 됐든 질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의 말대로 불필요한 전투를 손쉽게 피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었다.

단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이 남자.

‘에단.’

눈앞의 그를 바라보는 은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사슬에 짓눌리듯 속박당해 있는 에단은 이곳에서 고작 1m를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만일 놈이 이곳을 덮친다면? 그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저 서슬 퍼런 도끼에 몸이 두 동강 나고도 남으리라.

“……너는?”

은하가 물었다.

“나?”

그에게는 의외의 반응이었던 걸까. 에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걱정하는 거야? 어차피 저놈은 날 공격하지 못해. 절대로.”

아.

그 순간 은하는 깨달았다.

그랬다. 이곳에는 몬스터가 접근하지 못했다. 미궁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은하가 직접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 만일 이곳에서 헛되게 죽어 버린다면 탈출이고 나발이고 없을 것이다. 만일 죽지 않고 이긴다고 해도 이 이상의 체력 소모는 위험했다.

‘그렇지 않아도…….’

은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바닥이 꿀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과실 껍데기를 주워 먹은 덕분에 기본 체력이 엄청나게 상승한 은하였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

그때였다.

크워어어어어어─!!!

놈이 크게 포효했다. 바로 뒤였다.

‘여기까지 오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

은하는 재빨리 도약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하고 땅에 도끼가 내리 찍혔다.

사르륵─

눈앞에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실처럼 흩날렸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얼른.”

등 뒤에서 에단이 다시 한번 은하를 재촉했다.

도망. 그렇지, 에단은 은하에게 도망가라고 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도 알려 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으로 가면, 아주 쉽게 놈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에단은?’

사슬에 칭칭 감긴 채 손바닥에 대못이 박힌 이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곳에 접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미노타우루스는 보란 듯이 가까워졌다.

이제 그들 사이의 벽만 완전히 붕괴시키면 놈은 은하와 에단을 발견할 것이다.

“왜 안 움직여? 혹시 진짜 겁먹기라도 했어? 빨리 가라니까.”

에단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

힐끔.

은하가 뒤로 돌아 에단을 바라보았다.

“설마, 너…….”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듯 에단의 표정이 변했다. 은하는 그 앞에서, 입가에 힘을 주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혼자 어디 안 가.”

에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그리고 물었다.

“왜?”

혹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신뢰가 없는 관계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거짓된 정보를 흘릴 녀석으로 보였다는 건가.

‘그건 좀 슬픈데.’

에단이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양산을 바로 쥔 은하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그랬으니까.”

에단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 이전에 ‘집행자’ 미노타우로스를 마주한 이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바빴었는데…….

‘진심인가.’

자신과 미노타우로스와 사이를 가로막듯 선 그녀가 그녀가 다시금 양산을 세게 쥐는 것이 보였다.

‘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콰아앙─!

미노타우로스가 도끼를 휘둘러 바닥을 내리찍었다. 은하는 바닥을 짚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놈의 공격을 가볍게 회피했다.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미노타우로스가 더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쿵! 쿵! 콰앙!

연속 세 번. 하지만 엄청난 기세로 휘둘러진 도끼는 단 한 번도 은하에게 닿지 않았다.

은하는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지만 방심은 할 수 없었다. 워낙 파괴력이 강하여, 도끼로 인해 부서져 버린 바닥 파편이 팝콘처럼 사방으로 튀었던 것이다.

투투투둣!

“……!”

은하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돌로 된 바닥 파편은 그녀의 팔목, 뺨 할 것 없이 붉은 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다음 공격이 곧장 이어졌다.

쿠워어어어어─!

미노타우로스는 제 목표물인 ‘수감자’를 향해 크게 포효하며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전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

그러나 은하는 아직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도끼에 맞닥뜨리고 말 것이다.

은하의 실력을 보고 벽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려 했던 에단이 번쩍 눈을 떴다.

“왼쪽!”

그러고는 뒤늦게 어라? 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나는, 왜…….

휘익!

한편 에단의 목소리를 들은 은하가 한발 늦게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피했다. 가까스로 회피에 성공했으나 완벽한 회피는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은하의 왼팔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에 스치고 말았다.

“……읏.”

은하는 작게 신음을 흘릴 뿐 상처에서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다음 공격이 올 것이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미노타우로스는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시 도끼였다.

팟! 팟! 팟!

지금까지 회피만 하고 있었던 은하가 드디어 흑염을 소환했다. 양산으로는 저 두꺼운 피부를 뚫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우욱─!

놈은 엄청난 콧김을 뿜어 은하의 흑염을 마치 성냥불처럼 꺼 버렸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놈은 쿵, 쿵, 콰앙! 도끼를 있는 대로 휘두르며 다음 공격을 연속으로 쏟아부어 댔다.

은하는 가까스로 그것들을 회피했다. 그러나 완벽하진 못했다. 그녀의 하얀 피부 위로 새빨간 줄이 겹겹이 더해지고 있었다.

“…….”

곡선을 그리고 있던 에단의 입가가 점차 굳어 갔다.

이상했다.

미노타우로스는 파괴력이 대단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공격 방식 자체는 굉장히 일관적이었다.

그녀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전투를 벌였으면 분명 놈의 전투 패턴을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단은 묘한 눈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주시했다.

이상했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내가 그녀를 과대평가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에단의 눈은 늘 정확했다. 그녀는 분명 실력자가 맞다.

“오른쪽에서 와.”

더군다나 지금 에단은 뒤에서 은하의 전투를 보조하고 있었다. 그의 동체 시력은 뭇 인간들과는 달랐다. 조금 더 빨리 상대의 움직임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하는 놈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받아치거나 오히려 공격하는 것은 버겁다는 듯이 말이다.

“너, 생각보다 약하구나. 아하, 혹시 소고기가 먹고 싶은 거야? 그래서 흠집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해. 너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지잖아.”

은하는 양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이를 빠득 갈았다. 빈정대듯 그녀를 놀린 에단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도대체 왜?’

은하가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에단의 매끈한 미간이 점차 좁아졌다. 그러다가 결국 한 가지 추측에 닿았다. “아.” 하고 에단의 입술이 미약하게 벌어졌다.

‘……언제부터였지?’

에단은 재빨리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비교적 최근 일이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 먹어.’

‘……이것도 먹든가.’

‘잘 먹길래.’

‘혹시 아직 부족해?’

‘그렇게 쳐다봐도 이젠 고기가 없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너.”

어두운 미궁 속에서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눈동자. 그것이 은하에게 닿았다.

몇 번이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

“……너, 마지막으로 먹은 거 언제야.”

──도대체 언제부터,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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