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9)화 (149/306)


#149. 뒤늦은 후회
2022.12.27.


대한민국 서울.

“【오전에,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류 가방을 정리하던 데이빗이 말했다. 맞은편에서 새장 속 새를 응시하던 포츈텔러, 안드레아를 향해서였다.

“【용건은 이번에도 같았습니다. 마에스트로의 귀국 건에 대해 묻더군요. 하루빨리 미국으로 돌아와 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그는 안드레아의 눈치를 보듯 힐끔 그의 표정을 확인했다. 하얀 새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안드레아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무리야. 요한은 아직 한국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거든.】”

“【……그렇군요.】”

데이빗의 표정 역시 흐려진다.

잠깐의 침묵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는 좀 어떠세요?】”

“【여전해.】”

뭘 물어보냐는 듯 안드레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난 요한에게 돌아가서 상태를 좀 봐야겠어. 곧 비행기 시간이지? 얼른 가 봐.】”

“【하지만, 안드레아 님.】”

안드레아를 붙잡듯 데이빗이 따라 일어선다.

“【알고 있어. 일단 이야기는 전해 둘게.】”

방문을 열기 직전, 안드레아는 짧게 덧붙였다.

“【……크게 기대는 말고.】”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사건. 안드레아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끔찍한 일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를 포함한 많은 헌터들이 그곳에 갇혔고, 그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국립 서울 현충원에 세워졌다.

많은 사상자는 그만큼 많은 생존자를 낳았다. 문자 그대로 숭고한 희생. 마에스트로 백이준 역시 그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 생존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근 안드레아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요한, 나 왔어.】”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분명 났음에도 이준은 이곳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캄캄한 방 안. 만일 공기에 색깔이 있다면 이곳의 공기는 분명 까맣게 탄 재처럼 시커멀 것이라고, 안드레아는 생각했다.

촤아악─

안드레아는 우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방 안이 밝아지자 그제야 테이블 위 그대로 방치된 식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역시 손대지 않은 모양이다.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킨 안드레아는 침대 곁에 다가가 이준을 응시했다.

“【데이빗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더라. 용건은…… 지난번이랑 같아. 네 귀국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야.】”

“【…….】”

“【우선 데이빗이 급하게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 오후 비행기래. 그가 알아서 잘 말해 두긴 하겠지만…… 너도 알잖아. 언제까지고 그들의 호출을 무시할 수는 없어. 어쨌든 네 국적은 지금도 미국이니까. 한국 협회와의 계약도 곧 끝이 날 거고, 그러면 이제는 변명거리도 없다고.】”

2032년 7월. 세계 각국에 정체불명의 탑이 등장했다.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2032년 11월. 시스템은 전 세계 상위 12인의 랭커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시스템이 뽑은 12인의 랭커 중 2위 ‘엘리멘탈 마스터’를 선두로 공략대를 엄선했다. 곧 그들을 몬태나주(州)에 나타난 탑에 투입시킬 예정이었다.

‘마에스트로의 귀국에 열을 올리는 것도 당연하지.’

이준이 탑에 진입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시스템 랭킹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에스트로가 프라임 헌터이자 미국 랭킹 3위 헌터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탑의 등장은 헌터계의 격변을 암시했고, 미국은 그것을 대비하여 마에스트로의 귀국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마에스트로가 시스템 랭킹 2위 ‘엘리멘탈 마스터’와 함께 탑에 입장만 할 수 있다면, 공략 성공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리라 기대하는 것일 테다.

“【요한, 내 말 듣고 있어?】”

안드레아는 요한 앞에 손바닥을 휘휘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지금 이준의 상태는, 굳이 말하자면…… 가까스로 숨만 붙어 있는 인형. 딱 그 정도였다.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어느 날, 3개월 내내 미동도 없던 흰 뱀이 미약한 움직임을 보인 이후 이준은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흑염의 프린세스, 차은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그렇게 차츰 일상을 찾나 싶었더니…….’

이틀 전, 그 뱀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현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반대편에서 뱀에게 물리적인 상해가 가해졌다는 것.

다만 은하가 뱀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 뱀이 요한의 사역(使役)하에 있다는 것을, 그녀라면 알고 있을 테니까.’

기능을 상실했다고는 한들 바깥과 연결된 유일한 창구인 뱀을 무턱대고 처리하는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는 반 푼짜리 창구마저 사라진 상태. 이준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폐인 상태인 그를 언제까지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

부탁이야, 요한. 안드레아는 침대 곁에 앉아 이준을 응시했다.

“【미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리해도 좋아. 한국에 남고 싶다면, 나도 남을게. 하지만 이런 나약한 모습은 이제 그만 보여 줬으면 해. 넌 세계에 열 명밖에 없는 프라임 헌터잖아.】”

“【프라임…….】”

스륵─

이준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잃은 잿빛 눈동자가 이곳을 향했다. 혈색 없는 낯빛에 눈가만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소용이지?】”

프라임 헌터. 세계 헌터 기구가 글로벌 랭킹 상위 10위권에게만 부여하는 특별한 칭호.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잖아.】”

자신은 여전히 30년 전에 살고 있었으며, 때문에 30년 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머저리였다.

이준은 이불 위에 놓인 흰 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벗어 놓은 허물인 양 미동조차 없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준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그 애가……. 내가 지킬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요한, 네 탓이 아니야.】”

안드레아는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내 탓이 맞아.】”

힘이 실리지 않은,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답한 이준은 창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푸른 하늘.

눈부신 햇살이 눈을 콕콕 찌른다.

저 멀리,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푸드덕 날아가는 검은 새가 보인다. 이준은 눈으로만 그것을 하염없이 쫓았다.

처음 TV 속에서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 애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그녀가 돌아온 것일까. 이번에는 진짜 은하가 맞을까?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기에는 경험에서 온 실망이 너무 컸다.

그가 30년 동안 은하의 행방을 찾을 동안 몇 번이고 만났던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 이번에도 그런 존재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한국으로 날아와 은하의 얼굴을 한 그녀를 마주하니, 이준은 또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진짜인 것 같다고.

그럼에도 마치 고집을 부리듯 끊임없이 의심했다. 어쩌면 마음속 깊숙이 그녀가 은하가 아니길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은하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얼굴에, 정말 은하인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해진 군복 대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해괴한 양산을 휘두르며 싸웠다. 이준이 기억하던 붉고 찬란한 화염 대신 검고 섬뜩한 흑염을 사용했다. ‘이유라’라는 이상한 가명을 쓰면서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 하던 그녀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 속에 당연하다는 듯이 서 있었고, 그 가운데서 이준이 모르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쨌든 결론은 이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이준은 흑염의 프린세스가 은하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다.

언제든 그 애를 다시 만나면 한눈에 알아볼 것이라고 자부했지만, 막상 때가 닥치니 그러지 못했다. 30년이란 세월은, 그리고 그동안의 실망과 상처는 이준의 확신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모두 변명이었다.

결국 이준은 자신이 찾아 헤매던 그녀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것만이 결과였다.


──그때.

은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더라.

“읏…….”

이준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신음을 토해 내며 제 가슴을 뜯었다. 폐부에 찬 공기가 마치 칼날이 되어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듯했다.

‘내가 말했잖아. 넌 헌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괴롭다.

‘그 애는 너 따위 괴물이 흉내 낼 만한 애가 아니야.’

몹시도 괴롭다.

그동안 그녀에게 뱉어 왔던 수많은 말들이 칼날이 되어 이준을 베고 가르고 찔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밀물처럼 덮쳐들었다.

그녀도, 은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만일 조금이라도 비슷한 기분을 겪었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미안……. 으, 은하…… 야…… 미안…….”

숨을 헐떡이던 이준이 급기야 상체를 가누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진다. 그가 타들어 가듯 뜨거운 숨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팍이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한다.

“【요한! 요한!】”

화들짝 놀란 안드레아는 이준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빛바랜 금발이 창백한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고, 파랗게 변한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듯, 그가 꺽꺽대며 미간을 와락 좁혔다.

“【젠장! 전화기……!】”

안드레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다급하게 수화기를 들고 미리 배치해 두었던 구급 요원을 호출하는 동안에도, 이준은 끊임없이 같은 단어만을 반복했다.

“은, 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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