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6)화 (146/306)


#146. 네뷸러(Nebula)
2022.12.24.


은하는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허리까지 오는 눈부신 금발. 봄의 하늘처럼 따스한 청안.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색감을 품은 남자다. 다만 살짝 푸른 기마저 도는 창백한 피부 탓인지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이한 복장.’

그는 교과서 속에서나 보았던 고대 그리스인처럼 커다란 천 한 장으로만 만들어진 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 살짝 걸쳐진 흰 천은 그의 오른쪽 가슴을 훤히 드러내며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인상착의로 보아서는 도저히 한국인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그는 분명 한국어로 그리 물었다.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말이다.

금실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밤하늘 아래 부드러이 흩날린다. 바다를 품은 듯 깊고 푸른 눈동자. 또한 흰 천 사이로 드러난 매끈하고 탄탄한 피부는 신전에 장식된 조각의 표면 같았다.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남자를 살펴보던 은하가 짧게 답했다.

“문을 통해서요.”

“문이요?”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떤 문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 뒤에…….”

멈칫.

슬쩍 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은하가 굳어 버렸다. 방금 전 자신이 들어왔던 거대한 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탓이다. 마치 연기처럼.

“분명 방금 전까지 여기에 문이 있었는데……?”

은하는 산들바람에 휘날리는 잔디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힐끗. 남자가 이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듯했다. 뺨 언저리에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문의 형태는 어땠습니까?”

“황금 문고리의, 커다란 문이었어요. 표면에 천칭이 그려진…….”

문에 대해 설명하던 은하는 문득 시선을 들었다. 언노운 게이트 내부에서 줄곧 은하를 따라다니던 뱀이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문을 넘어오지 못한 걸까? 그게 아니면 이쪽으로 넘어오는 순간 소멸됐다거나?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는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죠?”

지금 중요한 것은 문이나 뱀의 행방이 아니었다. 은하의 질문에 그는 미소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곳은 네뷸러 최상층입니다.”

네뷸러(Nebula). 성운, 그러니까 구름 모양의 별 무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상층? 그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내게 첫 손님이라고 했어.’

그 말은 지금까지 이 ‘네뷸러’라는 곳을 방문했던 자가 없다는 걸까? 확실히,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이 지금껏 들은 적이 없는 장소기는 했다.

“당신의 방문에 꽃들이 기뻐하는 듯하군요.”

문득 다가온 바람에 그의 향기가 실려 왔다. 이슬을 머금은 흙냄새.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잔디 위에 피어난 꽃을 아기의 뺨을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은하에게는 꽃의 기분 따위 전달되지 않았지만, 살며시 꽃잎을 떨며 춤추는 꽃은 정말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꽃을 어루만지던 그가 다시 허리를 들고 은하와 시선을 맞추었다.

태양을 품은 듯 눈부신 금발을 부드럽게 휘날리며, 그가 곱게 눈매를 접었다.

“제 이름은 아스트입니다. 당신은?”

눈이 마주쳤다.

“……은하.”

은하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가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차은하라고 해요.”

그리 답한 은하는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도 쉽게 제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고양이가 이름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남자, 아스트는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은하. 우선 따라오시겠습니까? 많이 지쳐 보이시는데,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문득 그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시야에 들어온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본떠 새긴 듯한 문양이었다. 단순한 타투라고 하기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은하는 그의 손을, 그 손에 새겨진 문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리송한 기분으로 시선을 드는 순간, 문득 밝은 달빛이 시야에 가득 찼다. 은하는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달이…….’

굳어 버렸다.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밤하늘에 뜬 달이 분명 두 개였다.

“하늘에 달이…… 두 개네요.”

“두 개지요.”

아스트가 여상한 일이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적어도 이곳이 은하가 알던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것만은…… 아니, 지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 * *

금발의 남자, 아스트는 은하에게 간단한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오랫동안 빈속이셨을 듯하여 부담 없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어떻게…….’

‘길을 헤맨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의 말에 그제야 은하는 자신의 몰골을 살펴보았다. 수척한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고 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드레스에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배. 아스트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 주변에는 식량이 풍부하지 않으니 필시 긴 시간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셨겠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궁금한 것은 많았으나 은하는 우선 주린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음식에 독이나 다른 무엇이 들었을지 의심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랫동안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굶어 죽든 독에 죽든, 어차피 죽는다면 우선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싶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더더욱, 지금 배를 채워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흰 죽처럼 보이는 것은 따듯한 스튜였다. 갓 구운 듯한 빵에 생과일을 짜서 만든 주스가 꽤 만족스러웠다. 아직까지도 신체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다행히 독은 들어 있지 않았던 듯했다.

은하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아스트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와 비슷한, 흰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여인은 “모시겠습니다.” 하며 은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목욕물을 받아 두었습니다. 탈의를 돕겠습니다.”

……탈의?

은하의 표정이 변했다.

“목욕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여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은하가 답했다. 여인은 몇 번이고 다시 제안을 했지만 은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은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온전히 믿기에는 은하가 가진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완고한 거절 끝에, 여인은 결국 꽃잎을 동동 띄운 따듯한 물로 은하의 발만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피로를 풀어 주는 차입니다. 아스트 님께서 이것을 손님께 대접하라 이르셨습니다.”

나무 쟁반을 들고 온 또 다른 여인이 은하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물론 은하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은하의 경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거듭하여 강요하지는 않았다.

“우선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아침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여인은 은하를 혼자 편히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 준 다음 조용히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고 은하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두 개의 달. 창가 아래 유유히 흔들리는 촛불. 그에 따라 벽에 비친 은하의 그림자 역시 흔들렸다.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은하는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일단 이곳 사람들은 은하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은하가 ‘최초의 손님’이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누군가 은하를 공격하거나 수상한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의 호의에 점차 익숙해져 가며, 경계심이 조금씩 풀어질 무렵.

은하는 생각했다.

“……떠나고 싶다고요?”

후원을 거닐고 있던 아스트가 뒤로 돌아 은하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신전 뒤편에 위치한 작은 정원으로, 아스트의 말에 따르면 본인 외에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은하는 귀한 손님이기 때문에 특별히 출입을 허가한 것이라고.

정원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백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여신상이 수면에서 반사된 잔물결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은하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돌아가야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분수대 물 위로 햇살이 별빛처럼 부서졌다. 그 빛이 반사된 아스트의 피부는 평소보다 더 희게 보였다.

처연하게 떨어지는 속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가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은하는 그가 왜 저렇게 슬픈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뇨.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간 쌓인 피로를 풀며 이 ‘네뷸러’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바깥’ 모습을 하고 있는 일종의 게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은하가 아는 한, 이런 게이트는 없었다.

다만 어디에서도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고양이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생각했다. 이곳은 은하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아니, 돌아가고 싶다고.

“이곳은 투쟁도, 굶주림도, 외로움도 없는 곳입니다. 어째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아스트가 물었다.

은하는 이윽고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내가 있던 곳은 그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이곳을 제외한 다른 곳들은 모두 그럴 테니까요.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죠. 은하,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아스트가 은하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 그래서일까. 그 달빛은 은하가 알던 것보다 더 찬란했다.

그리고 눈앞의 미형의 남자. 그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또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곳에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것은……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달콤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것에 흔들릴 은하가 아니었다.

오래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곳에서의 생활은 편안했다. 아스트를 포함한 신전 사람들은 은하에게 호의적이었고, 충분한 배려를 해 주었다.

몬스터와의 힘든 전투도 필요 없었고, 타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며 나설 필요도,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와 계약할 필요도 없었다.

평화. 이곳에는 단지 그것만이 있었다.

하지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단둘이서 조금 더 놀고 싶었다며, 내게 가족은 언니밖에 없다고 울먹입니다.]

은하는 아스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난 돌아가야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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