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5)화 (145/306)


#145. 문 너머의 남자
2022.12.23.


타박, 타박…….

힘없이 이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문득 멎었다.

“…….”

걸음을 멈춘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처럼 쌓인 몬스터의 사체. 새까맣게 타 버린 나뭇가지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조금 뜨거울 거야.’

모두를 이곳에서 내보내고 홀로 남은 은하.

이후 은하는 이 게이트 내부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물론 출구도, 생존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찾은 것은 단 하나.

“…….”

은하는 손에 쥐고 있던 천 조각 하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유환의 낡아 빠진 도복의 일부였다. 그것을 눈에 담는 순간 은하의 귓가에 ‘아우님’ 하는 그의 목소리가 스친다.

그가 이곳을 탈출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시우와 이준을 내보내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하는 유환을 보지 못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탈출하지 못한 것일 테다.

은하는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유환의 옷가지를 발견한 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무런 힌트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펜던트의 추적 기능에 대해 떠올리고 그것을 꺼내 들었다.

‘추적.’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죽은 대상에게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천 조각을 쥔 손에 살그머니 힘이 들어간다. 은하는 그것을 품속에 고이 넣고 다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더라. 체감상으로는 적어도 이틀은 지난 것 같은데.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배가 고파질 만도 했다.

‘물론 배를 채울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처 내벽에 기대어 앉은 은하는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를 눈에 담았다.

이전의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을 때도 그리했듯, 몬스터를 뜯어 먹으면 목숨을 연명하는 것은 가능할 테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발밑에 쓰러져 있는 이 몬스터는 곤충형 몬스터. 즉, 벌레였다.

‘……차라리 호랑이가 낫지.’

벌레 사체를 쳐다보던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저것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벌레 이외에도 입에 넣을 만한 것이 또 한 가지 있기는 했다.

은하는 저 멀리서 자신을 관찰하는 듯 작은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부턴가 자신을 따라다니던 저 뱀에게서는 희미하게 이준의 냄새가 났다. 아마도 게이트 탈출 직전 그가 제게 붙여 둔 것인 듯했다.

보호의 목적?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감시를 위해? 오히려 그편이 더 납득이 갔다.

차라리 먹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벌레 고기보다는 뱀 고기가 낫긴 하겠지만.’

그러나 은하는 그러지 않았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아니, 저 뱀의 용도가 어찌 됐든 지금은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게이트가 완전히 봉쇄되면서 저 뱀은 기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

만일 연락통으로써의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진즉에 은하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 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마치 은하의 주머니 속 쓸모없는 단말기처럼.

그런데도 은하가 저 뱀을 먹거나 처리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살고자 한다면 뭔들 입에 넣지 못하겠느냐마는 뱀 혹은 벌레에까지 손이 가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견딜 만한 모양이다.

뱀에게서 시선을 거둔 은하는 습관처럼 왼쪽 팔목을 감쌌다.

기존의 낡은 소원 팔찌가 아닌, 시우와 제휘가 직접 만들어 선물해 준 새로운 소원 팔찌. 그것을 매만지며 은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처음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서 은하는 게이트에 함께 투입된 동료들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어 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단 한 명, 이준이라도 살리기 위해 그곳에 홀로 남기를 선택했다.

죽을 줄 알았으나 살아남았고, 다시 돌아간 현대는 30년이 흐른 뒤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떨까?

이번에도 30년이 흘러 있을까? 혹은, 이번에는 그보다 더 흘러 있을지도 모른다.

40년? 50년? 어쩌면 100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모두 바뀌어 있고,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모두 변했거나 죽었을 것이다.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모르는 세상에 뚝 떨어진 것처럼 은하는 또다시 혼자가 될 것이다.

이전에는 시우를 만나 여차여차하여 의식주를 제공받을 수 있었지만……. 만일 이곳에서 탈출한다 한들, 이번에도 그렇게 운이 좋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은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준 단 한 명을 살릴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구해 낼 수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 이젠 됐어.’

이대로 이곳에서 눈을 감는다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정말 여생의 미련은 없다.

단념이라기보다는 만족.

은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소리 없이 턱을 들어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끝말잇기나 할까, 고양아.”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양아?”

눈앞에 띠링, 하고 떠올라야 할 노란 메시지창이 아무리 기다려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

은하는 다시 깨달았다. 고양이가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는데.’

수다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고양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곁을 떠난다는 생각 말이다.

몬스터로 인식된 은하가 ‘순환의 줄기’에 입장했을 때, 고양이는 은하에게 이름을 돌려주었고, 이후 사라져 버렸다.

평소처럼 단순히 토라져 버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부재의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렇다면 은하가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첫째. 갑작스러운 계약 변경으로 인해 고양이가 은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상실했을 가능성. 어떠한 페널티로 더 이상 말을 걸거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인 것일지도 몰랐다.

둘째. 은하에게 이름을 돌려주면서 고양이가 어떤 것을 희생했을 가능성.

셋째. 고양이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을 가능성.

[이름이 없으면 나는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며, 내가 실재(實在)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은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자 화르륵, 검은 불씨가 작은 성냥불처럼 켜졌다.

흑염(黑焰).

고양이와의 계약으로 부여받은 권능이었다.

아직 유지되는 것을 보면, 고양이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신수가 소멸하였다면 자동으로 계약 역시 종료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주어진 권능 역시 사라졌을 터.

그러나 은하는 아직까지도 흑염을 사용하고 있다. 권능이, 계약이 유효하다는 소리.

─즉 고양이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은하는 불길을 거두고 이번에는 허공을 가볍게 두드렸다.

띠링.

[인벤토리를 불러옵니다.]

고양이가 주었던 아이템들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불러올 정보가 많습니다. 해당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예정입니다.]

[ - - - Loading - - - ]

늘 그렇듯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인벤토리가 열렸다.

[흑호의 가죽 x7551]

[날카로운 송곳니 x6587]

[단단한 짐승뼈 x459]

[알 수 없는 독액 x12]

[찢어진 날개 x3]

…….

스크롤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것은 잡동사니 아이템들이었다. 헌터 옥션에서 대부분 팔아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꽤 많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은하는 손가락을 휙 하고 아래로 쓸어내렸다. 아래로, 또 아래로. 그러다가 한곳에서 우뚝 손가락이 멈추었다.

입자가 고운 소금, 향이 좋은 흑후추, 최고급 트러플 오일.

언노운 게이트에서 맛도 영양도 없는 몬스터 고기를 씹어 먹는 은하를 보며, 언젠가 고양이가 선물해 준 아이템들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케첩이나 마요네즈 같은 것들도 준비되어 있다고 야심 차게 어필합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은하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슬쩍 손가락을 다시 아래로 내리려는 순간, 문득 한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템 상세 ▶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 │ 일반 아이템 (기타) │ 희귀도 : ??? │ 물고기 모양의 커다란 쿠션. 코를 박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그 외의 용도는 없어 보인다.]

이건 순환의 줄기에 갇혔을 때, 고양이가 은하에게 선물해 준 아이템이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것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도 스트레스도 확 풀릴 것이라며, 기운이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아이템 사용을 자신 있게 권합니다.]

아마 그렇게 말했던가.

“…….”

은하는 아이템 명칭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이내 살짝 허공을 두드렸다.

[선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 밖으로 꺼내시겠습니까?]

[확인하셨습니다.]

툭.

무릎 위로 떨어지는 고등어 쿠션. 푹신푹신한 쿠션에서는 캣닢 특유의 향이 솔솔 났다.

“……그러네.”

작게 중얼거린 은하가 두 팔로 살며시 그것을 감싸 안았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신기하게도 그랬다.

스르륵 눈을 감아 보았다.

아래로, 저 아래로 몸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포근하고 따듯했다. 캣닢 향이 공허한 허기를 달래 주었다. 춥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온했다.

고양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소멸한 것이 아니라면…… 그때처럼 어느 언노운 게이트 안에 꽁꽁 숨어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낮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재밌는 장난감을 찾아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적막함이 유독 거대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쓸쓸함, 외로움, 그보다는 허전함이었다.

폭신폭신한 쿠션에 얼굴은 묻은 은하는 고양이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처음 고양이와 만났던 기억. 끊어진 소원 팔찌를 고양이가 고쳐 주었던 기억. 적적할 때마다 끝말잇기를 하며 시간을 때운 기억.

그리고…….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단둘이서 조금 더 놀고 싶었다며, 내게 가족은 언니밖에 없다고 울먹입니다.]

[바깥은 위험하다, 너무 무섭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합니다.]

“…….”

쿠션 표면을 쓸던 은하의 손이 멈춘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혹시 자신이 미워진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황금색 눈동자가 몹시 슬퍼 보입니다.]

한참 동안 쿠션에 코를 박고 있던 은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를 찾아야겠다.

찾아서, 말을 하는 것이다.

이름을 돌려주어서 고맙다고. 너를 원망한 적은 있지만, 너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고.

내게도 너는, 언제나 친구라고.

* * *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은하가 게이트에 갇힌 지도 몇 주일이 흘렀다. 물론 체감상 그랬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만큼 흘렀는지, 혹은 그 이상 흘렀는지 은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은하는 살아남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의 죽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생존의 최소한의 조건은 역시 식량이었다. 은하는 벌레를 먹을 각오를 다지고 불에 익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넣기 직전, 발견했다. 불에 거의 다 타 버린 황금빛 과실을 말이다.

게이트 곳곳에 주렁주렁 열려 있던 황금빛 과실. 그것들은 껍데기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

은하는 아쉬운 대로 그것을 씹어 삼켰다.

그러자.

[능력치 영구 상승! 최대 체력 +10]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

이 거대 언노운 게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재생력이었다. 그리고 그 재생력은 이 과실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비록 거의 다 타 버렸다고는 해도, 기능이 모두 손실된 것은 아니었던 걸까. 그것은 ‘체력’을 영구 상승시켜 줄 뿐만 아니라 당장의 포만감을 주었다.

이후 은하는 황금빛 과실 찌꺼기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씹어 삼켰다.

[능력치 영구 상승! 최대 체력 +10]

[능력치 영구 상승! 최대 체력 +10]

[능력치 영구 상승! 최대 체력 +10]

그 덕분에 은하는 벌레를 먹지 않고도 양호한 건강을 유지하며 게이트 탐색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발견했다.

“…….”

은하는 자신의 눈앞에 위치한 거대한 문을 향해 슬며시 손을 뻗었다. 차게 식은 문 표면이 손끝으로 오롯이 전달되었다.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곳은 여신상이 있던 장소였다. 칼과 저울을 쥐고 있던 거대한 여신상 말이다.

순환의 줄기에서 탈출한 은하는 이곳, 여신상 앞에서 시우를 포함한 동료들과 재회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 이런 문 따위 없었다. 그렇다면…….

‘게이트를 클리어 하면서 생겼다거나.’

모두를 탈출시키고 난 후, 게이트에 남아 있던 황금 과실을 모조리 파괴한 참이다. 만약 그것이 이 게이트의 클리어 조건이었다면? 그래서 이 ‘또 다른 탈출구’가 나타난 것이라면?

은하는 문고리를 손에 쥔 채 턱을 들어 그 거대한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 문이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몰랐다. 사라진 고양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전혀 다른 공간과 이어진 통로일지도 모른다.

‘들어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대로 언노운 게이트에 가만히 있어 보았자 변할 것은 없으리란 것.

타다 만 황금빛 과실 찌꺼기도 거의 다 먹어 버렸고, 이준이 남기고 간 흰 뱀에게서 이렇다 할 신호도 찾아볼 수 없다.

언제까지고 가만히 구출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움직여야만 한다.

은하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그것을 돌렸다.

기이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문틈 사이로 환한 빛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하는 슬며시 눈매를 좁혔다. 이윽고 완전히 문이 열렸을 때,

솨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에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바람일까. 은하는 사방으로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바깥으로…… 나온 거야?’

은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까만 밤하늘. 그리고 그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잔디밭. 무엇보다 싱그러운 이 공기와 바람. 도저히 게이트 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은하는 앞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뻗었다. 뾰족한 구두 굽이 이불처럼 폭신한 잔디 아래로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신전?’

연둣빛 잔디 위에 세워진, 눈처럼 새하얀 신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노운 게이트 내부에서도 신전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영면의 제단이었지.

제단, 여신상, 그리고 눈앞의 저 신전.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그때였다.

신전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던 은하 곁에, 느닷없이 옅은 그림자가 졌다.

“……!”

놀란 은하가 휙! 튕기듯 몸을 옮겨 빠르게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 순간, 꽃향기를 품은 부드러운 바람이 화아악 다가왔다.

“첫 손님이로군요.”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꿀을 머금은 듯 달콤한 미성이 들려온다. 은하는 서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남자.

찬란한 금발을 가진,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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